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지인 인터뷰 : 그리고 멋있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 입력 2024.06.1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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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나눔 단체 활동을 하면서 몇차례 인터뷰를 해본 바, 인터뷰이를 면밀히 알수록 뭍에 겉가지들을 모두 두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심해아귀라던가하는 쉬이 보지 못했던 생명체를 뜯어볼 수 있는 자세가 갖춰진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인터뷰이를 물색하고자 했을때, 누군가의 속내를 100%이해하고도 또 나머지 절반인 100%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사실과 함께 그녀를 떠올렸다.

 


0. 어디사는 누구신지.

 

서울 사는 이수빈입니다 ^^



1. 인터뷰어와의 관계는?

 

정말 소중한 친구!! 고등학교 때 기숙사 룸메이트로 만났다. 그땐 몰랐는데, 대학에 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나니까 이만한 친구를 발견한 게 엄청 큰 행운이라는 걸 알겠다. 앞으로의 미래가 정말 궁금한 친구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왠지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가 아니었음 쉽게 친해지지 못할 것 같아서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다면 다음에 같이 지난번처럼 여행도 가고 강릉 바다열차도 타고 싶다. 처음 알게 됐을 땐 이렇게 친해질 줄 몰랐는데 가끔 신기하다. (웃음)

 


2. 지난 1월, 함께 홍콩으로 떠난 바 있다. 침사추이의 독립서점 Kubrick에서 간체도 아닌 번체로 쓰인 책들 중 호기롭게 영어 원서를 골랐다. 읽어보니 어떤가? 혹은 가장 최근에 접한 문화예술을 소개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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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서점에서...하하...부끄럽지만 안 읽었다. (웃음) 반쯤 예상하고 산 거긴 하지만. 핑계를 대자면 원서다 보니 생각보다 더 손이 안 갔다. 그 책은 지금 본가 책장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가장 최근에 접한 문화예술은 어제 오늘에 걸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쥐 3부작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맨날 하루키만 보고 사는 거 같은데 그건 아니고, 올해 첫 하루키 소설이다. 쥐 3부작은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차기작 <1973년의 핀볼>, 그리고 그 직후 발표된 <양 사나이를 쫓는 모험>을 뜻한다. 전혀 다른 느낌의 책이지만 같은 세계관이고,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 쥐3부작의 에필로그격으로 취급되는 <댄스 댄스 댄스>를 읽다 갑자기 3부작을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2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이틀만에 네 권이나 읽었다.


체호프는 희곡 작품을 두고 ‘1막에서 총을 등장시켰다면 3막에서는 쏘아야 한다’ 고 했는데, 하루키는 항상 이 법칙을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위배한다. 대단한 징조를 품은 듯한 총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정작 쏘아지는 총알들은 몇 개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하루키가 꺼낸 총의 견인력에 맥을 못 추리고 총을 대체 언제 쏘나, 언제 쏘나 하면서 항상 끝까지 읽는다. 책을 덮은 후에 스토리의 모호함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만족한다. 총알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한번 쏘기로 결정된 이상 하루키는 정말 제대로 쏜다. 특히 ‘양을 쫓는 모험’의 후반부는 정말 소름돋았다. 그게 쥐 3부작의 매력인 것 같다. 다 알려주면 재미 없으니까 덜 알려주지만, 한번 알려줄 땐 확실하고 멋있게 알려준다. 밀당을 잘한다.


영화는 지난주에 라이카 시네마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봤고, 음악은 herman’s hermits의 no milk today를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60년대 스러운 노래인 것 같다. 올드팝에 다시 빠져서 peter paul and mary랑 sly and the family stone도 열심히 들었다.



3. 사람들이 당신을 생각하길, 존레논, 무라카미 하루키, 왕가위로 연상하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나.


