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단 5분의 따듯한 견딤으로 되찾은 목소리 – 음악극 ‘섬(1933-2019)’

섬을 둘러싼 경계를 무너뜨린 것은 따듯한 포용력이었다
글 입력 2024.06.1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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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감이 될만한 역사 속 인물의 삶을 무대 위에 복원함으로써 그와 연관된 동시대의 목소리들에 자연스럽게 주목할 수 있도록 하는 ‘목소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발된 음악극 ‘섬’이 우란문화재단에서의 성공적인 초연을 지나, 이번 년도 정동극장에서 새롭게 막을 올렸다.


한 평생 봉사를 실천한 인물들을 주목하는 프로젝트 궁극의 목적에 따라 한센인을 위해 헌신했던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소록도’라는 낙원을 가장한 격리의 경계에 갇힌 한센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고, 이는 시대를 넘어 ‘장애도’라는 보이지 않는 섬에서 숨죽이고 있는 우리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까지 이어진다.


이들의 공통점은 ‘목소리를 잃었다’는 점이다.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들은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할 만한 여건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어쩌면 그들의 치열한 목소리를 들어줄 귀가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기저에는 ‘너희들은 우리와 달라’라는 농도 깊은 배척감이 만든 혐오가 있고, 그것은 이들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어 섬 안쪽으로 고립시켜 버린다.

 


[국립정동극장] 섬1933-2019_공연사진 (2)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jpg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1933년 한센병 환자들은 ‘문둥병’을 앓는다고 하여 ‘문둥이’라는 호칭으로 낙인 찍힌 후 괴물 취급을 당했다. 외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바람만 불어도 감염된다는 정확하지 않은 낭설에 기반하여 이들은 끝도 없이 내몰리다가 ‘소록도’라는 섬에 스스로를 가두는 선택지만을 남겨두게 된다. ‘일반 세상’과는 다른 법과 규칙, 부당한 상황이 자행되는 그곳이 그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공간이었기에 이들은 차별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이 타당치 않은 혐오에 기반한 차별이 그들 안에 스며들어 자아를 좀먹고 외부에서 시작된 혐오를 내제화하게끔 만든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섬은 한센병 환자들로부터 애써 짓던 미소와 서로를 향해 건네던 격려의 말에 담긴 긍정을 빼앗고, ‘내가 정말 괴물인가?’같은 질문 속에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이들은 점점 더 섬 안쪽으로 고립되어 갔다.


자유에 대한 희망과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차별과 강압만이 남은 섬을 떠나고자했던 해봉과 수선의 앞을 막아서는 고난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그들을 따라다니는 낙인은 좌절한 수선의 위로 냉담한 조명을 비추며 섬, 그러니까 사회가 그들에게 씌워둔 프레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들의 처지를 확인시켜 준다.

 

 

[국립정동극장] 섬1933-2019_공연사진 (1)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jpg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1966년, 소록도를 둘러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경계를 녹인 인물은 뾰족코와 푸른 눈을 가진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은 자신과 너무나 다른 생김새의 한센병 환자들이 마치 친근한 이웃이라는 듯 허물없이 대하며 돌보았다. 항시 장갑을 끼고 한센병 환자들을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법이 없던 이전의 의사들과 달리, 이 간호사들은 한센인들의 신체를 만지는 일에 어떠한 꺼리낌도 없어 보였고, ‘한센병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을 통해 한센병 환자들의 내면 속 잠식된 어둠을 기운차게 몰아내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치료 기간이 다를 뿐 감기 든 환자와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며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며 소록도 밖으로 한센인들의 공간을 넓혔고, 한센인들은 조금씩 목소리를 되찾게 되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미약하게나마 형체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국립정동극장] 섬1933-2019_공연사진 (5)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jpg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그런가하면 2019년 서울, 머나먼 시대를 건넌 이곳에서 목소리를 잃은 또다른 이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경계 속에 갇혀 있었다. 난산 끝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지원’을 얻은 지선은 행복을 맛보기도 전에 지원이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첫돌이 지난 시점부터 세상의 냉담한 경계로부터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싸워야 했다.


아무도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의 어려움과 그로부터 파생된 아이의 독특한 행동의 이유에 대해 들어보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지원은 점차 목소리를 잃고 자신만의 세계에 매몰되었다. 지원을 낳기 전, 자신의 연주회를 찾은 장애우 아이에게 냉담한 시선을 주었던 자신의 모습이 지원을 바라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 위로 오버랩 되며 지선은 마치 벌을 받는 것만 같은 괴로움 속에서 울분을 토해낸다.


장애인 학교 개설 안건을 두고 양측이 모인 토론회, 장애인 학교를 ‘혐오 시설’로 칭하며 ‘더 이상 우리 동네에는 안 된다’는 주민 연합회 앞에서 지선은 목이 터져라 장애로 살아가는 사람과 보호자의 일상에 대해 토로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의 수치적인 인구보다 우리가 장애를 마주하는 빈도가 낮은 이유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섬 ‘장애도’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센병 환자들의 발을 묶고 목소리를 앗아간 소록도처럼,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일반적임’의 기준에 들지 못한 이들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달고 높디 높은 경계의 철책으로 둘러싸인 섬에 갇히게 된다. ‘익숙하지 않음’은 곧 불쾌함이 되고, 그것은 혐오로 발전하여 차별을 만든다.


지선의 마지막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원의 돌발 행동이 일어난 지하철 안에서, 평소처럼 지원을 제지하지 않고 마음껏 뛰어다니도록 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엔 물론 눈살을 찌뿌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 5분, 익숙해지기 위한 단 5분이 지나자 누군가는 지원의 움직임을 예측해 다리를 접고, 누군가는 지원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할 일로 돌아갔다.


다름을 포용하기 위한 단 5분의 시간, 그것이 그토록 어려워 우리는 혐오와 차별을 만들고, 그 것이 만든 경계로 인해 낙인 찍힌 이들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어쩌면 그 5분을 견디는 것이 생각보다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따듯한 포용력을 모두가 아주 조금씩이라도 발휘 한다면, 우리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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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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