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들의 사랑이라니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글 입력 2024.06.2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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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구를 든 한 여인이 한 저택에 도착한다. 그는 화가 마리안느로, 결혼을 앞둔 귀족의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그녀의 결혼 상대에게 보내질 예정이다. 얼굴도 모르는 이와 결혼해야만 하는 현실이 싫었던 엘로이즈. 그녀는 순순히 초상화 모델이 되어주지 않았고, 수많은 화가가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실패한다. 결국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마리안느를 그녀의 ‘산책 친구’라 속인 후,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와 함께 산책하며 몰래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 마리안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엘로이즈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눈, 코, 입이 담긴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몸과 표정을 조용히 관찰한다. 그리고 그 관찰의 시선은 관심과 사랑으로 변해가고,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일방적 시선은, 점차 서로를 향하게 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18세기 프랑스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연대를 그린 작품이다.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받아야 하는 엘로이즈와, 화가인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아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지만 그럼에도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종교와 신화 등 중요한 주제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마리안느를 통해 당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드러난다.


정략결혼을 앞둔 귀족 집 아가씨와, 그녀의 배우자를 위한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화가. 동성이라는 이유를 제하더라도,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잠깐 그녀의 집을 찾은 손님일 뿐이다. 초상화가 완성되는 즉시, 그녀는 떠나야만 한다. 이별이 예정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러나 영화는 이미 정해져 있는 그들 사랑의 비극적 결말보다, 서로를 바라보고, 몰입하고, 사랑에 빠졌던 짧은 며칠, 찰나의 순간을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그려낸다.


두 사람의 산책은 본질적으로 엘로이즈가 원치 않는 결혼을 성사하기 위해 존재했으나, 역설적으로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는 엘로이즈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그간 외출이 금지돼 있었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와 함께한 첫 산책에서 광활한 바다를 향해 힘껏 달린다. 자신을 옥죄는 집을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그 시간을 엘로이즈는 사랑한다. 그녀는 자신 앞에 끝없이 펼쳐진 자유로운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도전해 보지 못했던 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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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고, 다양한 예술을 향유했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그녀의 부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소설책을 빌려주기도 한다. 자신의 결혼을 앞당기기 위해 찾아온 마리안느를 통해, 엘로이즈는 자유를 만끽하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간다.


마리안느 역시 엘로이즈를 통해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는다. 마리안느가 몰래 그린 초상화가 완성되고, 모든 것을 알게 된 엘로이즈가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생명력도, 존재감도 없다고. 당신이 바라본 내 모습이 이랬냐고. 그녀는 그녀 자신을 그린 그림에 ‘자신이 없다’는 평을 남긴다. 엘로이즈의 평, 그림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그녀의 냉철한 평가는 그녀를 관찰하며, 엘로이즈의 모든 것을 샅샅이 꿰뚫어 봤다고 여겼던 마리안느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림의 대상으로만 여겼기에, 그저 외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만 열중했기에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를 일깨우는 것은 단순히 관찰되는 대상으로만 존재하길 거부한 엘로이즈다.


이후 마리안느는 새로운 초상화를 그리기로 하고, 엘로이즈 역시 초상화 작업에 협조하기로 한다. 초상화를 위해 매 순간 엘로이즈를 관찰했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화가 날 때, 당황스러울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몸짓을 취하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였어도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 그 자리가 싫었을 것이라고. 이내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자신의 자리, 대상으로서 관찰되는 그 자리에 한번 와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선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화가 나고 당황스러울 때 어떤 표정과 행동을 취하는지 똑같이 말해준다. 엘로이즈는 묻는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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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전복이다. 엘로이즈는 시선이라는 권력을 자신도 똑같이 휘두를 수 있음을 마리안느에게 일깨운다. 우리는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되는 대상, 즉 객체가 뚜렷하게 구분돼 있다고 생각한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는 관찰의 주체이고, 초상화의 대상이 되는 엘로이즈는 객체일 것이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우리가 당연하게 상정하는 이 권력관계를 보기 좋게 뒤집어 놓는다. 나도 당신을 보고 있다고, 당신을 ‘대상화’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신화를 재해석하며 또 다른 권력의 전복을 보여준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그리고 엘로이즈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는 소피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오르페우스 신화를 읽는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사라지고 두 사람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세 여자는 오르페우스의 행동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말하며 열띤 토론을 벌인다. 왜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본 걸까. 엘로이즈는 말한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라고 했을 수도 있죠.’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는 철저한 객체였다. 죽음도, 부활의 기회를 얻게 된 것도, 그리고 그 기회를 영영 잃어 영원한 죽음과 이별을 맞이한 것도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녀를 부활시키고자 했던 것도, 다시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오르페우스였다. 그녀는 수동적으로 오르페우스에 의해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도록 유도하면서, 그 자신이 오르페우스와의 이별과 영원한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에우리디케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에우리디케 자신이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선택과, 그로 인한 이별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의 우정과 연대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 못지않게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세 여성은 신분을 넘어선 우정을 보여준다. 카드놀이를 하며 깔깔 웃기도 하고, 오르페우스 신화를 함께 읽고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를 향한 존중과 배려로, 이 세 여성은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함께 나눈다. 어느 날 밤에는 마을 여성들의 축제를 찾아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는 여성들을 함께 구경하기도 한다. 여성들만이 모인, 어딘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이 축제는 당대 현실을 살아가던 여성들의 연대와 해방의 공간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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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임신 중절을 도우며 세 여성의 우정은 더 깊어진다. 임신과 중절의 경험이 있었던 마리안느는 아이를 원치 않는 소피의 임신 중절을 돕는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임신 중절 시술을 받으러 가는 소피와 함께 길을 나서고, 그가 시술받는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그의 곁을 지킨다.


그날 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와 소피에게 제안한다. 임신 중절 시술을 받는 소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자고. 엘로이즈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한다. 일 순간 소피는 모델이 되고, 마리안느는 화가로서 그의 모습을 그린다. 엘로이즈는 오늘 자신이 봤던 그 순간을 기록하고자 한다. 소피의 임신 중절은 여성만이 견뎌내야 하는 괴로움과 고통인 동시에,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성의 주체적 선택이기도 하다. 엘로이즈는 이 여성이 겪어낸 일을, 이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려 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바라봤다. 대상화와 호기심의 시선에서, 존중과 사랑으로, 서로를 향한 시선은 점차 평등해지고, 따스해졌다. 그러나 초상화를 매개로 한 그들의 사랑은 초상화가 완성된 순간 끝날 수밖에 없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이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이 더욱더 쓰리게 다가온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말한다. 후회하지 말고, 이 순간을 기억하라고. 그래서 두 사람은 이별에 대한 생각을 떨쳐낸 채 서로를 향한 시선과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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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별 후에도 두 사람이 서로를 잊지 않았음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함께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서로를 잊지 않는 것, 아주 짧았던 사랑의 기억을 계속해서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이 두 사람이 내린 ‘선택’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시대와 세상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서로를 향한 마음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그들은 기꺼이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을 기록하고, 기억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시대적 한계로 끝내 이어지지 못한, 비극적 사랑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서로를 사랑한 것도, 헤어진 것도, 또 끝내 잊지 않는 것도 그들이 그들 자신과 서로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오르페우스와의 영원한 이별을 선택한 에우리디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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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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