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가 - 여전히 미쳐 있는 [도서]

글 입력 2023.08.08 13:3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miguel-bruna-TzVN0xQhWaQ-unsplash.jpg


 

여성들은 광기를 에너지 삼아 살아간다.

이 책은 유리 천장을 박살 내고 그 파편을 손에 쥔 채

피 흘리는 여성들 간의 연대와 협상의 이야기다.

더불어 여성주의가 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인문학의 기본인가를 증명한다.

 

- 여성학 박사 정희진

 

 

『여전히 미쳐 있는』은 페미니즘 비평의 시대를 연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전작인 『다락방의 미친 여자』와 마찬가지로 1950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들의 삶과 글을 탐구한다.

 

길버트와 구바는 사실 사회운동에서 예술이나 인문학 분야가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적은 매우 드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페미니즘 운동은 누군가의 글, 음악, 사진이 무척이나 큰 힘을 가진다. 이에 평생 페미니즘과 여성의 글쓰기에 천착해 온 두 저자는 페미니즘의 태동기인 195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의 변화 과정을 10년씩 나누어 다룬다.

 

 

 

깨어난 1970년대


 

 

가끔 대법관 중 여성이 몇 명이어야 충분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홉 명이 있을 때겠죠."

그러면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남성 아홉 명이

그 자리에 있었을 때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지요.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조지타운대학교 강연(2015)

 

 

1970년, 상원에는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하원에는 겨우 열한 명(총원의 2.1%), 그리고 대법원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없었다.

 

 

손택이 「여성의 아름다움: 강력한 반발이냐, 힘의 원천이냐」에서 지적한 바에 의하면 “여성은 자신의 몸을 부분들로 나누어보라고, 그렇게 각 부분을 따로따로 떼어내 평가하라고 배운다. 가슴, 발, 엉덩이, 허리 라인, 목, 눈, 코, 안색, 머리 등 각 부분을 불안하게 조바심치고 자주 절망에 빠진 채 꼼꼼히 응시하라고.” 여기서 그녀의 시각은 여성이 거의 피카소적인 분할을 받아들이도록 배운다는 사실, 각각의 아름다움에 순위를 매기는 장식에 따라서 신체의 각 부분이 자리를 바꾸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214-215pp.)

 

 

실제로 수많은 여성은 자기 몸이 하나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쉽게 잊곤 한다. 눈은 이래서, 코는 또 저래서, 내 다리는 저 연예인과 다르게 생겨서, 내 손톱은 이 친구와 다르게 생겨서. 수많은 이유로 타인과 내 몸을 비교하며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를 평가하고, 부정한다. 게다가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신체를 보는 다른 이들 또한 여성의 몸을 조각조각 내어 응시한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겠지만 그때 우리 여성들은 디스토피아에 (그리스어에서 나온 이 단어를 번역해서 다시 말한다면 “나쁜 장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갑작스럽게 깨달았던 것이라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예전에는 ‘정상적이고’ ‘규범적으로’ 보였던 모든 것이 기이하게 보였다. (251-252pp.)

 

이러한 배경 아래 1970년대 여성 SF 작가들의 작품은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작품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암울한 우화다. 가부장제 “세계라는 기계장치”의 틈새에서 주머니쥐처럼 살아가는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디스토피아 같은 이 인간의 행성보다 더 낫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276p.)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외계인을 마주한 두 여성이 자발적으로 지구를 떠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앞서 인용한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 벼락처럼 한순간에 나를 둘러싼 세계가 뒤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시대의 페미니즘 SF는 유토피아를 찾기 위한 노력보다는 디스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한 열망이 더욱 돋보인다. 이에 디스토피아를 떠나는 과정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팁트리 주니어가 그리는 세계는 어둡고 칙칙하다.

 

 

 

페미니즘을 다시 쓴 1980년대와 1990년대


 

한편 임신 중지권 반대, 성평등 헌법 수정안 지지 철회 등의 소식과 함께 1980년대가 시작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는 마치 1950년대로 돌아가려는 듯한 분위기 아래 "우리가 유리 천장을 깨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들과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한데 뒤섞인 시대였다.

 

그럼에도 1980년대는 여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여러 기관(대학, 군대 등), 여성학 관련 과목 개설 증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페미니즘이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 때이기도 하다.


 
여성이나 레즈비언이라는 범주 속에 여성이나 레즈비언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선입견이 늘 잠복해 있다. (⋯) 다시 말하자면 이런 정체성 범주들은 (예컨대 멕시코계 미국 여성이나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으로 범위를 줄여 말할 때조차) 매우 상이한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놓는다. (391p.)
 

 

뒤이은 1990년대에는 주디스 버틀러와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 등이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며 여성운동의 방향을 재설정한다. 언어는 불확실하며 다중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세지윅과 버틀러는 퀴어 연구라는 학문 분야를 이끌어낸다.

 

한편 대중문화계에서도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에 관한 규범적 범주에 균열을 내는 시도가 여럿 보인다. 이를테면 신디 셔먼은 영화 등 미디어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여성 인물들로 분장한 자기 모습을 촬영한다. 이러한 셀프 포트레이트 작업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이미지와 실제 개인들의 간극을 보여준다.

 

한편 마돈나는 수없는 염색, 성적 특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의상, 정교한 무대 장치 등으로 어느 한 가지 역할에 고정되길 거부하는 그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나 해러웨이는 일부는 살, 일부는 금속으로 되어 있는 사이보그를 상상한다. 이 사이보그는 경계를 넘나들며 자연과 문화의 구분까지도 폐기한다. 이처럼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정체성 정치가 아닌 유사성에 기반한 사이보그를 제안한다.

 

 

여전히미쳐있는_표1.jpg

 

 

『여전히 미쳐 있는』은 현대 여성 작가, 이론가, 활동가들을 아우르며 페미니즘을 폭넓게 다룬다. 길버트와 구바는 여성으로 살며 겪는 일들을 폭로하고 명명하는 저술, 그리고 각종 항의 시위와 운동 등의 중요성을 세심히 짚어낸다.

 

미국의 도서 리뷰 매체인 〈커커스 리뷰〉는 이 책을 두고 “수많은 이름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면 이 책을 집어 들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약 600페이지가량의 책에는 수많은 여성의 이름이 나온다. 여기에는 페미니즘과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들어봤을 법한 이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이도 등장한다.

 

때문에 페미니즘 문학의 입문서이자 완결서처럼 느껴졌다. 모르는 작가가 더 많았던 나에게는 흥미로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따로 찾아볼 수 있는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을 잘 아는 독자라면 그들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주변 상황과의 관계 등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가 되어줄 테다.

 

 

[유소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