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행복한 사람 하나가 여기 있다 [영화]

글 입력 2023.09.0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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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십대는 만나면 곧장 사랑과 연애 이야기를 하곤 하니까 작은 테이블을 놓고 친구들과 나도 그런 얘기를 자주한다. 술 한 모금에 이상형에 술 두 모금에 결혼 계획에 술 세모금에 아기에.. 생의 바둑판 위로 쓸데 없는 말을 얹는건 주로 즐겁고.. 그러다 심플하지만 확고한 계획을 가진 친구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그들의 계획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하나, (취업을 아직 하지 않았을 경우) 이성에게 인기를 얻을만한 멋진 직업을 위해 노력한다. 둘, 직업을 얻은 뒤에는 결혼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누구는 28살 누구는 35살에 꼭 결혼을 하겠다고 선포한다. 셋,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끝.

 

문제가 될 것 없는, 말 그대로 'good for you!'스러운 계획이건만 어딘가 뒤가 시큼해 킁킁거렸다. 그땐 그 시큼함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단지 '신기하다. 지금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라고 말했었던 것 같기도) 이다지도 확고한 결혼 계획이 있다는게…'로 말을 줄였다. 그 뒤에 어떤 친구가 말을 덧붙이면서 평화롭고 즐거웠던 술자리가 잠깐 과열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술자리들과 대화들은 윤냄도 없이 기억의 뒷자리에 방치되어 있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를 만나 풀려났다.

 

 


 

 

 

프랑수아의 행복


 

1. 영화 <행복>은 그림같은 가족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해바라기 뒤 두 아이의 손을 잡은 남자와 여자. 남자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아내 테레즈와 함께 두 자녀를 두고 있다. 가족은 주말이면 근교로 나가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테레즈는 꽃을 꺾어다 집으로 가져온다. 프랑수아가 일을 하고 오면 테레즈는 그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따사로운 행복은 유유히 계속될 것만 같다. 그러다 프랑수아는 우연히 만난 우체국 직원인 에밀리와 사랑에 빠지고 원래 테레즈와 함께 하던 행복한 삶에 에밀리까지 더해 그는 큰 행복감을 느낀다.

 

2. 언제나 그래왔듯 프랑수아와 테레즈는 근교로 피크닉을 떠난다. 프랑수아는 테레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러나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테레즈는 프랑수아의 '사랑한다'는 말에 으레 하듯 사랑한다고 화답하지만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둘은 사랑을 나누고 프랑수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낮잠을 자러 간다. 프랑수아가 잠에서 깼을 때 테레즈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프랑수아는 호수에 빠져있는 테레즈를 발견한다.

 

3. 시간은 흐른다. 에밀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에밀리는 전의 발칙한 이미지가 조금 누그러진듯 하다. 그녀는 두 아이들과 친해지려 하고 테레즈 같은 옷, 즉 '엄마 같은 옷'을 입는다. 영화는 또 다시 피크닉을 떠난 새롭지만, 그리 새롭지 않은 가족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프랑수아는 여전히 행복해 보인다.


프랑수아의 행복은 마치 커다란 액자와 같아서 '아름다운 가족', '아름다운 가족과 포근한 나날'이라는 프레임만 있다면 그 속에는 누가 들어와도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아내가 예쁘게 꾸며놓는 집, 그녀와의 잠자리, 귀엽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 안정적인 일상. 이 행복 이론에서 일상적이면서도 기괴한 점은 그 아내가 테레즈여도, 에밀리여도, 둘다이거나 혹은 그 이상이여도 상관없다는 점이다. 그의 행복은 쉬운 덧셈 같아서 1에서 1을 더하면 2만큼 행복해진다. 그래서 영화가 끝으로 갈수록 쉬운 덧셈만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프랑수아가 여느 사이코와 다를바 없어 보이게 된다. 그의 행복은 포근하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좀 더 나가보자면 프랑수아의 두 자녀들이 지금의 자녀들이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큰 상관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도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행복관의 뒤틀린 모습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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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가능성과 행복


 

