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on] 늦바람이 무섭듯이 늦더위도 무서워 – 영화 <늦더위>

영화 <늦더위>의 주인공 동주와 함께하는 비청년의 우울 극복기
글 입력 2024.06.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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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리는 중2병. 보통 중학교 2학년이 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거나 자신의 sns에 오글거리는 글을 적곤 하기에 이 시기를 중2병이라 부른다. 어른이 되고 나서 오랜만에 접속한, 지금은 유행이 지나버린 sns에서 어린시절 패기가 잔뜩 담긴 자신의 글을 읽는다면 낯부끄러움에 애꿎은 이불에 화풀이하겠지만, 그것으로 트집을 잡을 이는 아무도 없다. -놀려대기는 하겠지만- 어린아이가 치기를 부리는 건 당연하고, 누구나 이런 시기를 겪기에 중2병은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며 자아가 형성되는 자연스러운 시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는 대2병이 있다.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미국의 단어에서 유래된 말로 한국에 들어올 때는 기존에 널리 알려진 중2병과 비슷한 형태로 의역되었다. 대2병이라는 단어는 한국에 상륙하자마자 수많은 대학생의 공감을 샀는데, 대학생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청년을 다룬 기사, 청년을 타겟으로 한 홍보물, 심지어 논문의 주제로 다뤄지기도 했다. 대2병이 발병하는 –실제 질병은 아니지만- 매커니즘은 중2병과 유사하다. 중2병과 대2병 모두 미성숙한 존재가 새로운 세상, 환경에 적응하며 겪는 부침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한 사람이 중2병과 대2병. 모두에 시달리기도 한다. 중2병을 겪는 아이들은 요람에서 자라다 처음으로 냉혹한 세상을 마주했기에 그 불만을 외부로 표출한다. 그러나 이들은 입시를 치러야 하기에 속으로 화를 삭힐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면 마주할 새로운 세상을 고대하며 번데기 시절을 보내지만, 막상 우화 끝에 나온 세상은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더 실망스럽기에 다시 우울감에 빠져든다. 이것이 중2병과 대2병의 연관 작용이다. 이 두 가지 비관적 용어들은 분명히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시도는 꽤나 귀찮은 일이기에 그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고 개인의 회복 탄력성에 의지하는 형국으로 흘러간다. 그저 모두가 시간이 흐르면 괜찮을 거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좋다. 시간이 흘러 중2병과 대2병을 겪던 한국의 평범한 사람 A는 대학도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면 이제 불안의 굴레는 끝인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만족하고, 주어진 환경에 행복을 느끼는가? 단편적으로만 생각해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대2병이라는 용어로 우울감이 형상화된 20대보다 30대 이상의 자살율이 –노년층을 빼더라도- 더 높은 것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대 시절의 우울과 20대 시절의 우울은 중2병과 대2병이라는 용어로 대변되기에 사회는 이들의 불안을 인식한다. 그러나 30대 이상의 연령층이 겪는 우울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청년이 겪는 불안에 대해서는 미약하게나마 제도적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지만, 청년 인식표를 뗀 30대 중반 이후부터는 남의 나라 국민 보듯 방치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서한솔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늦더위>는 앞서 기술한 사회문제에 대해 차분하게 질문을 던진다. 10대는 아이들이니까 그럴 수 있고, 20대는 대학에 다니고, 청춘이니까 괜찮다. 그렇다면 30대는 어떠한가. 이 사회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불안을 겪는 30대를 어떻게 다루고 인식하는가. 그리고 당사자는 자신의 상태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러한 가시 돋친 질문을 너무나도 담담히 영화 속에서 풀어내었다. 남들보다 다소 늦게 더위를 먹은 영화 <늦더위>의 주인공 동주의 삶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 세대의 흐릿한 우울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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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꽃 도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서른두 살 청년이다. 성실한 모습이 직원에 눈에 들어와 정직원 제안을 받지만, 그는 공무원 준비, 취업 준비를 핑계로 고사한다. 이 내용으로 극의 첫 번째 시퀀스가 구성되었다. 이는 동주의 캐릭터성과 여행을 떠나게 되는 동기 정도를 설명하는 시퀀스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청년 세대의 딜레마와 그것에서 비롯된 기성세대의 갈등이 담겨 있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청년 세대의 딜레마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현대 한국의 취업난은 대공황이나 IMF 위기에서 비롯된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순수하게 노동만을 위한 일자리는 차고 넘치는 상태이며, 그렇기에 대부분 중소기업은 구인난에 시달리는 것이 현실이다. 즉, 현대의 취업시장은 구인난과 취업난이 혼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청년들은 이러한 취업시장 구조를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자신이 정해놓은 –외재에서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것도 포함하여- 기준에 부합하는 일자리에만 지원할 뿐, 성에 차는 일자리가 없다면 곧바로 아르바이트로 선회한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취업시장의 현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일자리가 있는데 일을 안 하는 청년의 딜레마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를 비판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모습으로 현실과 미디어 전반에서 의견을 개진한다. <늦더위>의 첫 번째 시퀀스에는 이러한 딜레마와 갈등이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정직원 제의를 거절한 동주는 동료 여직원이 주선한 소개팅에 나가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험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을 꽃 도매 회사 직원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이 소개팅은 회사 상사의 지시하에 주선된 소개팅이었기에 동주가 자신을 아르바이트가 아닌, 직원이라고 밝힌 사실이 상사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 딜레마에서 비롯된 갈등은 동주가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상사와 나눈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상사는 계속해서 공무원 시험 장수생이라는 신분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하며 동주를 압박한다. 