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경이롭기에 기대기만 해선 안 되는 자연에 대해 – 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

인간의 시간을 따르는 방법은
글 입력 2022.07.2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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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글에서 자연을 언급하고 있고 그에 관한 문화 초대에도 관심이 많다. 내 행위와는 별개로 자연에 대한 애정을 보유하고 있기도, 혹은 그렇게 자연을 외쳐야지만 겨우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자연’과 함께 ‘기후 위기’가 흔한 키워드가 됐을 만큼 현재 인간이 직면한 위기는 꽤 심각하다.


기후 위기 해결과 함께 주로 제시되는 이미지는 파괴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이다. 당연히 필요하고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이토록 뚜렷한 증거를 목격했는데도 변하지 않을 것이냐고 따질 수 있는 명확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에만 호소하기엔 이미 인간은 상당량의 삶의 원동력을 자연을 소모하고 착취하는 행위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인의 행위와 자연과의 직관적인 관계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며, 오히려 그 결과에 대해 거부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외면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향한 또 다른 공략은 자연을 사랑할 만한 대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랑은 책임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 안에서 느낀 또렷한 회복과 안정과 즐거움의 감각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마음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상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인간이란 종은 충격요법과 같이 병행되는 ‘당근 정책’이 꼭 필요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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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는 이런 ‘당근 정책’의 기조 아래 쓰인 책이라고 느꼈다. 자연이 주는 미지의 힘을 온몸으로 명확하게 겪은 이들의 이야기가 스무 편 가까이 담겨있다. 같은 자연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머물고, 교류하고, 영향을 받는 존재와 공간은 중복되지 않는다. 수많은 자연의 갈래를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이 항상 자연 속에서만 살아가는 건 아닐 것이다. 자연과 그 바깥의(사실 그 바깥도 자연 안에 포함되지만) 스펙트럼 사이에서도 생존하고 만족을 느끼는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자연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 그 이유를 글의 기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간절한 부탁의 태도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무엇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고유한 힘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긴 교류의 시간을 거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정말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 또한 말이다. 그들은 변화를 위해선 기꺼이 무릎을 굽힐 수 있는 자연의 친구이자 불안한 미래를 예지하는 예언자들이다. 이 글도 누군가를 타박하고 따지기 위함만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결국 본질적으로 반反 자연적이기에, 역시 파렴치한 한 인간의 간절한 부탁 정도라고 생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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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철 카슨은 ‘자연은 인간이 만들지 않은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 이야기에 동의했고 그렇기에 덜컥 겁이 났다. 그 말대로라면 현재 ‘자연’은 얼마나 남아있는 걸까? 인간의 포악함은 육해공을 넘나들어 거치지 않은 곳이 없고, 수많은 종을 멸종시키며 자연을 장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을 지키는 것에만 그쳐도 되는 걸까? 자연의 정의와 범위를 넓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방법은 결국 인간의 범위를 줄이는 것이 돼야 할 것이다.


당장 인간의 범위를 줄인다는 것이 급진적인 주장이라고는 생각한다. 결국 인간은 지배종이고 그 안에 얽혀 있는 뚜렷한 실체와 관계들을 갑자기 끊어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인간의 권리와 공간을 축소해나가야 한다는 것엔 의심이 없다. 그 기초적인 마음을 원시인들을 언급한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원시인들은 자연의 위력 앞에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두려움으로 반응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경외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 어쩌면 인간은 그 특유의 호기심과 용기로 지나칠 정도로 자연에 대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와 심해, 미지 세계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많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알아도 될까? 이것이 밀랍으로 결합한 날개를 완강하다고 생각하고 태양으로 날아가다 추락한 이카로스의 모습은 아닐까?


애정은 ‘다 아는 것’이 아닌 ‘적당히 모를 때’ 건전하고 길게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감히 어떤 존재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 깊은 애정과 함께 그 영역을 침범할 수 있는 ‘반反 애정’의 가능성도 같이 열린다. 인간은 적정한 거리의 선을 충분히 넘어버린 것 같다. 이젠 인간이 다시 그 존중의 거리를 맞추기 위해 겸허히 후퇴할 때이다. 애초에 자연은 본래의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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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창조물들은 내가 성공적으로 나아가든 장애물을 만나 휘청거리든 무심한 태도로 나를 존중해준다.’  ‘자연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 자연은 항상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말이다. 그 경이로운 중립은 자체로 위로가 된다. 내가 어떠한 존재이든, 무엇을 놓고 가든 자연은 묵묵히 그것을 품고 치유한다. 그 무심한 회복력을 느껴본 이들은 자연의 힘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이들이 경험해보기를 바라는 힘이기도 하다.


