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랭보] 나는 투시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글 입력 2023.02.1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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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갈망하며 방랑한 무모한 소년, 랭보


 

나는 투시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세상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존재

 

 

[포맷변환][크기변환]랭보1.jpg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는 부분 없이 전체적으로 너무 유려하게 이어져서 의식적인 생각은 빼놓은 채 극의 흐름에 이끌려간 극이다.


극은 들라에가 베를렌느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베를렌느에게 랭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시를 찾으러 함께 아프리카로 가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이다. 베를렌느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결국 들라에와 함께 떠난다. 이 시점을 액자의 틀로 둔 채, 랭보와 들라에 그리고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야기가 액자 내부에서 전개된다. 그리고 들라에와 베를렌느가 함께 있는 장면을 매개로 극은 액자의 안과 밖을 드나든다.


시를 쓰는 랭보와 채소를 기르는 (그림도 그리는) 들라에는 서로를 지지하는 친구다. 서로에게 두는 관계의 무게가 대칭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분명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같지만, 들라에는 랭보를 높게 평가하고 동경했다. 언뜻 보기에는 들라에가 랭보의 조력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심으로 랭보의 작품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랭보를 헌신적으로 돕지만 랭보의 의도까지 명료하게 읽어내지 못하는 본인의 한계를 깨달아서 그랬을까. 들라에가 가져온 베를렌느의 시집을 본 랭보는 그에게 자신의 시를 보내고, 만나자는 베를렌느의 답장을 받고 그를 만나러 파리로 훌쩍 떠난다.

 

 

M04. 높은 탑의 노래, 감각 (랭보作): 랭보, 베를렌느

 

내 마음 사로잡을 시간이여

여름날 푸른 저녁 나는 너에게로 가겠네


아주 멀리멀리 자연같은 너의 곁으로

서늘한 풀잎이 꿈꾸는 나를 찌르면

상쾌한 바람이 내 머릴 씻어주겠지


나 이제 그 어떤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리

무한히 샘솟는 사랑을 내 몸과 마음 가득 채우리


시간이여 어서 나에게로 오라

내 마음 사로잡을 사람이여


그대여 어서 나에게로 오라

내 마음 구원해줄 동반자여

그대여 어서 나에게로 오라

내 마음 구원해줄 동반자여


나에게로 오라

나에게로 오라

 

 

문단에서 찬사를 받는 베를렌느지만, 그는 스스로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비춰질 정도다. 예절과 법도가 있는 문학계와 안정적인 가정 속에 머무르던 베를렌느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랭보라는 자극에 매료된다. 그리고 둘은 문학적 끌림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권태로운 파리를 함께 떠나버린다.


둘의 관계는 사랑이 분명했(던 것 같)다.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해변에서 글을 쓴 뒤 모래에 입 맞추는 장면이나, ‘하얀 달’ 넘버에서 랭보가 베를렌느에게 그의 시를 훌륭하다 평하며 “들려줘요, 당신의 목소리로”하는 대사나, 바닥에 누워 잠든 랭보에게 베를렌느가 코트를 덮어주자 잠결에 코트 냄새를 맡으며 씩 웃는 연기 모두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제법 많이 폭력적이고 삐뚤어진 사랑이라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그런 사랑. 애초에 가정이 있고 평판을 놓지 못하는 인물인 베를렌느가 현실은 신경쓰지도 않는 무모한 랭보와 안정적으로 함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술적이고 아름답게 포장된 예술가들의 비틀린 욕구일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완벽한 글을 쓰고 싶은 욕구, 자유롭고 싶은 욕구. 그러나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봤다. 자신을 아껴주던 들라에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랭보가 베를렌느의 해석에서는 이해받았으니까, 그리고 랭보도 베를렌느의 글을 이해했으니까. 그래서 랭보가 베를렌느에게 뱉은 “날 이해해?!”라는 말이 더욱 사무치게 다가온다.

 

 

M07. 하얀 달 (베를렌느作): 랭보, 베를렌느

 

베를렌느 / 사랑스런 사람이여

지금은 꿈을 꿔야 할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


랭보 / 아 사랑스런 사람이여


베를렌느 / 아 꿈을 꿔야 할 시간


랭보&베를렌느 /

별들이 달빛에 젖어

드넓고 따뜻한 고요가 창공을 뒤덮는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



랭보와 베를렌느 두 중심인물이 모두 표면상 난해하고 쉽게 감정이입하기 어려운 캐릭터라 그런지, 초반에는 ‘천재들은 저렇구나’하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랭보와 베를렌느의 서사가 풀리자 그들은 너무도 '인간'이었다. 특히 랭보는 본인의 천재성을 자신하며 자신이 인정할 수 있을 만한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진 어린아이였다. 철없고 순수해서 무모한 천재로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 그래서 현실적인 조건과 그 속에서 통용되는 도덕을 모두 깨버린 채 예술만 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 베를렌느를 끌어들이면서 함께 풍요로워보이는 폐허로 걸어들어간다.

 

들라에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아마 나머지 두 인물에 비해 그나마 우리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라 들라에에 이입해서 본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들라에는 입체적인 캐릭터라 더욱 매력적이었다. 초반에는 순수한 시골 청년, 랭보를 지지해주는 좋은 조력자 정도로 보이지만 랭보의 시를 찾으러 갈 때의 강단은 그 이유가 드러나자 더욱 빛난다. 들라에는 단순히 랭보의 자취를 찾기 위해 떠난 게 아니라, 랭보의 자취를 통해 자신도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동안 들라에가 랭보를 응원하고 지지해온 게 오직 랭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본인의 길을 찾고자 했던 거라는 게 뭉클했다. 조력자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캐릭터. 그리고 항상 랭보 곁에서 랭보를 지지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온전히 (베를렌느만큼) 이해하지는 못하는 인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관계의 한계에 부닥치는 인물이라는 점도 현실적이다.

 

랭보와 베를렌느, 들라에. 이 세 인물은 각자만의 방랑하는 삶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특별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특별함'이란 무엇일까? 지켜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가? 랭보의 시는 정말 악마였을까?

 

주인공들이 방랑을 통해 내면의 바닥까지 닿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이 극은 큰 울림을 준다.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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