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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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입력 2023.10.2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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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레이터 눈.jpeg

 
 

비가 내린다. 하필 통유리창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탓에 외풍이 느껴진다. 조금 추워서 재킷을 여며도 발가락이 시리다. 몸통 절반은 얼어가고 반은 감각이 살아있는 기분. 묘하다. 사람들이 들고 온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이 고인다. 바닥 마감재가 뭔진 모르겠지만 미끄럽지는 않다. 얼룩덜룩 찍힌 발자국이 조금 거슬릴 뿐이다.

 

추운 탓에 모두 따뜻한 음료를 시킨다. 히터를 틀어도 고약한 날씨 탓에, 머그잔은 금방 미적지근해진다. 창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내부 온도 때문에 습기가 찬다. 높은 층고 탓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마치 비가 내리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검지로 물방울을 포착한다. 굳이 끌어올려 뽀드득, 소음을 만든다. 그렇게 한두 번 잡다 보면 그림이 그려진다.

 

창은 불투명하다. 앞사람이 맨손으로 닦은 듯한 빈틈으로 바깥을 엿본다. 옆에 붙어있는 카페 이름의 시트지로 시선을 옮긴다. 먹구름 때문에 채도 낮은 바깥. 노란색 택배 트럭. 모자 쓴 남자. 무엇을 쓰는지 고개가 아래를 향한다.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유리를 두고 다른 세상을 마주한다. 내가 사진 찍는 주체인 건지, 작가를 지켜보는 건지 분간할 수 없다.

 

궁금해졌다. 한번 보고 넘기기 쉬운 사진 한 장인데, 여러 가지 정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일단 이미지가 맘에 드니까 휴대전화 배경 화면을 한다던가 노트북 화면을 바꿀 생각으로 핀터레스트와 구글 이미지 검색을 통해 작가를 찾아봤다. 찾고 보니 비가 아니라 <눈>이었다지. 검색하다 보니 알고리즘이 잡혀 방대한 아카이브를 만났다. 사진은 가볍게 지나칠 만큼 소소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포인트가 숨겨져 있었다. 표면 너머 이면을 발견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사울레이터 빨간 커튼.jpg

 
 
 

스토리텔링을 말하는 팔레트, 사울 레이터



 

“나에게 철학이랄 것은 없다. 카메라가 있을 뿐.”

“I don't have a philosophy. I have a camera."

사울 레이터(Saul Leiter, 1923~2013)

 

 

외출은 보통 목적이 있으니까, 목적지를 두고 집 밖을 나섰을 거다. 카메라는 습관처럼 챙길 거다. 직장인인 내가 혹시 모를 미팅에 필기구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겠지. 아마도 거리 가판대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을 것 같다. 각자 고정된 시선으로 개인의 길을 집중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개개인이 모여 나름의 규칙을 갖고 움직이는 군중 같다. 그곳에서 사울이 무엇을 느끼고 셔터를 눌렀을지 나는 모른다.


느지막이 일어난 오후, 퉁퉁 부은 눈으로 안경을 찾았을 거다. 부랴부랴 시력을 되찾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겠지. 평소 같은 아스팔트 도로와 보도블록 인도. 거니는 사람 두 명.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창틀을 기준으로 북서쪽을 향하고, 여분 구두와 신문을 든 남자는 커튼 링 틈 사이로 남동쪽을 향해 걷는다. 창틀과 다홍색 커튼을 프레임처럼 사용하여 뷰파인더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사진 한 장에도 여러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철저한 개인의 밀집된 사생활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사진은 감상자가 직접 상상하게 만든다. 저 둘은 도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상상.

 

패션 사진도 마찬가지다. 보통 매거진하면 정형화된 이미지, 확실한 키워드가 떠오른다. 철두철미한 에디터들과 균형 잡힌 신체를 자랑하는 모델들. 그리고 팔리기 위해 단장한 상품들. 통제할 수 있는 스튜디오에서 완벽히 정돈된 모델은 스태프가 준 상품을 입는다. 그리고 모두가 합의한 기획안을 기준으로 작가는 촬영하고 연출자는 감독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잡지는 의도가 분명하고 뜻이 금방 읽힌다. 내가 본 사울의 강점은 사진 한 장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이 특징인데도, 그는 <에스콰이어>와 <하퍼스 바자>에서 패션 사진작가로 꽤 오래 일했다고 한다. 수익은 거리 사진 촬영에 투자했는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사울이 남긴 말과 어쩐지 맞물리는 것 같다. 카메라만 들고 있으면 문제없다는 식의 얘기같이.

