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solo album] track16.

글 입력 2024.06.1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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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Yang EJ (양이제)]

 

 

[NOW PLAYING: When the Music's Over - The Doors]


뽑기 기계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길이건 처음부터 뽑기가 목적이었건, 어쨌든 우리는 기계 앞에 서 있습니다. 성인 남성의 평균 키보다 살짝 작은 이 기계는 알록달록 개성 있는 솜인형들로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공중에는 다소 부실해 보이는 집게가 덜렁 매달려 있고요. 동전을 하나 넣어봅시다. 집게는 움직이고, 30~40초 내외의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구석에 정자세로 서 있는 백곰 인형이 오늘 우리의 타깃입니다. 백곰 인형의 머리는 자기 몸통의 2배쯤 되는데, 이 커다란 머리가 집게에 운 좋게 걸릴 수 있기를 빌어보며 조준해 봅니다. 위잉. 위잉. 풀썩. 출구를 향해 이동하던 집게는 아쉽게도 지척에서 인형을 놓치고 맙니다. 백곰 인형은 다른 인형들과 부딪혀 가로로 몸을 뉘었지만, 그래도 해볼 만합니다. 집게가 한 번 백곰의 머리를 물었고, 저 멀리 구석으로부터 출구 바로 옆까지 옮기는 데 이미 성공했으니까요. 동전을 하나 더 넣어봅시다.


만약, 뽑기 기계의 집게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헐거웠다면요? 가닥들이 맞물리지 못하고, 그저 백곰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는 수준에 그쳤다면요? 모든 의욕을 잃고 기계를 떠났을 겁니다. 딱 한 번밖에 시도하지 않았지만, 그것마저 아까워하며 미련 없이 자리를 떴겠지요. 집게가 인형의 머리를 물었던 순간이 동전을 더 넣느냐 마느냐를 결정한 겁니다. 실제로 뽑기 기계의 집게를 처음부터 헐겁게 만들지 않고, 출구에 도착하는 순간에서야 잠시 힘을 풀도록 설계한 것에는 그런 의도가 있는 거겠지요. 희망이 있어야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가냘픈 희망에 중독되어 돈을 더 쏟아부을 테니까요.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일에 끈질기게 매달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습니다.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녔거나, 깊은 깨달음을 얻은 일부가 아니고서야 그러기 쉽지 않죠. 계란으로 바위를 쳐본다 한들, 계란은 결국 깨지니까요. 계란이 제 목숨을 부지하려면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줄 아는 포기의 미학을 알아야 합니다. 생존본능인 셈이죠. 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다릅니다. 자신을 바위라 믿는 계란이 어느 한순간, 아주 잠깐 바위가 뒤로 물러나는 걸 경험했다면 더 이상 멈출 수 없습니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미래를 그려나갑니다. 바위의 조각난 파편은 어떤 모양일까, 계란은 상상을 그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박치기로 바위에 미세한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무조건 돌진입니다.


손님은 마침내 인형을 뽑아 사랑하는 이에게 이를 선물로 주었고, 계란은 바위를 향해 내달리던 열기로 껍질을 깨고 병아리로 부화하게 되었다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과정은 치열했지만, 손님은 사랑하는 아이의 미소를 볼 수 있었고 계란은 독립적인 하나의 생명으로 진화했으니까요. (계란 입장에선 바위를 깨부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 셈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손님은 차비까지 뽑기 기계에 몽땅 쏟은 바람에 아이의 생일파티에 늦게 생겼습니다. 빈손으로 도착한 약속 장소는 파티가 끝나고 난 후의 적막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돌진하던 계란은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순간, 자신이 바위에 낸 생채기 틈에서 번쩍이는 광채를 발견합니다. 자신이 부수려던 것은 무른 현무암이 아닌, 무적의 황금임을 깨닫고 몸은 산산조각 납니다. 뽑기에 매진해 집중력을 발휘하는 손님의 눈, 바위를 향해 내달리던 계란의 모습은 분명 독보적입니다. 다른 이들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액션이 다양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자기파괴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예시처럼요. 희망은 양날의 검입니다.


중요한 점은 희망에는 독성이 있어 인물을 고조시킨다는 점입니다. 독을 먹은 인물은 격정적으로 변합니다. 무대 바깥에서 악기가 부서진다면 인물은 체념하지만, 데뷔 무대 직전 부서진 악기는 인물을 패닉 상태로 내몰듯이요.



 

양은정 에디터태그.jpg

 

 

[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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