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펙트럼'으로 타자 감각하기 - 1편: 언어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4.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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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서의 내가 ‘너’보다는 ‘당신’이 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일말의 존중과 낭만이 서린 말로까지 느껴진다. 발음하노라면 넉넉한 울림 소리와 함께 긴 여운이 빠지고, 존재는 오래 머문다. 그 낭만은 또한 타자를 자신의 안으로 끌어와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의 반복으로부터 커져간다. 그러나 이 시도가 언제나 좌절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성장하며 우리는 ‘당신’이 되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너’로 머무는 현실에 안주하는 법을 배워간다. 이처럼 타인에게 완전히 가닿을 수 없는 비극을 끝없이 경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자’라는 막막한 개념으로부터 가장 먼저 뽑아낸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모두가 1인분 몫을 해내는 주체됨과 적당한 타자됨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사실, 이 갈등은 우리를 좌절시키지만 필수불가결한 것이란 사실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새로운 타자와 타자성을 논하기에 최적인 7편의 소설로 이뤄져 있다. 특히 김초엽 작가만의 온건하고 인간적인 SF적 세계관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일곱 편 모두 타자 개념에 대해 고민하기에 적절하지만, 그중에서도 「스펙트럼」을 택해보았다. 서로의 생에 극단적 타자로서 등장한 ‘외계인’과 ‘지구인’의 유대 축적 과정이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이자 타자로서의 자신을 인지했을 때의 혼란, 완전히 새로운 타자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최적의 텍스트라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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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사설을 더하자면, 「스펙트럼」만의 독특한 문제의식을 인상적으로 보기도 했다. 외계 행성으로의 조난, 외계인과의 조우라는 SF적 클리셰를 소재로 두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간 수많은 SF 작품들, 특히 SF 영화가 수용자들에게 각인한 몇 가지 공식들을 상기해보자.


우주까지 나가 놓고 인간이 깨닫는 건 겨우 ‘나는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했다’는 사실, 그때의 내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는 우주만큼이나 폭력적인 것이었다는 사실, 인간 밖의 우주만큼이나 인간 안에 내뻗은 우주가 두껍다는 사실 정도일 테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안전한 감동을 선사한다. 아득한 세상의 가장자리에서까지 이어지는 인간적 가치와 그에 대한 묘사는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나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뻔한 한계가 드러난다.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서사인 동시에 아주 새로운 문제 의식을 던지지는 못하는 것이다. 「스펙트럼」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주 새로운 타자적 텍스트이다.

 

물리적 접촉과 그로 인한 생생한 감각이 타자와 나의 관계를 굳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아진 펜데믹 상황에서, 함께할수록 치명적이고 사랑할수록 멀어져야 하는 상황은 물리적으로 감각할 수 없는 ‘타자’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오래 시달려왔다. 타자와의 새로운 소통 방식,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타자에 대해 살펴보기에 이보다 적절한 시기는 또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스펙트럼」 만큼 적절한 텍스트도 없으리라 여긴다.


소설 「스펙트럼」은 기본적으로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외계 생명체를 연구하던 학자 ‘희진’은 우주에 파견되었다가 외계 행성에 조난 당하게 된다. 소설은 ‘희진’이 외계 생명체 ‘무리인’을 만나 약 10년간 그 중 한 개체인 ‘루이’와 교류하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학자적 열망을 지닌 ‘희진’이 무리인들만의 색채 언어를 익히고 해석하기 위한 시도가 소설의 주된 갈등이자 과제로 제시된다.


 

 

타자와 소통: 언어라는 매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타자를 ‘나와는 이질적인 삶의 규칙을 따를 수 있는 존재’로 설정했다. 상투적인 표현을 끌어오자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언제든지 나와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타자인 것이다. 즉 타자는 언제든 내 의도를 좌절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스펙트럼」의 희진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타자 앞에서 자신의 행동 동기를 분명히 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그 의도가 제대로 가닿지 못할 상황을 끊임없이 상정한다. 그것이 무리인들과의 공생을 위한 희진의 첫 시도였다.