(내가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지만) 솔직히 말해서 별로 좋진 않다. 존 레논의 급진적인 사상은 공감이 가지 않고 하루키의 단편 <야구장>은 처음 본 순간 부터 징그러웠다. 왕가위의 <2046>은 20분쯤 보다가 잠들었다. 존레논의 히트곡 몇 개를 좋게 들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를 인상깊게 읽었을 뿐인데 한 때 너무 광고를 하고 다녔던 것 같다. 그 사람들을 사랑했다기보단, 존레논을 듣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왕가위 영화를 보는 감각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최진영 작가의 <유진>에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물처럼 살고 싶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딱 그런 마음으로 취향을 이리저리 전시했었다. 이제는 세 사람을 거의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 인물에게 인간적으로 정이 가지 않는다. 셋 다 말년에 평범한 기득권층의 남성이 되었다는 사실도 있고, 존레논과 왕가위 성격도 좀 현실에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예술가 타입이라서. 저 셋이 아니라 인생을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위인이였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_^. 그치만 나를 떠올렸을 때 즉시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이 연상이 좋진 않다 해도, 막 그렇게 싫진 않다.

 


3-1. 이어서, 이들 각각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무엇이었나.


우선 비틀즈의 음악은 약간의 초연함을 준 것 같다. (존레논보다는 비틀즈를 훨씬 더 좋아했기 때문에 비틀즈라고 하겠다.) 비틀즈가 인도에 다녀오고 세상 만사의 덧없음에 대한 곡을 많이 썼는데, 고등학교 땐 그게 너무 멋있어서 류시화 시인의 인도 여행기까지 찾아 읽으며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그치만 그런 줄글로 된 교훈들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잡지식이었던 것 같고, 비틀즈 음악 자체가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해 주었다. 비틀즈의 음악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처음 들었을 때 소름돋게 행복했던 그 순간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하루에 딱 한번씩만 ‘렛잇비 앨범’을 듣던 시기도 있었을 정도로. 매일 밤 비틀즈 음악만큼 좋은 음악을 발견하는 상상을 하며 잠들었다. 꿈에서도 비틀즈만 나오고. 그 정도로 좋아하는 게 생기니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사소하게 느껴졌다. 모의고사 성적이 처음 나온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성적표를 받고 복도에 서서 ‘For No one’을 들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존재하는데 모의고사 하나 망한 거 쯤이야- 라는 생각을 했었다. 진짜 어이없지만 이런 식으로 많은 사건들을 지나쳤고 그런 정신상태가 습관이 된 것같다. 사람들은 비틀즈가 가사에 담아낸 사상이 초연하다 하지만 난 음악 자체가 그랬다. 정말 좋은 음악이나 책을 발견하면 현실의 일은 작게 느껴지고, 아주 잠시동안 초연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물처럼 살고 싶었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평범하고 무능하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블럭을 쌓듯 생활을 차곡차곡 이어나간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이상해지고, 가정이 무너질 때에도 저녁이 되면 음악을 듣고 장을 봐서 멋진 식사를 만든다. 어떤 순간이 와도 무너지거나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양을 찾지 않으면 이 세계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어이없는 협박을 받는 순간에도 (양을 찾는 모험), 사랑하는 여자가 그리스에서 실종된 순간에도 (스푸트니크의 연인) 조용히 다음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생각을 한다. 그러면 어느 샌가 모든 일이 해결되어 있다. 방황의 끝에 주인공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글로 쓰니까 밍밍하지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난 후 항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하루키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해소되는 것을 보며 나를 둘러싼 사건들도 전부 언젠간 괜찮은 결말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하루키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생각을 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흥분해서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얄팍한 잣대로 이것 저것 평가하지 않고 침착하게 관조한다면.

 

아무튼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사실 누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물처럼 살고 싶어지는 시기가 있지만 그냥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것 같다.



4. 무언가를 애호하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다면.


인터넷에서 연애, 썸 관련 게시물들을 내리다 보면 ‘연인이 제가 안 궁금 하대요. 이거 정 떨어진 건가요?’ 라는 식의 질문을 종종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의 끝과 사랑의 끝을 연결짓는 것이다. 나도 똑같은 마음이다. 무언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궁금해진다.


