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줄기 초록을 좇는 ‘녹색광선’ [영화]

글 입력 2024.06.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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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붉은빛을 퍼뜨리며 하강하는 태양을 볼 때, 하루가 마무리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매일 저녁 마주하는 노을이 그렇다.


만약 태양이 녹색 빛을 뿜으며 자취를 감추면 어떨까? 쉽게 상상되지 않을 수 있지만, 가능한 일이다.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붉은빛 태양이 푸른빛 바다와 만날 때, 초록이 일직선을 그리며 빛나는 인상적인 장면이 완성된다.


영화 ‘녹색광선’은 이 찰나의 순간을 소재로 프랑스 여성 ‘델핀’이 마음속 깊은 구멍을 조금씩 메워가는 여정을 그려냈다. 영화에서 어떻게 델핀의 모습을 연출했는지, 델핀의 모습을 어떻게 녹색광선이라는 소재와 연결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풍경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주인공 ‘델핀’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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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을 다녀왔을 때 느낀 점은 프랑스 사람들이 바캉스에 참 진심이라는 점이다. 장사로 생계를 잇는 자영업자라고 하더라도, 성수기고 뭐고 2주 가까이 되는 내 휴가를 후회 없이 누리길 선택한다. 영화의 주인공, '파리지앵' 델핀도 쌈빡한 바캉스를 떠나려다 실패해 상당히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사실은 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속상함보다도 자신이 만나던 연인과 관계가 사실상 끝을 맞았다는 사실이 우울감을 크게 자극한 상태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주인공의 심리가 영화 전체를 끌고 간다는 점이다. 바캉스/여행을 다룬 다른 많은 작품들은 여행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연, 풍경 등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녹색광선은 이런 새로운 환경들에서마저 우울감을 내보이는 델핀의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델핀은 어딘가 결핍돼 있다. 자꾸만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자신에게 불쑥 찾아오는 허망함을 숨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델핀이 우울감에 계속해서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더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들어찬 빈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 몰라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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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바캉스를 즐기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지만, 정작 그 친구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여행에 동참해도 그 상태가 변하질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대의 호감을 뿌리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눈물 흘려가면서 고통스러워했던 문제의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영화에서 델핀은 비건인으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설파하고, 자연과 계속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녹색이라는 영화의 키 컬러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고, 동시에 이런 자신만의 크고 작은 철칙들이 있음에도 정작 스스로를 지탱할 심지를 갖추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미장센이 보여주는 델핀의 감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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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는 유독 인물 간의 대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내 영화의 유일한 음악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는 음악"이라는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철칙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음악'을 삽입한 영화가 바로 녹색광선이다.


인물 간의 대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감독의 현란한 스킬에도 불구하고, 가끔 '아, 내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구나'를 실감하게 하는 순간들은 모두 미장센과 관련이 있었다.


자못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영문 모를 카드를 줍는 델핀의 모습, 그저 해변가를 걷던 것뿐인 델핀이 작가 '쥘 베른'의 책 '녹색광선'을 읽고 난 후 감상을 전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델핀의 모습이 그렇다.


이런 장면들이 이질적이고 뜬금없어 보이는데, 백마탄 왕자님을 기다리듯 우연을 선망하는 델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매개체라고 느꼈다.

 

 

 

제목 ‘녹색광선’이 갖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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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광선이라는 제목은 강한 임팩트를 준다. 단어가 주는 시각적인 힘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감독도 이걸 인지하고 있는지 영화 곳곳에 제목과 연결되는 색감을 많이 담아뒀다.

 

그중에서도 녹색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건 일몰의 순간,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해가 만드는 녹색광선이다.


언뜻 영화에서 만든 용어 같은 이 단어는, 사실 동명의 책에 근원을 두고 있다. 바로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책이다. 책에서도 녹색광선은 주인공 캠벨의 선망이 대상으로 자리한다.


"전설에 따르면, 녹색 광선은 그것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 속에서 더 이상 속지 않게 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광선이 나타나면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단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이 녹색광선을 결핍에 시달리던 델핀에게 깨달음을 주는 소재로 선택했다. 러닝타임 내내 시든 풀 같던 델핀이 거의 처음으로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변, 특히 역사에서 마주친 새 인연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영화 속 델핀이 보이는 태도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어서인지, 이 녹색광선이 주는 깨달음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원작인 책 녹색광선에서도 정작 캠벨의 연인은 녹색광선을 함께 마주 보는 대신, 미처 녹색광선을 알아보지 못하고 서로의 눈빛을 알아보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다.


감독이 부러 이러한 결말을 택하지 않은 데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녹색광선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의존해 내 옆의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듯한 모습을 통해 델핀이 아직은 스스로 문제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 걸음마를 떼는 단계에 있다는 점을 부각했을 수도 있다.


상대에게 델핀이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그와 호감을 쌓아가는 장면에서 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면? 비록 클리셰라 느껴질 지라도, 그편이 앞서 몇 차례 같은 형태로 고통스러워하는 델핀의 모습에 지친 관객들이 의도한 메시지를 더 쉬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광선이 의존 대상이 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은, 델핀에 우리를 대입해보라는 의미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주변의 ‘녹색 광선’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그것에 의존하고 있을까?

 

 

[김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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