 

도구의 사용, 상징 언어의 존재, 사회적 상호작용, 분명한 지성의 증거. 말을 걸어도 될까. 그들이 정말로 지성을 가진 생명체라면 희진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p.67)

 

 

비트겐슈타인의 타자에 대한 정의가 아주 낯설지만은 않는 것은 타자와 나의 이질성이 언어의 한계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쉬르의 기호학과 긴밀한 연결 지점이 있다고 느낀다. 「스펙트럼」에는 통상적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의사소통 수단이 등장하는데, 인간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색채 언어’가 그것이다. 신체 구조는 유사하더라도 팔 다리가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 표정이나 바디랭귀지를 통한 소통도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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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의 기호학

 

 

소쉬르의 기호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희진에게 외계 행성은 '랑그' 없이 '파롤'만이 난무하는 곳이라 볼 수 있다. 기의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는 비극은 오히려 사치일 정도이며, 미끄러질 기의라도 전할 기표의 근본부터 고민해야 한다. 물론 외시적 의미에 대한 그 어떤 합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곳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는 각 사용자의 끝없는 자유 연상의 가능성과 해석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요인으로써 파롤과 공시적 의미의 존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실 콘텐츠 제작과 유통, 그리고 이를 통한 소통 과정에서 안전한 의미 전달을 가능케 하는 건 랑그와 외시적 의미의 존재이다. 기존에 랑그와 외시적 의미가 공고히 자리잡지 않는다면 그를 변주 혹은 해체한 다양한 의미 작용조차 나타날 수 없다. 애초에 구조주의가 선행해야 그 구조를 해체하는 후기 구조주의의 존재가 성립 가능한 것과 유사한 논리이다.

 

소설 「스펙트럼」은 소쉬르가 제시한 3가지 언어의 특징을 서사적으로 훌륭히 구현해냈다. 아래는 해당 특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장면을 인용하고 그에 설명을 덧붙인 바이다.

 

 

 

1. 언어의 절대성


 

소쉬르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로밖에 세상을 인식하고 소통할 수 없다. 이것이 언어의 절대적인 특징이다. 무리인과 처음 조우했을 때, 지칠대로 지쳐 혼절하기 직전의 희진은 무리인들에게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건낸다.

 

 

“도와줘.”

그들의 시선이 희진을 향했다. 알아들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희진의 무력함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무리 중 누군가 무기를 꺼내들었다.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을게. 그냥,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 (p.67)

 

 

희진은 무리인들이 낯선 음성과 언어에 적대감을 보일 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절박함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닌 언어로밖에는 소통할 수 없는 한계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후 희진은 루이와 함께 동굴의 생활을 지속하며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데, 그럴 때의 짜릿함처럼 극한의 감정을 경험할 때도 종종 지구의 언어가 튀어나온다. 루이 역시 희진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무리인의 언어로 반응할 때가 있지만, 둘 사이의 지적 소통은 불가능해 보인다.

   

 

“루이, 나 드디어 찾았어!”

희진은 부품을 손에 잡고 흔들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괜히 루이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루이 역시 희진을 응시하며 무언가 긴 소리를 냈지만

희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p.75)

 

 

통할 리 없음을 아는데도 희진은 끝없이 시도한다. 그리고 끝없이 실패한다. 실제로 이 실패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희진은 절망하기 보다는 그저 루이가 지닌 존재의 부피감에 만족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더욱 구체적으로 후술하겠다.

 

소설 「스펙트럼」은 언어의 절대적 비극과 비극 속에만 머물지 않는 언어 사용자의 저력을 드러낸다. 여기서 이와 유사한 소재를 차용한 또 다른 SF 소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와 비교할 지점이 있어 보인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외계 생명체 햅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 루이즈의 이야기를 전한다. 인간의 언어는 보통 시간의 개념을 내제한 채 선형적이며, 그렇기에 인과 관계를 담고 있다.

 

그러나 헵타포드의 언어에는 그 어떤 방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들의 문어는 어디서부터 읽든 의미가 통하며 그렇기에 문장을 시작할 때 이미 끝을 알고 있는 셈이 된다. 이는 헵타포드의 비선형적인 사고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고 배울수록 루이즈의 사고 체계가 크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즉, 빛은 뻗어나가다가도 물체를 만나면 굴절한다는 인간적 사고가 아닌, 빛은 애초에 출발 이전부터 진로에 대한 모든 계산을 끝낸다는 헵타포드식 사고를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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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빛의 진행에 관한 사고는 인생 전반에 대한 관념으로까지 번져 루이즈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관조하는 사고 체계를 갖추게 된다. 언어는 이토록 절대적이다. 인식의 매개인 언어가 바뀐다면 주체의 사고 체계도, 주체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제를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만으로 일축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겠지만, 분명 그 깊은 주제 의식은 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스펙트럼」 속 희진은 「네 인생의 이야기」의 루이즈처럼 거대한 사고 체계의 변화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구로 생환한 후에 무리인들의 색채 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지구 곳곳에 떨어지고 굴절되고 반사되는 빛과 색을 ‘읽는’ 능력을 얻게 된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p.75)