 

 

사울레이터 하퍼스비자 196년 1월(밀착인화지).jpg


 

《하퍼스 바자》의 패션 에디터 다이애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는 사울이 찍은 이미지 옆에다 유성 연필로 아트 디렉터 베아 파이틀러(Bea Feitler)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낸다. “베아. 모델이 경찰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돼요.”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 중 206-207p, 《하퍼스 바자》, 1964년 1월(밀착 인화지)

 

 

구구절절한 텍스트보다 이미지 한 장의 전달력이 강렬할 때가 있다. 글로 소화할 수 없는 색채나 분위기, 나에게 사울은 그렇다. 그는 상업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을 구성한 마깃 어브(Margit Erb, 사울 레이터 재단 설립자이자 이사장)과 마이클 파릴로(Michael Parillo, 사울 레이터 재단 부이사장)도 이 부분을 잘 아는 건지, 책은 재단에서 직접 엄선한 332개의 사진 및 삽화가 대부분으로 텍스트를 최소화했다. 총 350페이지는 흑백 사진, 컬러 사진, 패션 화보, 회화 작품, 누드 사진이 주를 이룬다. 여러 가지가 뒤섞였지만 나는 에디션을 보면서 322장을 관통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여행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울은 세상을 떠난 해인 2013년, 뉴요커의 사진 평론가 빈스 알레티(Vince Aletti)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 중

 

 

나의 발견은 ‘텍스처’와 ‘공간’이었다. 그는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사물을 손쉽게 이용했고, 사진 한 장에 여러 가지 요소를 녹였는데, 빛과 굴절을 통해 공간을 만들거나 날씨와 색채, 거울 등의 사물로 또 다른 차원을 구성했다. 요소는 감상자가 피사체를 촬영하며 당시의 날씨, 기분, 현장을 상기시켜 마치 본인이 작가처럼 느끼게 했다. 그는 렌즈로 피사체에 다가가는 갈림길의 유리창이나 창틀 등 그들을 다시 렌즈 속에 담을 수 있도록 촬영했다. 대담한 클로즈업을 서슴지 않았고, 차를 타고 바라보는 골목처럼 스치듯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서정적인 사울의 감각까지 녹아드니 피사체의 내밀한 사정을 상상하게 된다. 재단은 이를 사울의 ‘추상적 구상’과 ‘피사체의 현재성’으로 표현한다.

 

그는 스물두 살부터 웨스트 빌리지의 페리 스트리트 99번지, (19세기 풍 공동주택, 온수 설비도 없었을 건물) 이후에 이스트 10번가로 이사(1952년~2013년) 하여 평생을 살았다. 1957년부터 약 20년간 <에스콰이어>, <하퍼스 바자> 등과 작업하며 패션 쪽 일에 매진하면서도 늘 거리 사진을 촬영했다. 대부분 장소는 그가 거주하던 다운타운 맨해튼이 주 배경이었다. 특별한 공간은 없었다. 패션모델도 상품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사진을 찍었으니까. 사울은 감상자의 시야를 익숙한 공간에서 평범한 요소의 텍스처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사울은 알레티에게 말했다. “세상에는 무한한 것들로 가득해요. 아름다운 것도요. 그러데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것들을 못 보고 지나칩니다.” 그는 “거리는 발레와 같다”라면서 부유하는 자기 상상력을 표현하려는 것처럼 양팔로 둥둥 뜨는 시늉을 해 보였다.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 중


 

2023-10-25 00 05 49.png

 

 

사울은 자신이 서성이는 거리의 리듬에 흠뻑 젖어 들었다. 매일매일의 날씨와 상황, 시간 속에서 그 리듬을 익혔다. 그의 사진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마치 사진이 자기 의지로 그에게 스며든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스며듦의 과정은 감상자에게 기적과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그것을 사울의 추상 현실주의라 부르고 싶다. 그의 구성은 추상적이지만 피사체는 실제 장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 중

 


 

1초에서 60년


 

사울의 사진들은 덧없이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을 묘사하면서도 사진이 모이기 시작하면 몇 년, 심지어는 몇십 년을 표현한 거장의 아우라를 지녔다. 본인만의 시각으로 피사체 개인을 살리며, 당대의 트렌드가 무엇이든 자신만의 규칙을 꾸준히 지켰다. 20세기 사진계를 주름잡던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 세계에서 유명한 도시 보도 사진가 집단)가 주도한 흑백사진이 아니라 사울 레이터는 컬러 사진을 택했고, 색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단 앞서 설명한 특징들을 녹여 재해석했다. 사울의 작품을 알아주는 이도 몇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명성을 얻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유명해진 이후에도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 사진의 주 무대인 이스트 10번가에서 살았다. 그리고 2013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작업실에 방문한 이들이 말하길, 사진과 회화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한다. 생각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을 아주 꾸준히 생산하고 있는 애정을 보며 사울이 구축한 아카이브에 놀라워했다. 더욱이 신기했던 점은 그가 유명세를 딱히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상을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가만히 둘뿐이었다. 이런 가치관은 쌓아온 결과에 반영됐다. 사울은 포착한 1초로 작가 생활 60년을 대변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피사체 한 명이 그가 추구하는 세계관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서두에서 밝힌 알고리즘처럼 사울의 작품이 눈에 자꾸 밟혔고, 마우스 포인터를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개인 취향일 수도 있지만 뭘까 싶어 클릭하면 백이면 백, 모두 사울 레이터였다. 

 

그는 회화 작품만 하여도 약 4천200점으로 일평생 가꿔온 흐름을 유지했다고 한다. 책에서도 그의 화풍은 좋은 의미에서 변함이 없었다는 말한다. 현실 문제로 금방 나약해지는 나로서는 이런 사울이 존경스럽다가도 다른 종류의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진 모델들의 사연을 생각하다 어떻게 보면 내게서 바라는 것을 사울을 통해 발견한 게 아닐까? 여러 가지를 더는 글로 나열하기보단 그가 필자에게 전달한 대로 행동해야 할 때가 아닐지 싶다.

 

사울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하고픈 만큼 꾸준히 하라고.

 

 
[이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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