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런 무대를 만들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 2021 서울오페라페스티벌 '허왕후'

유럽이 아닌 서울에서 맛보는 오페라의 매력
글 입력 2021.10.18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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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도 더 된 일로 기억한다. 어느 신문사에서 주최한 오페라 응모권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다. 지방에 살지만 학교가 끝나자마자 서울로 출발했다. 예상치 못하게 차가 막혀서 거의 5분 전에 예술의전당에 겨우 도착했고, 허겁지겁 뛰어 공연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만난 오페라는 ‘라 보엠’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공연장 의자에서 눈과 귀로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인간은 눈을 통한 감각을 가장 먼저 인지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졌다. 마이크 없이도 4층 높이의 공연장을 홀로 울림으로 채우는 주인공 미미의 풍부한 성량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압도적인 무대 규모와 예쁜 미술, 보헤미안이 입는 것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아름다운 의상 등, 배우와 줄거리를 넘어 작품을 이루는 다양한 구성 요소를 보고 듣는 재미가 있었다.


음악, 미술 테크닉이 집대성된 무대 예술을 대학교에 가면 꼭 해 보고 싶다는 꿈이 자라났다. 그래서 한동안 어른들에게 장래 희망을 ‘뮤지컬 기획자’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를 들은 어머니는 너는 예술적 재능이 없다며 극구 만류를 하셨지만.


그래도 대학교에 와서 소원을 어느 정도 이뤘다. 창작 뮤지컬 동아리에서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든 무대를 올렸을 때는, 구슬땀을 흘려가며 연습했던 2개월 동안의 여정이 생각나 만감이 교차했다. 나아가 감사하게도 기성 극단의 배우 오디션에 합격하여 프로 연극의 세계를 맛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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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구성원이 힘을 합쳐 무대를 올리고, 우리의 무대를 관객이 봐줬을 때의 기쁨을 알아버린 나는, 문화예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진로를 준비해야 하는 아쉬움을 자주 극장을 찾음으로써 달랬지만, 정작 처음으로 내 깊은 곳에 있는 예술혼을 끌어냈던 오페라를 볼 기회는 없었다.


마침 ‘아트인사이트’에서 ‘2021 서울오페라페스티벌’을 누릴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공연일 당일은 장거리를 돌아다녀야 하는 개인적인 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에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페라 ‘허왕후’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가야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이다. 금관가야의 초대 국왕인 수로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는데 그가 바로 허왕후이다.


삼국시대의 다른 국가들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료가 얼마 되지 않아 구체적인 나라의 모습을 알기가 어려운데, 가야는 그중에서도 더더욱 기록이 부족하다. 학창 시절의 한국사 수업 시간을 떠올려보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가야에 대해서는 ‘변한 지방을 중심으로 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철이 풍부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른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정도밖에 배운 기억이 없을 것이다.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내막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조선 또는 근대보다, 역사적으로 존재는 파악되나 아는 것이 거의 없고 정보의 구멍이 크게 남아 있는 나라를 소재로 한 창작극은 작가가 훨씬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품에는 김수로의 형 이진아시, 신라의 왕이었던 석탈해가 악역으로 등장한다. 특히 석탈해는 디얀시라는 여자의 연인이 된 것처럼 그녀를 속여 가야가 가진 고유의 철 제조 기술을 신라로 빼돌리려는, 작중의 주요 악역이 되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한껏 들어간 대사가 오케스트라의 선율, 배우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한편의 거대한 오페라 한편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에서, 서양 관현악 악기들이 멜로디를 연주하고 노래는 다시 한국어로 부른다. 고전 오페라에서 만날 수 없는 색다른 동서양 화합의 장이 펼쳐졌다.

 

 

웃음보다 울음이 더 많았던 날 중에

햇살보다 그늘이 더욱 많았던 날 중에

빛 좋은 날 따스한 눈빛으로 다가온 당신

당신은 내게 웃음이었고 햇살이었지요


우리 이제 비껴간 운명이라 어쩔 수 없다면

말 한마디, 미소 한 번만 진심으로 건네주오


그 하나, 가슴 깊이 꽁꽁 묶어두었다가

나 홀로 숨어, 가끔 열어볼 수 있도록

그 하나로 나 평생 숨죽여 견딜 수 있으니


미련한 나, 차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나

그저 한마디 사랑했었다 말해주오

 

- No. 19 웃음보다 울음이 더 많았던 날 중에(디얀시, 레치타티브와 아리아)

 

 

석탈해가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아버린 디얀시. 하지만 그와 함께했던 순간이 꿀과 같이 달콤했기에, 애써 믿지 않으며 나에게 한 번만 더 사랑을 달라는 애절한 목소리의 아리아가 기억에 남는다. 함께 보러 간 사람 옆에서 남몰래 나도 눈물이 차오를 만큼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랫말이 배우에게서 가락과 함께 나올 때 작가는 과연 어떤 기분일까? 분명 짜릿한 희열을 느끼지 않을까? 유럽에 굳이 가지 않고도 서울 한복판에서, 오페라 커튼콜에 올라오는 전 스태프들에게 박수를 보내줄 수 있다니. 이 극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예전에 연극 배우가 되어 관객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적의 후련함과 기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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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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