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ESTJ의 우울증 [사람]

봄날은 온다
글 입력 2021.10.30 02:2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쉬어가는 것이 두려워



한 단어로 나를 압축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만큼 적합한 설명도 없다. 나는 'ESTJ'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나태하거나 게으른 것을 가장 싫어하며, 남들보다 앞서 있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다.

 

요약하자면, 내가 추구하는 나의 모습은 완벽함이다. 그런 내가 중도 휴학을 결정했다. 전 학기, 그 전 학기 모두 21학점을 들으며 대외활동까지 했던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울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울증, 어쩌면 ESTJ형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일지도 모른다. 왜 우울증이 찾아왔는지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그렇듯 개인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쨌든 한 주 내내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작성하고 바깥에 나돌아다니던 나는 이제 침대 밖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빛이 무서워 암막커튼을 치고 하루 24시간 중 대부분은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낸다.

 

 

 

질병 휴학계가 있는 줄도 몰랐다



[크기변환]1.jpg

 

 

남들이 휴학을 할 때 나는 절대 쉬어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어쨌든 남들보다 앞선다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조금이라도 경쟁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울증이 심해져 강의 하나조차 집중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서야 휴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질병 휴학계를 내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첫째,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고집스럽게 이것저것 했던 것도 같다. 나는 이만큼이나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나더러 병들었다고 하지 말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냥 신체가 아픈 것과 같이 뇌에 찾아온 질병이었다.

 

둘째,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이 불안했다. 내가 쉬어가는 1년동안 누군가는 취업에 성공할 수도 있는 거고, 당장 나조차도 지난 한 해 정말 많은 것을 해냈는데 경쟁에서 밀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쉬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늘 과제 마감 1주일 전에 제출을 했던 내가 우울증이 심해져 당일날 부랴부랴 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너무 비참하고 슬펐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자꾸만 패배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휴식은 내게 용납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강제로 멈춘 기계



이런 내가 질병 휴학을 한 지 2주일이 넘었다. 하루종일 잠을 자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님과 여행을 다닌다. 그렇지 않을 때면 혼자 용기를 내 밖으로 나가 서점에 다녀오기도 한다.

 

우울증에 걸리면 햇빛이 무서워진다. 운동조차 하기 힘들어서 몸은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자괴감의 악순환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쉬는 것이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남들이 앞서가는 모습을 보고도 불안함을 가라앉힐 수 있다.

 

 

[크기변환]2.jpg

 

 

쉬어가도 괜찮다, 라는 말은 내가 늘 들어왔던 것이지만 단 한번도 귀담아 들은 적 없었다. 그러나 막상 절벽에 내몰리고 나니 죽는 것보다는 쉬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길고, 나는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한데 얼마든지 아파해도 되지 않나. 아직까지 온전히 쉰다기에는 놓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것마저도 내 휴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게 쉼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최소 나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선에서 영위하는 삶이다.


웃긴 말로는 ESTJ계의 이단아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부모님과 함께 카페에 와 있다. 평소라면 과제와 대외활동에 치여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할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행복한 것도 같다. 비록 우울증이라는 틀에 갇혀 그림자마냥 진득한 우울함은 늘상 나를 감싸안지만, 최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 자신을 내버려 둘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된다.

 

 

[크기변환]3.jpg


 

이런 사람도 우울증에 걸린다. 나도 아직까지는 자기 혐오를 온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중도 휴학을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조금 우리를 놓아주도록 하자. 바쁜 일상에서 찾을 수 없던 행복을 지금의 나는 찾아가는 중이니까 말이다.


 

[허향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0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