 

 

소설 속에서는 손자에 의해 한 번 걸러진 채로 이야기가 전달되기에 희진의 내면적 변화가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빛과 색이라는 언어를 배운 희진은 단순히 무리인들의 색체 언어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의 인식 체계에 큰 변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이는 다양한 광원과 프리즘, 거울로 가득찬 희진의 방을 통해 미뤄볼 수 있다. 희진은 매번 다른 분포로 퍼져있는 흰 구름과 푸른 하늘, 다양한 농도를 지닌 노을 풍경, 계절에 따라 일렁이는 들꽃 한 무리의 색을 통해서도 어떠한 ‘텍스트’를 읽어냈을 것이다.

  

 

 

2. 언어의 불완전성


 

언어의 불완전성 개념은 기의는 기표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언어의 비극과 관련 있다. 서론에서 타인에게 충분히 가닿고자 하는 욕구가 매번 좌절됨에 대해 설명했는데, 소쉬르가 제시한 세 가지 언어의 특징 중 불완전성과 가장 관련이 있는 진술이다.

 

희진은 루이에게 ‘잘 자.’ 등의 간단한 인사말을 내뱉는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이제는 그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고 스스로 곱씹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히려 언어의 불완전성을 온전히 수용할 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기의가 미끄러지다 못해 기표에 담는 순간 곤두박질 쳐버리는 외계 행성에서 언어를 고르는 것에 대한 엄중한 부담을 덜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무엇이든지 끝없이, 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루이가 특정 반응을 보일 때도 희진은 그가 루이의 뜻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긴 했지만, 이는 어떤 생산적인 교류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잘 자라는 한 마디에 담긴 상대가 기분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는 마음, 혹은 꿈 없이 깊이 잘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하루의 피로를 잘 녹여내길 기원하는 복잡한 마음들이 모두 전달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에게도 온전히 닿기는 힘들다. 우리는 언어와 기호를 통한 소통에 끝없이 실패하고 만다.

 

 

희진은 지구의 도구들 없이 행성 자체를 감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에 천천히 익숙해졌다. (중략) 원래 희진의 세계는 현미경 속에, 정량화된 데이터 속에, 그래프와 숫자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행성은 오직 희진을 둘러싼 풍경으로만 존재했고 희진은 그 사실을 수용해야만 했다. (p.83)

 

 

여기서 희진이 학자로 설정된 이유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위의 인용구를 통해 알 수 있듯, 희진은 숫자를 비롯한 정량화된 언어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직책에 있었다. 사실과 진실을 담는(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학자적 언어에 둘러싸여있던 희진에게 언어의 불완전성을 경험할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외계 행성에서의 조난은 희진은 언어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담지 못하는 밑 빠진 독임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희진은 이제 무리인들의 존재뿐만 아니라 행성의 모든 풍경을 그저 감각으로만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된다. 즉, 언어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연습이다. 언어를 벗어나면, 즉 언어의 절대성을 벗어나면 언어의 불완전성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 언어의 비극과 관련해 메타적으로 해석해볼 여지도 있다. 이 소설은 희진이 일방적으로 무리인과 루이를 경험하고 느낀 바를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희진의 그러한 묘사 자체도 언어의 불완전성 위에 위태롭게 조직된 결과이다. 그런데 이미 한 번 희진의 언어에 의해 희미해진 묘사가 손자의 입을 통해 또 다시 걸러 전달된다. 결국 독자가 최종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은 언어에 의해 흐려지고 또 흐려진 루이와 외계 행성의 모습인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을 수용하는 독자도 애초에 언어의 불완전성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언어의 자의성


 

언어의 자의적 특징은 그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본질에 더 가까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루이가 그리는 색채 언어가 희진이 루이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지구의 언어보다 더 우수하거나 열등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언어 사이의 권력 관계가 흔히 발견된다. 인권 신장의 역사는 항시 언어 권력을 찾으려는 과정으로 이어졌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희진은 네 번째 루이에게 색채 언어를 배워보려고 시도했다.

