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사라질 때까지

글 입력 2024.06.1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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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어린아이이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약점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옛 시골을 배경으로 전개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과거가 아닌 오늘날에도 어느 동네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상이다. 원미동 똑똑이나 원미동 가수, 원미동 멋쟁이 같은 인물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과도 같다. 소설은 소시민들의 동네에서 그들이 무척 경멸하는 인물에 대해 알려준다. 그 인물이 바로 원미동 시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아 나는 작품 속 원미동 시인 또한  언제 어디서나 현실에 존재할 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 폭력을 이기는 순수함


 

<원미동 시인>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사람은 많다. 우선 소설 속 중심인물인 경옥이 그렇다. <원미동 시인>에서는 아빠와 엄마의 싸움으로 익숙하게 집을 나서고 그 공간을 들어가지 않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 어린아이가 바로 경옥이다.

 

몽달씨도 아이인 경옥처럼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원미동에서는 몽달씨에 관한 소문이 경옥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자자하다. 몽달씨가 그것을 모르는 것 또한 아니다. 이웃들에게 이유 없이 손가락질 당하는 몽달 씨는 김반장의 일을 돕는다. 몽달씨의 독특한 점은 그가 항상 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인물의 모습이 몽달씨만이 가지고 있는 그의 순수함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다만 그러한 몽달씨의 순수함은 결코 득이 되지 못한다. 소설에서 경옥이는 이렇게 말한다.

 

  
“몽달씨가 거드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김반장은 더욱 의젓해지고 몽달씨는 자꾸 초라하게 비추어지는 게 나에겐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양귀자, 원미동 시인 96페이지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몽달씨를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몽달씨는 그 시선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몽달씨가 김반장의 일을 도왔음에도 초라하게 보였던 이유는 도움을 받았던 김반장조차 몽달씨를 폭력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원미동에서 몽달씨를 진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려주지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원미동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범주 안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경멸한다. 나는 이러한 부분이 우리 사회의 단면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소설 밖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그들의 기준을 만든 뒤 그 기준을 넘지 못하면 남은 사람들을 패배자로 간주한다. 하지만 몽달씨가 경멸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순수했던 이유는 그가 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미동에서 몽달씨만이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나는 몽달씨가 간직한 시들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들이라고 보았다. 김반장은 항상 몽달씨가 들려주려는 시를 거부하고 자리를 피한다. 처음에는 경옥이도 마찬가지로 김반장과 같이 시를 들려주려는 몽달씨를 피하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몽달씨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시를 귀담아 듣는다. 나는 이 장면이 원미동에서 몽달씨만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을 경옥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몽달씨가 들려준 시를 경옥이는 기억할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시 읽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순수함을 잊지 않은 채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 느꼈다.

 

 

 

2. 이웃들의 위선


 

원미동에서 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를 꼽자면 ‘이웃들의 위선’을 들 수 있다. 원미동 사람들은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본인이 위협받지 않는 위치에 놓여있을 때뿐이었다. 원미동 사람들은 관심이 필요할 때 무심하고 무심해야 할 때 관심을 준다.

 

소설 후반부에서 원미동 사람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몽달씨가 폭력배들로부터 이유 없이 맞고 있었을 때 이웃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지 선뜻 나서지 않았다. 주씨 아저씨를 불러온 것도 경옥이 뿐이었다. 폭력배들이 도망친 후 한 명씩 말을 보태며 소란스러워지는 원미동의 모습은 그들의 위선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김반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선에 찌든 인물이었다. 슈퍼에 들어온 몽달씨를 매몰차게 모른 척 했으면서 폭력배들이 도망친 후 몽달씨를 위하는 척하는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몽달씨는 왜 김반장의 모습을 기억하면서도 전과 다름없이 대했을까? 몽달씨의 행동은 내게 한 가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으며 ‘만약 몽달씨가 김반장의 민낯을 원미동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경옥이가 몽달씨 대신 김반장의 민낯을 말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을 세웠다. 이웃들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만약 김반장의 민낯을 이웃들에게 말했더라면 원미동 사람들이 경멸하는 건 몽달씨가 아닌 김반장이 되었을 것이다. 몽달씨도 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 역시 몽달씨였다. 

 

나는 그 이유가 원미동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원미동 사람들은 몽달씨가 폭력배에 맞고 입원해있는 동안에도 위선을 떨고 자식 자랑을 이어갔다. 그들은 바뀌지 않았다. 원미동 사람들이 몽달씨가 아닌 김반장에 대해 이야기해대면 그 폭력의 무게는 고스란히 김반장에게 돌아간다. 몽달씨는 지금껏 자신이 받아온 경멸과 무시, 그것에서 비롯된 폭력의 형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외면한 김반장이라 하더라도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폭력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폭력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건 몽달씨였다. 원미동 사람들의 위선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몽달씨가 경옥이에게 시를 들려주듯 경옥이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시를 들려주고 그것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폭력의 굴레가 멈추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 비폭력이다. 몽달씨가 시를 읽어준 것처럼, 나도 글을 쓰고 싶다.

 

 

[김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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