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실을 다루는 이들의 무게 [영화]

글 입력 2023.06.29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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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트라이트'(2016)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트라이트: '우리'의 이야기


 

무언가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일. 그 매개는 글이든, 말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될 수 있겠지만 예전부터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글을 주로 택해왔다. 하지만 백지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은 여전하다. 내가 가진 뭉툭함과 언어적 한계를 넘어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온전히 담아내기 위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예외 없이 험난하다. 하지만 그런 막막함 앞에서도 펜을 드는 이유는 항상 같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모양새는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결국 글을 쓰는 이들 모두는 각자의 '해야 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함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닿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건 내가, 나아가 우리가 해야 하는 이야기이자 우리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 '우리'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흔히 언론은 사실을 다룬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실을 정말로 공공연한 사실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이 될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이다. 이 고민을 얼마나 게을리 혹은 성실히 했는가에 따라 진실은 그저 묻혀버릴 무언가가 되기도, 우리에게 와닿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이 고민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어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다.

 

 

스포트라이트[포맷변환].jpg

 

 

보스턴의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 그 안에는 사회의 각종 부정과 비리를 파헤치는 스포트라이트 팀이 있다. 부분에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조명처럼, 그들은 집요하고 세밀한 취재를 통해 세상의 어두운 곳곳에 빛을 들이민다. 그 빛은 누군가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는 횃불이기도,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말해주는 온기이기도 하다.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 강렬한 빛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신성의 영역. 종교의 빛 아래 추악한 그림자를 드리우던 보스턴 교구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한 스포트라이트 팀이 맞닥뜨리게 된 것은, 그저 신부 개개인의 일탈이 아닌 교회의 조직적인 은폐와 침묵. 수십 년째 온 도시가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방관하고 있었다.

 

보스턴 사람들의 정신적 지지대이자 연결망이 되어주던 교회를 파헤치는 건 곧 지역 사회, 어쩌면 그들이 몸담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한 고발이었다. 도시의 혼란을 막는다는 합리화로, 보안 유지에 대한 직업윤리를 방패로, 진실을 덮어두던 사람들은 그런 고발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침묵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꺼지지 않았다. 병가 처리된 신부들의 리스트를 역추적하는 등 작은 단서들을 지나치지 않고 차근차근 진상을 파헤쳐나가는 과정은 꼭 하나의 추리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끈질긴 취재와 설득 끝에, 성추행에 가담한 신부들 70명을 모두 알아낸 팀원들은 결국 밝아오는 신년의 해와 함께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이토록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침묵과 방관을 깨트릴 수 있도록 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서두에서의 제안과 마찬가지로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던 것에서 나온다. 그 고민이 스포트라이트 팀의 취재에서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가장 인상 깊었던 포인트들을 몇 가지 추려보았다.

 

 

 

숨겨진 진실을 이끌어내다


 

눈에 띄는 취재의 특징은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장면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먼저 양질의 인터뷰에는 인터뷰이와의 라포 형성이 필수적이다. 일단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고, 피해를 재진술하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에게는 상당한 심적 부담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이 진술이 단순히 상처를 헤집는 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진정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과정이 될 것이라는 무언의 암시를 전달해야 한다.

 

일례로 마이크의 취재 장면을 살펴보자. 괴짜에는 괴짜를 붙여야 한다며 로비는 성추행 사건의 변호를 맡아왔던 개러비디언에게 마이크를 보낸다. 매사에 스스럼이 없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마이크는 결국 개러비디언의 협조를 얻는데 성공하고, 피해자와 직접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인터뷰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소한 스몰톡을 통해 분위기를 풀어주며 부담없이 증언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기록에 대한 상대의 동의를 구하고 익명 처리에 대한 의견을 묻는 마이크의 모습에서는 필수적인 보도 윤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루고 있는 사건이 아동 성범죄와 관련된 만큼, 피해자들의 신상과 관련해서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은 2차 피해가 남발하는 근래의 자극적인 보도에 경종을 울린다.

 

어떤 가치 판단이나 사견을 덧붙이지 않고 사실에 집중하는 태도도 눈에 띈다. 설령 그것이 선의에 기반한 것일지라도 자신의 말과 반응이 당사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취재진이 판단할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이크 뿐만 아니라 사샤를 포함한 모든 팀원들은 인터뷰 중에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내용을 들었을 때, 섣부른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해나간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힘겨운 증언이 최대한 진실을 적확히 담아낼 수 있도록, 독려하고 기다리는 모습은 모범적인 취재 요령을 보여주고 있다.

 

 

[크기변환] 스포트라이트2[포맷변환].jpg

 

 

기자이기 이전에 보스턴의 한 주민으로서, 팀원들이 이 사건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는 업무 공간을 벗어났을 때나 되어서야 엿볼 수 있다. 추행을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신부가 근처에 살고 있는 것을 알자 경악하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메세지를 남기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팀원들. 영화 후반부에서는 그동안 예배에 참석하지도 못했을 만큼 크게 교회에 실망하고, 나아가 내면의 믿음을 박탈당해 버렸다며 토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 역시 끔찍한 사건에 마음 깊이 분노하고 있었다. 마이크는 점점 드러나는 진상에 흥분하며, 이를 당장 보도해야 한다고 강하게 호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개별 사실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그것을 소모적인 논쟁으로, 가십거리로 격하시키지 않고 모든 사실이 가리키고 있는 일련의 시스템을 끈질기게 추적해낸 것이 바로 성공적인 보도를 판가름짓는 순간이었다. 상사들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교회의 조직적인 은폐를 뿌리부터 파헤칠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마이크를 만류한다. 범행이 의심되는 70명의 신부들에 대해 모든 사실 확인을 끝내 반박의 여지를 없애고, 911 테러에 집중되었던 화제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들은 보도가 최대한 효과적일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피해자들이 힘겹게 다시 떠올린 기억들이 헛되지 않도록, 보도의 파급력이 최대화된 적기에 기사를 낸 것은 정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뤄야하는지에 대한 모범적인 예가 된다. 5년 전에 사건과 관련된 제보를 덮어두고 흘려보내듯 보도한 때와 달리, 제보 전화가 빗발치는 광경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똑같은 사건과 사실들을 두고서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실의 밀접함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상, '완전히' 나와 무관한 일들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그것이 영화 속 사건처럼 지역 사회 차원을 넘어 세계 곳곳에 뿌리내린 은폐와 비리, 범죄와 관련되었다면 더욱이 그러하다(이 영화는 완벽히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로비가 진실을 덮으려는 모교 관계자들에게 로비 자신도, 관계자들도 누구든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음을 지적하는 장면은 진실이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점, 이 진실 뒤에 고통받은 사람들은 실재하며 그다지 멀리있지 않다는 점, 결과적으로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내가 당장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불편한 사실이 어떻게 나에게,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올 수 있는가를 알고나면 모든 것을 회피하기는 쉽지 않다. 양심에 대한 호소만으로도 해결될 일이라면 좋았겠지만, 역지사지라는 오래된 진리가 지금까지 현존하는 것은 마냥 남의 일이 아니라는 섬짓한 가정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전혀 무관해보이는 일들과 나 사이의 끈이 얼마나 가늘든,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중요한 기능이 아닐까.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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