다만 그 경이로움을 맹신하고 기대고만 있기엔 인간이 두고 떠난 책임이 너무 크다. 무한한 포용의 존재가 수용하지 못하고 뿜어내는 현재의 재앙은 그의 악의가 아니다. 중립자로서 작용에 대해 반작용을 할 뿐이다. 그것을 깨닫고 멈추어야 할 존재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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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얼마나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는지 놀라울 때도 있다. 오크나무 한 그루는 1,000종이 넘는 나방과 나비들을 먹인다. 그 아래에는 벌, 풍뎅이, 거미 등 무수한 종과 개체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곤충들은 다시 수십 종의 새들에게 이어진다. 오크나무 하나가 평생 떨어트리는 300만 개의 도토리는 곰, 사슴, 다람쥐, 수십 종의 새의 직접적인 먹이가 된다. 오크나무는 그 자체로 엄청난 면적의 탄소를 수백 년 동안 포집한다. 오크나무는 폭우의 피해를 줄이며 수많은 종의 꽃가루 매개체가 된다.

 

이것이 단 하나의 나무 종에 얽혀 있는 관계도다. 여기 적히지 않은 관계도가 파생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연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범위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한 개체의 시간에 침투하는 것은 곧 모든 것들의 시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된다. 억울해도, 그것이 우리가 갖는 행위의 영향이고 결과다.

 

 

‘다른 동물들과 환경을 일상적으로 남용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존중의 결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예시다.’ ‘육식 대신 채식을 하게 되면 땅과 자원을 적게 들여서 더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건강과 인간성까지 증진시킬 수 있다.’

 

 

회복의 힘, 연쇄적인 관계와 더불어 자연과 환경을 얘기하는 데 채식이 꼭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식은 개인이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 중 강력한 효과를 지녔다. 자연 속 동등한 존재인 동물에 대한 기초적인 존중을 함양할 수 있는 점에서 그렇다. 땅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같은 양을 생산하는 것을 기준으로 육식을 위해 쓰여야 하는 땅은 채식에 비해 무척 광활하다. 식량 위기를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지금, 육식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 큰 실제적 위기를 겪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일시에 채식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채식을 원할 때 무리없이 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져야 할 의무가 있다. 채식은 개인의 기호인 동시에 뚜렷한 악영향을 미치는 권력에 대항하는 사회적인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그런 공적인 노력이 굉장히 부족하므로, 그에 얽힌 권력관계와 부채감을 직시하고 폭넓은 채식 문화를 만드는데 힘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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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들은 긴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을 산다.’

 

‘세상의 어느 곳이든 수천 개의, 아니 어쩌면 수백만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우리는 자연이 단일한 시공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 문장은 그러한 태도의 안일함을 깨닫게 한다. 수많은 시간의 흐름 속 한 가닥을 공유하고 있는 종으로서, 그 속에서 또 다른 가닥을 가진 한 개체로서, 우리는 다른 존재의 시간을 침범하지 않을 강력한 의무가 있다.

 

이토록 자연은 경이롭다. 그럴수록 자연에 대해 경이롭다는 말을 사용하는 걸 지양해야 한다. 그 경이로움에만 의존하지 말고, 우리의 한계를 주체적으로 명확히 그어야 한다. 그렇게 포기하는 것이 마냥 불행하고 불편하고 재미없기만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느끼는 편안함이 과연 마땅히 누려야 할 편안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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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간이 가진 기술만으로도 생존에 무리가 없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 기술 덕분에 무난히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그렇기에 무작정 비판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 기술이 무한한 신봉의 대상 또한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현대의 기술은 불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그 기술의 혜택이 스며들지 못하는 소수자의 영역이 넓다. 더 큰 발전만을 좇는 맹목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자연과의 상생이자 같은 인간 동료와의 상생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가 가진 능력은 훌륭하다. 지금은 멈춰서서 그 능력을 자연과 모든 인간에게 빈틈없이 스며들게 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시기다. 그렇게 '모두'를 존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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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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