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최선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게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6.21 17:1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최선'이 여러 층위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거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모든 허구의 세계관 혹은 현재 살아가는 단 하나의 유일한 세계관이 '최선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을 거듭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최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부수적인 개인적, 사회적 파급이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가치관들의 교착 상태 등에 대한 사려 깊은 논의와 숙고를 거치지 않고 최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때로는 아주 가볍게, 때로는 아주 위험하게.

 

프랑스의 대문호 볼테르의 대표작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그러한 최선에 대한 물음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여러 지점 혹은 시선에서 '세상이 최선으로 돌아가는가' 라는 명제에 관한 다면적(혹은 이중적) 사고를 암시한다. 특히 팡글로스라는 인물이 주창하고 견지하는 낙관주의의 명제와 논리는 사실상 선과 악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긴다. 선과 악이 분리될 수 없다? 선과 악이 서로를 위해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된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수많은 선 중의 최선만을 희구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도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가 다루는 내용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는 있으나, 장 그르니에의 <존재의 불행>의 특정 지점들을 살펴봄으로써 보다 수월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최선이 선의 적이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이다. 선이 많다는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고 선택한다는 것은 우선 스스로를 괴롭히고 고문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이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 하나를 택하고 나머지를 버린다. 선택하는 것, 그것은 선호하는 것이며 따라서 없애버리는 것이다."

 

<존재의 불행> 제 1부 '자연적 상관 관계'에서 나타나는 선악을 다루는 여러 관점들 중 하나이다. 최선이 선의 적이라는 발상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더욱 이목을 끄는 것은 수많은 선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단 하나의 선, 아마도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라고 여길 법한 것을 선택하는 행위가 나머지 모든 선을 없애버리는 결과로 이어지며 그 결과가 인간을 괴롭게 만들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뒤이어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아마도 훨씬 더 귀중한 다른 선들을 희생시켜가며 얻은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가장 좋은 것은 절대적이며 더 좋은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더 좋은 것은 가장 좋은 것을 그르치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지는지, 또 결국 이러한 시도의 총결산이 무엇이 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팡글로스와 캉디드가 끊임없이 주고받는 '모든 것이 최선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화들이 결국 한 지점으로 수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환상이다. 최선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최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인간이 분별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 될 것이다.

 

실제로 작품 초반부부터 팡글로스가 마치 세뇌시키는 자의 모습처럼 낙관주의의 여러 사례와 그 기저에 놓인 근거를 전달하고자 노력할 때 캉디드는 그것들을 모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체화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나쁠 때에도 모든 것이 선이라고 우기는 광기'라는 말을 통해 낙관주의를 재정의한다.

 

이러한 재정의는 사실상 최선의 재정의로 이어진다. 최선을 무엇이라 정의하기에 앞서 최선의 반대에는 최악이 놓여있는 것일까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팡글로스의 "특별한 불행들이 일반적인 선을 만듭니다. 그러니 특별한 불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은 더욱더 선이 됩니다." 또는 앞서 언급한 <존재의 불행>의 "이것이 최선이 선의 적이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이다."와 같은 말들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반대는 최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선과 악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음을 전제한 채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가 전개되었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어떤 양극의 순간에 놓이게 되더라도 항상 선과 악이 양면성을 가진 채로 공존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마땅하다고도 볼 수 있다.

 

최선이 다른 선들을 희생시킨다는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정확히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떠한 논리를 거쳐 최선이 여타의 선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최선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모든 선들을 희생시켜왔다는 사실에 문득 경악할 뿐.

 

캉디드 역시 본인이 최선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매순간 최선의 결과를 낳지 않았음을 깨닫고 난 후에도 그처럼 최선을 선택하고자 했던 지난 삶의 궤적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다른 선들을 희생시켰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선과 악이 세상에서 어떤 논리로 작동하고 있는지, 정말 분리될 수 없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알아야 할까? 물론 그것을 알기 위해 투쟁과 반목과 작척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가, 누구나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개인적인 지옥의 출현이 반복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도대체가 그 무엇 하나 결론을 안겨주지 못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선악에 관한 문제를 정의내리는 것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헛된 최선을 포기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렇기에 캉디드는 선악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이 그토록 가열차게 쏟아내는 말의 폭풍 속에서 나름의 지혜를 발견한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이 마지막 하나의 문장을 위해 달려가는 소설이자 콩트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꿔야 합니다."

 

주체성보다, 이성보다, 정원에서 자라날 수 있는 선악과에 담긴 가능성의 세계보다 감동적인 것은, 바로 우리의 정원은 최선의 상태에 놓인 정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선의 정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꿀 뿐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 희생되었던 수많은 선을 돌아보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 정원에 있다.

 

 

2024-06-21 20;36;58.PNG


 

 

유민.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6.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