그들이 색을 인지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알고 싶었다.

루이가 서로 다른 광원 아래에서 다르게 보이는 색들을 어떻게 같은 색으로 인지하는지, 의미 단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색상 자체인지 혹은 인접한 색과의 차이인지.

그들의 ‘그림’의 형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지

아니면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p.88~89)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희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은 이전 개체가 남긴 기록을 읽고 습득하여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받아들인다. (p.88~89)

 

 

언어 권력의 관점에서 루이와 희진의 관계를 분석해보려 한다. 외계 행성은 희진이 기존에 습득했던 언어 체계가 그 어떤 권력도 가지지 못하는 공간이다. 희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색채 언어로 인해 일방적으로 묘사되는 ‘객체’이다. 실제로 이에 무력감을 느꼈다는 묘사도 등장한다. 한 마디로 언어 권력에 의한 압박을 실감한 것이다.

   

 

희진은 힉자였다. 알아내고 분석하는 것이 본래의 업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도구도 없는 이곳에서 희진은 너무나 무력했다. (p.74)

 

 

사실 외계행성까지 나갈 것도 없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영어권 화자로서 자신의 언어적 권리를 당연히 주장하는 이들도 많고, 한국인이라면 외국인 앞에서 소통의 장벽을 느끼며 자신의 부족한 영어 실력에 주눅들고 위축된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물론 소통에 필수적이지만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무리인들의 언어 인식은 조금 다른 듯 싶다. 지구인의 시선으로 보면 루이는 충분히 언어 권력을 지녔음에도 이를 행사하지 않는다. 행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인식하지도 않는 듯 보이기에 오히려 권력 관계는 점차 흐려진다.


 
두 번째 루이는 희진이 어떤 열매와 가죽을 더 선호하는지를 파악했고 희진의 손짓을 예전의 루이보다 더 잘 이해했다. 무리인의 팔은 인간과 다르게 움직여서 신체언어가 일치하지는 못했지만, 희진과 루이는 몇 가지 동작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해, 고마워, 안녕. 이제 그런 말들을 나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몸을 뉘였을 때 문득 울고 싶어졌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p.81~82)
 

   

언어의 자의성은 둘만의 자의적인 소통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루이와 희진의 시도를 가능케 했다. 그것이 기존에 우리가 인식하는 언어의 틀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언어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사고를 확장해보자면, 미래 사회에 루이와 같은 ‘완전히 새로운 타자’가 등장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소통 방식’이 필요하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넘어 이제는 언어를 벗어난 소통 방식을 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설 「스펙트럼」이 지닌 SF적 특징은 기꺼이 이러한 파격적인 문제 의식을 발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즉 김초엽 작가는 색채 언어라는 독특한 소통 방식을 앞세워 ‘외계성을 지닌 완전히 새로운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희진이 끝내 우리의 언어체계로 그들의 색채 언어를 해석해냈을 때 느끼는 감동은 그렇기에 배가 된다. 그 내용은 지구 언어로 해석하자면 ‘그는 아주 아름다운 생물이다’ 정도였다. 어쨌든 또 다시 언어의 절대성에 의해 언어를 통해 느낄 수밖에 없는 감동이지만, 타자와의 미세한 소통의 끈을 연결해주는 것 역시 언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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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이라는 제목은 소설 속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제목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인데, 손자는 할머니 희진이 장식장에 잔뜩 모아둔 유리 수집품에 대해 언급한다.

 

 

빛을 모으고, 분리하고, 보통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게 하는 도구. 할머니가 행성에 머물며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들은 아마 그런 도구들이었을 것이다. (p.81~82)

 

 

스펙트럼과 무지개는 오늘날 우리에게 흔히 다양성의 이미지를 지닌다. 그렇기에 스펙트럼과 그 속의 색채는 무리인의 언어를 익히려는 희진의 시도 그 자체인 동시에 다름을 기꺼이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인간의 학자적 가능성을 상징하는 듯 싶다.

 

끝으로 다양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소쉬르의 기호학이 지니는 함의를 소설 「스펙트럼」과 관련해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새로운 타자와 타자성 앞에서 언어가 무력화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설 속 루이와 희진의 관계처럼 많은 한계를 한계로써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의 비극을 받아들이고, 의도하는 바가 완전히 닿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타자와 나 사이의 교환은 완전히 평등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작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의 완전히 새로운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 <2편: 돌봄> 에서 계속됩니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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