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에겐 임시 서재가 필요하다 [공간]

당신은 어떤 공간에서 책을 읽나요
글 입력 2022.08.20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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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할 때 그것에 적합한 공간을 찾아가는 일은 당연하면서도 중요하다. 공부를 위해 독서실을 찾아가고 등산을 위해 지도를 켜고 주변의 산을 물색하며 대화를 위해 카페를 찾아가고 금융업무를 위해 은행에 방문한다.


물론 공간에 큰 제약을 받지 않는 행위들이 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공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은 재미를 선사한다. 뜨개질이나, 기도나, 대화나, 공부가 그렇다. 공간을 선택한다는 건 결국 환경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손에 주어진 결정권 때문에 공간 선택의 중요성은 쉽게 간과된다.


나 역시도 독서라는 취미를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발품을 팔지 않았고, 역병과 일을 핑계로 방에만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공간보다는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공간으로만, 카페는 커피를 사는 공간으로만 기능했다. 집은 수많은 훼방으로 가득했고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눈알을 다른 데로 굴리는 속도에 훨씬 못 미쳤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마무리하던 올해 초여름, 오래간만에 만나 처음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 친구와 울산 도서관을 방문했던 날, 정말 간만에 '자발적으로 환경을 선택하는 일'에 주목했다.

 

잠깐 앉아있던 그 공간에서 지난 일주일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크게 들떴다. 공간을 둘러보며 책 읽기에 좋은 공간이 가진 특징을 관찰했다.


첫째, 층고가 높아 조명과 책의 거리가 멀다. 조명이 책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책에 지는 내 그림자가 옅고, 책에 균일한 빛이 들어온다. 가깝고 큰 조명 때문에 프린트된 글씨가 안 보이는 경우가 없다. 책에 들어온 내 그림자 때문에 종종 독서시간이 방해받는 경험을 되짚어보면 책과 조명의 거리는 중요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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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지지 않은 지면

 


둘째, 적당한 쿠션감과 등받이를 갖춘 의자, 소파 테이블이 구비되어 있다. 소파에서 책을 읽으면 내용에 몰입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소파는 앉는 것보다 누울 때 더 편한 가구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꼭 알맞은 자세를 취하기까지 독서는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나를 푹 빨아당기는 쿠션감에 책을 놓게 된다. 소파 테이블은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최근 그 소파 테이블의 오묘한 매력을 깨달았다.

 

책상보다는 선반의 기능을 하는 소파 테이블에 읽을 책을 한가득 쌓아두고 작은 메모장과 볼펜을 하나 곁들여 올려놓으면 좋다. 사이즈가 작고 흔들거리는 탓에 노트를 꺼내 긴 글을 쓰거나 노트북을 꺼내들고 일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독서에 알맞은 가구가 된다.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셋째, 콘센트가 없고 취식이 불가능하다. 독서 환경을 갖추는 데에는 좋다는 걸 사들이는 것보다 방해가 되는 것을 소거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구체적으로는, 집중력 향상에 좋다는 백색 소음기 유튜브를 틀기 보다는 내 주의력을 쉽게 빼앗아 가는 것을 치우는 게 좋다는 거다.

 

나에게는 대표적으로 스마트폰이 있다. 잠금 해제 한 번에 펼쳐지는 놀랍고도 자극적인 세상을 잠시 아껴두기 위해 휴대폰 충전이 불가능한 곳에서(혹은 특정 장소에 맡겨둬야 충전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책장은 더 빨리 넘어간다.

 

사실 음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음식에 대해서는 완강한 편이다. 손에 묻은 음식으로 책이 오염되거나 음식이 튀어 책이 더러워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책의 내용은 뒷전이 된다.


넷째, 침입은 잦지만 훼방은 거의 없다. 백색 소음과 같은 결로, 백색 움직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종종 있지만 그들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건다거나 나에게 물리적 접촉을 시도할 일이 거의 없는 경우,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 집중하거나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책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눈만 돌리면 읽을거리가 즐비하다. 그것이 책일 필요는 없다. 내가 언젠간 적어둔 메모, 광고 포스터, 안내문, 책표지의 추천사나 제목 등, 읽을거리가 많은 공간에서는 '읽는' 행위에 대한 진입장벽이 파격적으로 낮아진다. 읽는 행위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의식적인 읽기'가 '의식적인 읽기'로 전환되는 가벼운 과정만 거치면 곧장 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있다가 책을 읽으러 가는 것보다 훨씬 심리적 부담이 덜하다.


조합해 보면, 우리에겐 서재가 필요하다. 서재라고 해서 꼭 집 안에 방 한 켠을 내어 꾸린 공간일 필요는 없다. 책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어디든 임시 서재가 된다. 책을 한가득 짊어지고 떠난 곳이면 처음 가 본 카페도 도서관 구석의 좌석도 곧바로 내 서재가 된다.

 

공간에 대한 선택이 공간의 자유로 연결되는 묘한 순간이다.

 

 

[오영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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