계절이나 음식처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거라면 모든 기관들을 다 활용한다. 예를 들자면, 요즘 여름이 좋아서 창문을 자주 열고 있다. 비 오는 날의 여름과 아침의 여름과 해질녘의 여름을 느끼고 관찰하고 싶으니까. 음악이나 소설은 관련된 정보를 모으려 애쓴다. 가사 해석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만, 역시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게 나은 것 같다. 뭔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 읽거나 계속 들으면서 의미를 곱씹어보는 편이다. 정답을 찾기보다는 내가 만족할 만한 해석에 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밴드 음악 같은 건 작곡가의 해답이 오히려 더 허접할 때가 많아서 찾아보지 않는 편이다. 예술은 감상자가 만들어나가는 것…)


그치만 이건 정말 정말 좋아할 때이고, 그냥 오 좋다, 싶으면 반복해서 듣거나 보는 게 전부이다. 요즘은 엘리엇 스미스랑 스티븐 수프얀을 듣는데, 찾아보려 해도 귀찮아서 항상 미뤄두는 걸 보면 그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닌가 보다.



5.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바뀐 나의 부분은 무엇인가? 그건 단순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것이었을까,모종의 사건에 의한 것이었을까.


너무 많이 바뀌어서 모르겠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하나도 안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웃음)그나마 고르자면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그만둔 거? 단순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이다. 근데 이것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하는 생각 아닌가.

 


6. 평소 남들이 이러나 저러나 초연해보이는데. 그럼에도 타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우선 행동 면에 있어서는 정말 딱히 없다. (웃음) 좋은 행동을 해도 나쁜 사람일 수 있고, 나쁜 행동을 해도 좋은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별로 신경 쓰이진 않는다. 물론 범죄를 저지르면 안되겠지만 그런 기본적인 건 이미 논외일 것 같고.


열심히 생각해 보니, 그나마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너무 세상을 무 자르듯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주변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새삼 모두가 확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문제들을 너무 빨리, 너무 완고하게 단정짓는다. 이런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고,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고, 이 분류는 이 분류고. 흐물텅한 데이터로 도출한 결론들이 알맹이에 비해 너무 완고하다.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오류에 취약한지 알면 좋겠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고, 자신과 다른 누군가가 있더라도 그건 세계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 뿐이지 틀리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 좋겠다. 쉽게 비난하지 않고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면 좋겠다.



7. 진부하지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별 생각 없이 그냥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기연민이나 위선에 빠지고 싶지 않다. 내가 잘 살고 있는가, 내 인생은 남들에 비해 어떤가, 나는 성공한 사람인가 실패한 사람인가, 보다는 저녁에 하는 티비 프로그램이나 이번주 외식 메뉴를 고르는 데 더 시간을 쓰고 싶다. 나에게는 그게 진짜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멋있어지기 위해, 뛰어난 능력을 갖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계절을 느끼고, 제철 과일을 먹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선풍기 바람 아래 잠들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나와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이 세상이 매일 매일 발전하고 똑바로 돌아가니까… 근데 그냥 내 의견은 이렇다.


그리고 멋있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대상이 가족이던, 애인이던, 친구던, 음악이던, 계절이던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치는 목련나무던, 뉴스에 나오는 사상이던 간에. 친구를 돕고 싶은데 돈이 없을 때,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럴 아량이 되지 않을 때, 음악을 듣고 싶은데 듣지 못할 때, 계절을 느끼고 싶은데 몸이 아플 때, 무언가를 외치고 싶은데 용기가 없을 때 참을 수 없이 슬펐다. 그런 순간들이 많아지는 걸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하라 하는 공부를 했고, 추천하는 대학에 왔다. 궁극적으로는 무엇이든 사랑하기에 충분한 몸과 마음, 그리고 안정적인 수입을 갖추기 위해... 근데 이 세 조건을 한번에 갖추는 건 정말 힘든 일 같다.

 

 

'참을 수 없이 슬펐다.'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건 퍽 감동적이다. 그녀가 자각했을지 모르겠으나, 자기 연민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말과 그녀가 느낀 슬픔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이다. 슬픔의 화살은 내가 아닌 외부를 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감히 예측하건대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시간에 지판을 앞에두고 이렇게 자각하고, 느꼈을 것이다. 진실된 나를 표방한다고는 하나, 말이나 글을 거치는 순간 더해진 형식이 나를 치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걸 필수불가결하다고 믿는 것에 대한 정말 조금의 가책을. 무더운 여름날씨에 늘러붙은 사탕과 포장지처럼, 어디가 알맹이고 어디가 포장지인지 분간할 수 없다한들 100세 인생을 위해 마구 첨가된 방부제가 우릴 그리 쉽게 상하게 두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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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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