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희망은 보여져야 한다 - 음악극 섬:1933~2019

글 입력 2024.06.1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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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섬:1933~2019>는 2019년 초연 이후 재연을 맞이하는 창작극으로 1930년대, 1960년대 그리고 2019년의 이야기를 엮어 노래와 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섬으로 추방되고 격리되어 착취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2019년 발달장애를 겪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 이야기로 연결된다.


 

 

시설이라는 섬



[국립정동극장] 섬1933-2019_공연사진 (2)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jpg

 

 

<음악극-섬:1933~2019>는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했던 섬 소록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다른 많은 이들과 같이 한센병의 존재와 그들이 강제로 격리되고 학살당한 섬, 소록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처음 접했다.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어떤 영화를 보았다. 2018년에 개봉한 <어른이 되면>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어른이 되면>은 장애인 가족 당사자인 장혜영 씨가 그의 동생 장혜정 씨와 탈시설을 하고 함께 일상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었다.


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처음으로 내 삶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전체 인구의 5%가 장애인이며, 대다수는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어떤 사실에 대한 명시를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청준의 소설을 다시 떠올린 것도 그때였다.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교육 과정을 밟을 때 보통 한 반은 30~40명으로 꾸려졌고, 그 계산이 맞다면 한 반에는 1~2명의 장애인 급우가 있어야 타당했다. 또한 내가 집 밖을 나가 10분을 걸었다면 적어도 한 명의 장애인 시민을 마주쳐야 타당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디에서도 장애인을 마주치지 않고 살아왔음을 생각했다. 대신 나는 ‘비록 장애가 있지만’ 밝고 천사 같은 웃음을 짓는 장애인 어린이들만을 TV의 기부 프로그램에서 훔쳐봤음을 떠올렸다. 무언가 잘못됐다. 나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이 틀렸다는 것일까. 나는 왜 한 번도 학교를 갈 때, 장을 볼 때, 영화를 보러 갈 때, 여행을 다닐 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불편하지 않았을까. 내 일상의 평온함과 순탄함은 누구의 권리를 빼앗아 꾸려진 것일까.


한 달 전 나의 할아버지는 요양원에 입소하셨다. 할아버지는 올해 100세를 맞이하셨다. 비상한 머리와 건강한 신체를 지니셨지만, 노인이 된다는 것은 병에 걸리는 것과 달라 아프지 않아도 할 수 없는 것들은 매일 늘어가는 일이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멋 부리기를 좋아하시고 넉살 좋게 자식들과 대화를 나누시지만 밤에 혼자 자는 것은 무섭고 깜박깜박하는 것들의 내역이 많아졌으며 혼자서 밥을 차려 먹지 못하게 되셨다.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하니 혈색도 안 좋아졌다. 이것은 더 이상 혼자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자식들은 각지에 떨어져 살고 각자 중년과 노년의 나이를 맞이했지만, 퇴직하고서도 돈을 버느냐 바빠 할아버지를 온전히 돌볼 수 있지 않았다. 이전까지 할아버지를 위해 각자 분담해 오던 노동의 양은 자꾸만 늘어나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고 할아버지는 요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할아버지의 입소일 날 우리 가족은 모두 할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요양원으로 향했다. 나는 요양원을 그날 처음 가봤다. 가까운 외출, 심지어 층간 이동도 자기 의지로는 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옷도 마음대로 입지 못하는 곳이었다. 덜 아픈 노인과 더 아픈 노인, 그리고 중년의 여성 요양보호사들만이 아무런 소음 없이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요양원에서 나는 젊고 건강한 나의 삶이 어색했다. 일하다 늙고 아플 미래의 내 몸을 저당 잡아 버티고 있는 나의 세계가 불안했다. 이곳인가. 내가 앞으로 수십 년간 바삐 살아 더 이상 혼자서 밥을 해 먹고 옷을 빨아 입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평생을 살아온 곳과 전혀 상관없는 역사 없는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일까. 혹은 내가 마주할 인구감소의 세계는 이곳보다 안 좋은 시설을 나에게 제공할까. 젊고 일할 수 있는 나와 늙고 장애가 있어 세상이 요구하는 만큼 일할 수 없는 나는 무엇이 다른가. 유의미한 생산을 하지 않는다면 비용뿐인 그들을 치워버리면 그만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어디로 가야 하나.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3부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를 다룬다. 18세기 전염병(이때의 전염병이 나병, 즉 한센병이었다.)에 대한 공포로 수감시설에 의사가 출현하게 된다. 수감시설에 의사가 생김에 따라 같은 공간에 있던 광기는 다른 세계로부터 온 위험이 아닌, (인간 욕망의 무한함을 전제로) 본능의 분출로 상상된다. 즉, 광기는 세련되게 다듬어짐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상실한 문명의 이면이 된다. 한편, 광인의 특수성은 감금 공간 그 자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비이성'으로 묶여 광인과 함께 감금되었던 이들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의적 감금 조치가 전제군주제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풀려난다. 다만 광인은 새롭게 등장한 정신이상자 수용시설에 감금된다. 따라서 감금의 공간은 의료화되고, 광기는 과학적 시선으로 규정되며, 광기와 범죄가 새롭게 결합한다. 프랑스대혁명은 광기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의료화했다. 19세기 이후 광기는, 그 의학적 의미에 의해 언제나 수감되어 있으면서 단지 그 의미만이 변해왔다. 광기의 소외는 19세기 초반의 치료 담론에 잘 드러난다. 이 '치료' 작업은 푸코가 보기에 죄의식을 형성하여, 망상적 행동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이때 광인은 배제된 자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죄의식을 느껴 스스로 소외되는 존재이다. 푸코의 역사적 분석은 우리가 현재 정신병이라 부르는 것과 시설의 탄생을 추적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설의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초기 시설로 격리된 이들이 정신병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가난한 사람, 부랑인, 장애인과 성소수자, 고아, 그리고 그냥 지나가는 시민 여러분. 이들은 시설에 격리되었다. 시설 밖의 세계 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이성의 영역으로 배제되었다.