많은 것이 대체가능해 우리는 행복하다 아마도.. 제로콜라가 없으면 제로사이다를 먹을 수 있어 행복하고 이 쇼핑몰이 별로면 저 쇼핑몰을 들여다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자본주의는 뭔가가 다른 뭔가를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로 사회를 꽉 채워놓았으니까. 이는 직업세계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99%정도는 다 대체가능한 인력이 아닐까?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세요' 외치는 목소리가 어딘가 언짢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것은 이 또한 누군가가 누군가를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포용한 뒤 '당신만은 달라져보세요'라고 말하는듯 느껴져 그렇다. 이렇듯 직업세계로 가면, 특히 쉽게 대체될 수 있는 피고용자라면, 대체가능성과 행복의 그래프는 점점 더 반비례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어쩔수는 없지. 모두가 다 대체불가능한 사람이라면 큰일이다. 몇사람이라도 죽어버리면 사회가 돌아가질 않을테니. 그래도 모든게,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을 손쉽게 대체해버린다는 사실에 마지노선을 긋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이다. 마지노선에는 사랑하는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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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런 저런 말을 모두가 잘한다. '나는 저런 스타일을 좋아해', '나는 쉽게 잘 질리는 스타일이라 글쎄..' 등.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감정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고 스스로가 일방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 되는 말들이다. 그런데 사랑 안에 어쩔 수 없는 '어쩔 수 없음'과 '쩔쩔맴'이 있다. 우리는 보통 사랑에 '빠진다' 'fall in love'라고 표현하지 사랑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표현하지 않으니까.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에서 파란 물에 빠진 주인공은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감각은 능동보다 수동의 형태다.

 

영화 <행복>에서 프랑수아가 능동적으로 사랑한 것은 명료해 보인다. 테레즈도 아니요, 에밀리도 아니요, 두 아이도 아니요, 더하기의 세계관 속에 있는 자신의 테트리스 같은 행복감. 그는 여러 부인과 여자를 만날 수 있겠으나 자신 혼자만의 세계에 살고 있음과 다름 없다.


 

 

제도와 사람


 

요즘이야 결혼이 하나의 선택으로 자리잡고 있기야 하지만, 여전히 특정 나이대에 이르러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확고한 '신념'이나 '선언'이 필요한 것처럼 이야기되니 이 자체가 아직까지 '결혼'이라는 것이 기본값임을 반증하고 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제도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프랑수아와 같이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시간적 순서에 제도라는 인위적 요소가 개입해있어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만큼, 결혼을 해야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사랑의 목적은 '상대방'이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의 목적은 '자기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는 어느정도 이기적이여질 수밖에 없는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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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나는 여전히 이상형과 배우자와 결혼에 대한 시시콜콜한 술자리의 이야기를 즐긴다. 결혼정보업체에 비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귀엽지! 또 이런 이야기에 기대 자신의 바램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눈빛도 어느때보다 반짝거려 좋다. 물론 나는 잠자코 들으며 하나의 소원을 마음속으로 읖조리기도 한다. 이들이 사랑에 빠져 어쩔수 없음과 절절함의 세계를 경험했으면..! 그 때 옆에서 내심 킬킬거리며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 하고.

 

영화를 다 보고나서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현상을 하나의 극단으로 몰아가 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을 생각해보니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결혼을 전제한 만남 어플리케이션 내지는 결혼업체를 통한 손쉬운 이성찾기와 만남은(이것이 손쉬울 것이라는건 어디까지나 내 상(예)상이다. 필자는 결혼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해본적이 없다) 프랑수아의 부인바꾸기 과정보다 더 스무스하고 쉬우니까. 그 과정 중에는 누구도 슬픔과 실망, 고통으로 죽지 않을테니, 이 스무스함과 가벼움이 오히려 하나의 극단으로 느껴진다면 지나치게 수사적일까.

 

영화는 미장센이 매우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은 영화속에서 온실속 화초처럼 지켜진 프랑수아의 행복이기도하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레이어가 많다. 강렬한 색감에 대비되는 여백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낸다. 이렇게 명료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모두가 즐겁게(?) 볼수도, 영화를 다본뒤에는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수도 있을 영화다. 좋은 이야기의 기준은 더 많은 이야기를 자아내는 것에 달려있지 않을까. <행복>은 식견이 넓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수다쟁이 친구와 함께 보아도, 아녜스 바르다에 입문하기 원하는 사람과 함께 보아도 좋겠다.

 

 

[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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