[Opinion] 결국은, 우리 이야기 [도서]

글 입력 2019.06.03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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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스푼의 시간>의 주인공은 은결이다. 그에 대해 잠깐 설명해보면, 그는 17세 남성의 모습을 한 가정용 인공 지능 로봇이며 점차 감정을 갖게 되는 입체적 인물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은결과 그의 변화에 중점을 두는 것이 마땅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은결보다 은결의 주변인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이 작품이 인공 지능 로봇이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인간과 인공 지능 로봇의 관계나 그에 관한 윤리적, 철학적 문제 보다는 인간과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은결은 인간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보고 배운다. 그리고 변화한다. 그렇기에 인간에게서 비롯된 은결의 변화는 인간의 삶을 투영한다. 객관적 혹은 무(無)인 상태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인공 지능 로봇이라는 설정의 역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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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의 주변인은 명정, 시호, 세주, 준교이다. 명정은 은결의 주인이자 세탁소 사장이고 나머지는 세탁소 손님이자 동네 이웃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할 법한 평범한 이들이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네가 그렇듯 이들도 삶에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먼저 명정은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혼자다. 아내와 아들을 먼저 앞세웠기 때문. 삶에 치여서 아내가 아픈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아내를 보냈고 아들은 먼 이국땅에서 사고로 잃었다. 아들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이런 그에게 아들의 회사에서 배송된 은결은 유일한 가족이다. 무던하지만 무던하지 않은 삶에서 우러나온 명정의 가치관과 철학은 점차 은결에게 전이된다.

 

명정이 삶의 역경을 겪은 사람이라면 시호, 세주, 준교는 앞으로 겪게 되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명정은 삶이 어떠한지 말로 설명해준다면 반면 이들은 직접 보여준다. 특히 시호와 세주가 그렇다.


세주와 시호에게는 흔히 인생 꼬인다는 말이 적절하다. 은결을 처음 만날 당시 생기 넘치던 그들은 인생에서 고난을 겪게 된다. 대학원을 나와 홀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세주는 결혼 후 얼마 안 가 이혼한다. 이혼이 인생의 실패는 아니지만, 그 후 세주의 처지가 악화하였으니 시련의 시작임은 분명하다. 이혼 후 그가 돌아온 곳은 어머니의 원룸이다. 어머니에게 기댈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아이까지 딸린 터라 세주는 마음 정리할 새도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결혼 전보다 좋은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운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주는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시호의 상황도 세주 못지 않다. 시호는 형편이 어려운 집의 막내딸이다. 대학생이 된 시호는 전공으로 철학과를 선택한다. 철학과는 소위 말하는 ‘취업이 잘되는 학과’가 아니다. 그렇기에 시호의 집안 사정을 고려해볼 때 시호와 어울리지 않는다. 돈을 벌지 않고 학문을 탐구하는 것은 시호에게 사치이기 때문이다. 시호는 이것을 대학에 가서 여실히 느끼게 된다. 시호가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친구들은 유학을 준비하고, 시호가 커피 한 잔의 값과 전공책 값을 저울질할 때 친구들은 커피를 마시는데 망설임이 없다. 같은 교복을 입고 급식을 먹지 않기에 빈부격차는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시호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을 궁핍함에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지친 것이다. 여기에 폭력적 성향의 남자친구까지 만나게 되면서 시호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늪으로 빠진다.
 

삶에 치이고 휩쓸리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 것이 은결이다. 그는 세주의 절망과 시호의 눈물을 데이터로 차곡차곡 입력한다. 때로는 그 감정에 의문을 표하기도 하면서. 이것이 쌓여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변해간다. 이야기가 여기서 마무리된다면 은결은 절망과 슬픔만 아는 안타까운 인공 지능 로봇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책의 끝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 p249

 

 

인생을 길이라고 한다면, 세주와 시호는 길을 걷다 넘어진 것이다. 그것도 대차게.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선다. 은결의 위와 같은 생각도 바로 이런 모습에서 나왔으리라. 앞서 말했듯, 은결의 생각 밑바탕엔 명정, 세주, 시호, 준교가 있으니 말이다.

 

세주는 우울을 극복하기위해 정신과를 찾아가고 한결 좋아진다. 또한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고 함께할 사람을 찾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 시호는 준교와 은결의 도움을 받아 남자친구에게서 탈출한다. 그 후 꿈을 가진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소망을 갖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꿈을 준교와 함께 이뤄간다.


 

무엇보다도 나는 꿈을 꿀 줄 아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고 싶어.

......


잠들어 꿈을 꾸고 거기서 깨어날 줄 아는 사람, 꿈을 그리거나 그렸던 적 있는 사람과 살아갈 거야. 깨어난 뒤 남아 있는 것이 악몽뿐이라도 상관없고, 깨어져 형태를 잃은 꿈의 파편을 쓸어 담으면서 살아갈 뿐이라도 괜찮아. 거기에 뭉개고 뒹굴지만 않는다면, 손대지 않으면 적어도 베이지는 않을 테니까.


- p174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였다. 주변에 있을 법 해서 남 일 같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다소 우울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에 안도했으며 그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잘 살라고,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응원과 위로가 아니었나 싶다.



[정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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