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을 알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감동의 순간들 - 결정적 그림

영원한 예술로 남은 화가의 순간들
글 입력 2024.06.1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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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지 않아도 미술 작품에 담긴 예술성을 단번에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심미안을 타고난 편은 아니다. 어쩌다 미술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더라도 잘은 모르지만 분명 대단한 가치를 지녔으리라는 추측을 할 뿐 감상이 감동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무엇을 느끼기 위해 해설을 읽으며 애써 작품에 담겨있는 가치를 발견하려 노력하지만, 이런 주제로 저런 화풍과 그런 기법을 이용했다는 설명만으로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을 관통해낸다는 건 솔직히 겪어본 적 없는 일이다. 하물며 보이는 것조차도 다 분별해 내지 못하는데 말이다. 사실 그들은 내게 그저 예쁘고 대단하다는 작품에 불과했고, 찰나의 인상은 뒤돌아서는 순간 잊히기 마련일 뿐이었다.

 

이런 이력을 지닌 내게 어떤 화가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뻔하게도 ‘빈센트 반 고흐’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중에서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과거라면 더욱 뻔하게 <별이 빛나는 밤>이나 <해바라기> 등을 언급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분명하게 <꽃 피는 아몬드 나무>라고 대답할 것이다.

 

명성이 대단한 것과는 별개로 가장 좋아하는 화가의 이름으로 고흐를 대는 것은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이름과 대표작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니 말이다. 그의 불우한 생애와 쓸쓸한 죽음, 생전 주목받지 못한 비극적인 천재성 등이 그의 작품 못지않게 유명한 서사일 만큼 너무나 잘 알려진 예술가, 특히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는 점에서, 최애 화가로 고흐를 꼽는 것은 척 보기에 딱히 미술의 조예가 깊진 않다고 드러내는 것만큼 심심한 답변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실제로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다는 점이 조금 분하기는 하나,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내게 단순히 감상 이상의 감정, 나아가 감동을 느끼게 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까지는 그저 아는 화가가 몇 없어 그 이름을 꺼내 놓았으나,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에 얽힌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서사가 담겨 있는 이 그림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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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 © 반 고흐 미술관

 

 

긴 겨울이 지난 초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는 아몬드 나무를 그린 이 그림은, 고흐의 작품 중 가장 밝은 색채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고흐는 봄의 상징이자 희망이란 꽃말을 지닌 아몬드 꽃 나무 그림을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은 고흐는 평생에 걸쳐 자신이 죽은 형의 삶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던 고흐의 전 생애를 떠올린다면, 어쩌면 그에게 그 이름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운명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고흐 본인조차 미워했을 그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며 형을 응원하려 했던, 고흐를 향한 동생 테오의 사랑이 느껴지기도 한다.

 

조카에게 이 그림을 선물하기로 한 고흐의 심정이 어땠을지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형의 이름을 물려받은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과는 달리 조카의 삶이 희망으로 가득하기를 응원했을 그 마음이 가슴이 아릴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비록 5개월 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그의 운명이었지만,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린 희망의 그림은 고흐가 스스로에게 전하고 싶던 진심 어린 위로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이 작품에서 감동을 느낀 건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난 화풍과 대단한 실력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런 기술을 분별해낼 능력조차 없다.) 결국 나를 매료시키는 건 늘 그랬듯 이야기이다. 내가 진정 궁금한 것은 이 작품이 미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보다, 그가 왜 이런 작품을 창조했으며 한 예술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이다.

 

그의 개인적인 생애가 작품의 예술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예술작품이 해당 예술가의 시선이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결국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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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에 관한 일화를 시작으로 전개되는 이 책은 해당 그림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또한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이 좀처럼 감동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그동안의 경험에 의한 의문을 해결하는 듯했다.

 

때론 미술 서적을 읽는 일이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부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자 출신의 저자 이원율이 <헤럴드 경제>에서 연재한 칼럼 시리즈 ‘후암동 미술관’의 기고글 중 일부를 재편집하여 출간된 <결정적 그림>은 역사적 사실에 저자의 상상력을 더하여 전개되는 특유의 흡입력 있는 전개가 돋보이는 미술 서적이다.

 

마치 단편 소설이나 예술가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연상시키는 스토리텔링은 때로는 위대한 예술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만큼이나 생생하고 몰입감 있었다. 많은 미술 서적들이 주로 서양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것과는 다르게, 22명의 예술가의 이름에 자랑스러운 한국 미술인인 ‘이중섭’과 ‘추사 김정희’를 포함시켰다는 점 역시 뜻깊게 다가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된 낯익은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이 그의 생애를 알고 나면 퍽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듯 다채로워서 재밌었다. 역시 발군의 천재답게 비범한 족적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예술가 역시 때로는 삶의 위기에 절망하기도 했다는 점이 위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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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 

ⓒ Museum of Fine Arts, Boston

 


특히 기억에 남는 화가 중 하나는 ‘폴 고갱’이었다. 그저 천재적인 화가인 줄만 알았던 그의 이면은 조금 추악하게 느껴졌다. 그의 일기처럼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열등감과 처절한 인정 욕구가 담겨 있었는데, 그런 조잡한 감정들은 사실 나와 닮았기에 더욱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전에 그가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감상하며 작품이 담고 있는 철학적인 의미를 곱씹었던 적이 있다. 분신 같던 딸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렸다는 이 작품을 보며, 때로는 한 편의 그림이 말과 그림이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꽤 인상적으로 남았던 이 그림을 향한 감동은 고갱의 삶을 좀 더 면밀히 알게 된 뒤로는 왠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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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인생이여 만세’, 1954 ⓒ 프리다 칼로 미술관

 

 

스물두 명의 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한 이 책은 프리다 칼로의 <인생이여 만세>라는 작품으로 마무리된다. 일전에 한 드라마에서 선천적인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등장인물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와 그의 작품으로 위의 그림을 언급한 장면이 떠올랐다.

 

싱싱한 수박 더미에 적혀 있는 ‘Viva la Vida’라는 문구의 조합이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당시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삶의 말미에 늘 고통의 연속이었던 인생을 향해 ‘만세’라는 찬사를 보낸 한 예술가의 기개가 반전처럼 짜릿하게 느껴졌다. 고통스러운 삶을 향한 최고의 복수는 아마 고통마저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초월적인 자세일 테다. 그 또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드라마 속 주인공이 어째서 프리다 칼로를 선망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이 왜 <결정적 그림>일까에 관해 줄곧 곱씹어왔다. 펼치기 전부터 의문이었던 제목은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끝내 그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마치려 하는 순간에 와서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정처 없이 흘러가버리는 인생의 수많은 시간들 속에, 그림을 통해 영원으로 남는 어떠한 순간. 그 찰나의 시간은 분명 한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순간일 것이다. 그림 만으로는 전부 이해되지 않는 화가의 작품 세계는 그의 생애를 이해하고 나서야 그 결정적인 순간의 의미와 감동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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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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