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포하지 말아주세요! [사람]

글 입력 2024.06.1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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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한강 야경.jpg

 

 

“네 눈앞에 그 사람이 남편이야!” 얼마 전 드라마 ‘눈물의 여왕’을 보며 수십 번은 외친 말이다. 모든 드라마에는 ‘고구마’ 장면이 있다. 시청자도 아는 사실을 주인공만 몰라 고구마를 입에 욱여넣은 듯 목이 탄다. 극이 전개되려면 꼭 필요한 장면이지만 매번 답답함을 느낀다. 고구마 장면을 애써 회피하는 이유다.


“이 장면 끝나면 말해줘.” 답답함을 참지 못해 거실에 함께 누워 드라마를 시청하던 오빠에게 투덜거린다. 고통을 감내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얼른 진실이 밝혀져 행복한 엔딩을 마주하고픈 생각뿐이었다. 결국 습관처럼 ‘스포’를 갈구했다.


입사 후 맞이한 첫 번째 휴가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추억에 젖어 바다를 그려보겠다며 4B 연필을 잔뜩 구매했다. 한달음에 고속열차를 예매해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스포에 길들여진 나머지 바다의 물결을 표현하기도 전에 그림 그리기를 관뒀다. 눈 감았다 뜨면 파도치는 바다는 물론 떠오르는 해의 모습까지 완성돼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리고 지우는 과정 없이 결과는 없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맞이한 휴가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이 야속하면서도 결과만 좇았다는 사실이 속을 썩 불편하게 했다.


스포를 멀리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퍼뜩 예전 기억이 떠올라 서둘러 일기장을 펼쳤다. 지난해 참가한 ‘한강 나이트워크 42K’ 행사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강 둘레 15km를 새벽 4시간 동안 걷는 행사였다. 완주했다는 결과보다 순간순간의 장면이 일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길 것 같던 4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간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걷는 동안 눈에 들어온 한강의 새벽 풍경 때문이었을까. 한강 물에 비친 동작대교와 서울의 건물은 반짝반짝 빛났다. 행사가 끝나갈 즈음에는 영화 같은 풍경을 다 보아 간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순간이 생생히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날의 기억은 일기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그 이후부터 꾸준히 과정에만 담길 수 있는 감성을 일기에 듬뿍 녹여 적어 내려갔다.


일기엔 천천히 바라본 다양한 장면을 싣곤 한다. 회사 정문을 향해 아무 생각 없이 뛰어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바라본 아침 풍경을 담는다. 아주 가끔은 자료를 제때 주지 않는 협력사를 탓하는 글을 마구 적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앞만 바라보다 놓친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 한 폭씩 일기에 담긴다. 일기가 자칫하면 사라질 과정의 기억을 잡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기를 쓰며 매듭짓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과정을 곱씹으며 시작한 일을 책임지고 끝까지 해내기로 결심했다. 결과가 궁금해 힐끗힐끗 스포를 들여다보고 싶어도 꾹 참고 과정을 둘러보기로 했다.


결과만 좇아 달리면 과정에서 만나는 하나하나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풍경이 훼손되고 만다. 문득 떠올리며 곱씹어볼 수 있는 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기-승-전’이 없으면 ‘결’도 없다. 결말만 고대하며 스포를 재촉하기 전에 과정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김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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