 

 

수선, 영자, 지선: 3대의 연대기



[국립정동극장] 섬1933-2019_공연사진 (5)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jpg

 

 

1933년 일본은 조선나예방령을 근거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로 강제 송치했다. 부랑 생활에 지친 환자들은 치료도 받고 살 터전을 마련해준다는 이야기를 믿고 제 발로 찾아가기도 했다. 강제로 쫓겨났든 제 발로 찾아갔든, 지역사회에서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것은 분리와 감금보다 가볍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2009년 워커홀릭이었던 고지선은 분만 전까지도 업무 관련 전화를 할 정도로 열정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첫돌이 지난 후 아이는 발달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고 일 년간의 육아휴직은 평생의 돌봄으로 바뀌었다. 비슷한 수준의 발달장애도 유아 청소년 시기 받은 교육에 따라 성인 이후 인지 능력에는 차이가 보일 수 있다. 재활과 교육이 필수인 까닭이다. 그러나 국가 지원은 한정적이며 그 사이에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난다. 지선은 하는 수 없이 사설 기관을 찾는다. 그 기관을 찾고 돈을 대고 아이를 돌보는 것 모두 부모와 가족의 몫이 된다.


수선은 영자를 낳았다. 영자는 지선을 낳았다. 수선은 영자를 낳았지만, 한센인이었기에 자기 새끼 한 번 안아볼 수 없었다. 한센병이 전염되지 않는다는 의학적 사실은 이들의 구체적인 절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자는 친정 식구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오빠에게 자기 아들을 시설에 보내는 것을 권유받았다. 영자는 분노했지만, 가족 그 누구도 영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자는 가족에게도, 지역 내 특수학교 건설 토론회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미친 여자가 되어갔다.


수선과 영자 그리고 지선은 시설에 수용된 당사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극에서 한 장면에 나오는 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수선의 삶을 통해 지선의 삶을 이해하고 지선의 삶을 통해 영자의 삶을 이해하곤 한다. 때론 소록도의 해설자로부터 수선과 영자를 발견하기도 했을 것이다. 서로의 삶과 생으로 이어진 3대의 이야기는 이렇게 촘촘히 이어진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보아야 하나


 

[국립정동극장] 섬1933-2019_공연사진 (1)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jpg


 

극이 끝나고 배우가 떠난 무대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남긴 말이 새겨졌다.


불멸의 희망은 보여져야 한다

희망은 느껴져야 한다

희망은 실현가능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희망으로 살아야 한다.


냉소와 비관이 미덕인 세계에서 희망은 자꾸만 놀림감이 된다. 희망을 품고 사는 일은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을 놓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1966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카톨릭 재속회원 신분으로 소록도에 입도한 후 환자들을 위해 봉사한다. 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국의 먼 섬에서 평생을 헌신했다. 그들은 희망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듣고 보고 만지고 그리하여 감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의 그 글을 읽으며 나는 내가 오늘 본 <음악극-섬:1933~2019>가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희망의 일종임을 생각했다. 희망은 이렇게 보여져야 하는구나. 희망은 절망에 근거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는 것은 지옥에 사는 이들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 속에서야 희망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년에 나온 서보경의 <휘말린 날들>은 HIV/AIDS, 그리하여 감염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서보경은 HIV 감염인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특수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 혹은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염이라는 사건을 한발 앞서 겪은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나는 공연이 끝난 뒤 심장이 물을 먹은 듯 무거웠지만 내가 본 것이 희망임을 확신했다. 창작극이었지만 무엇보다 진실한 이야기들이었다. 시설에 가두어지고 배제된 이들의 이야기. 배제된 이들을 가둔 섬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그곳의 이야기라기보다 배제와 분리를 통해 ‘일상적으로’ 세계를 꾸려나가는 이곳의 이야기이다. 지옥 같은 시설에서도, 장애인을 배제하는 지하철과 학교 앞에서도, 주변 사람을 사랑하고 날마다 성실하게 살았던 이들의 역사는 세상에 전하는 한발 앞선 증언이다. 음악과 각본, 연출, 조명 무엇 하나 빠짐없이 훌륭히 가득 담은 극은 우리에게 수치와 희망을 함께 주니, 뜨거운 여름날 꼭 이 음악극을 만나보시기를 바란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진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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