이전의 상황과 달리 동주가 자신의 상황을 ‘숨겨야 하는 것.’으로 인정한 것이 드러났기에 동주는 기성세대의 공격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청년의 딜레마를 몸소 느낀 동주는 차 문을 열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며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만다. 이 장면은 근현대 한국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자칫 동주의 이중성만을 비판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한국의 청년들은 유아기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청년이 되고 나서도 타자에 의해 직업 선호를 강요받는다. 예를 들어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각종 전문직, 공무직과 같은 선호 직업이 주변 사람들과 교육자, 미디어를 통해 칭송되기에 어린 시절의 청년들은 이런 목소리에 저항 없이 휘둘려 삶의 목표를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묵혀온 목표를 단기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에서나 쉽게 다뤄질 뿐, 본인에게는 중대한 결정이기에 청년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의 희생자인 동주는 자신이 딜레마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한술을 더 떠 이러한 문제가 사회에서 비롯된 게 아닌 자신에게 있다고 치부한다. 이는 동주의 여로가 자신의 삶을 역행하는 동선으로 짜인 것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사회가 안긴 압박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 채,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떠난 동주의 여행에 동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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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여행은 자신의 본질을 깨달아 우울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자가 치료 행위이다. 앞서 동주가 직면한 문제의 원인이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지만, 동주는 여타 청년들처럼 이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기에 삶을 역행하며 스스로 반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에 여행의 초입에서 관객은 ‘동주’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을 면밀하게 확인할 수 있다. 동주는 전 애인을 찾아가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다가 그녀에게 혼나기도 하고, 차를 끌고 온 군대 후임에게 맥주를 같이 마시자며 떼를 쓰기도 한다. 동주는 과거에 친밀했던 인물을 다시 만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시간이 되어 인물이 떠나고 홀로 남게 되자 자신의 현실을 더욱 처절하게 직면하게 된다. 외로움과 회의감이 동주에게 밀려들었고, 동주가 할 수 있는 것은 불쾌감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동주는 전 애인을 만나 그녀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고, 군대 후임을 만나 자본과 지위의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지 과정은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재확인하는 것뿐이다. 은연중에 느끼던 자신과 다른 청년들 사이의 격차를 몸소 체험한 것에 불과하다. 정리하면, 동주가 이들을 만나려고 했던 동기는 순수했고 답답한 현실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희망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과는 음울한 현실을 다시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이를 통해 동주는 변화의 첫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전 애인은 동주에게 솔직해지라고 말한 뒤 자리를 뜬다. 그녀는 동주에게서 멀어지며 슬픔이 느껴지는 오묘한 표정을 짓는데, 필자는 이 연출이 동주의 행복을 바라는 전 애인의 마음을 미세하게 표출했다고 본다.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있는 생각을 가감하지 않고 말하는 행위. 마음 건강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태도이지만, 관계를 맺을 때는 간혹 방해되기도 한다. 이는 서른두 살을 맞이한 동주가 갖추어야 할 변화의 힌트가 된다. 감독은 이 시퀀스를 통해 어린 시절에는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찾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행복이 존재하는 위치도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주는 전 애인과 군대 후임과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행동으로 실천한다. 동주는 공원에서 농구 하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코트에 낀 공을 빼준 것을 계기로 아이들과 농구를 하며 친해진다. 동주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편의점에 간 사이, 아이들이 나눈 대화에서 앞서 언급한 감독의 의도가 재확인된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다니는 동주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동주에게 직접 왜 혼자 다니는지 묻기도 한다. 이제 행복이 관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동주는 그저 웃으며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권한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는 서른두 살 청년 동주의 성장을 보여준다. 이 부분부터 동주는 관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선택하며 능동적인 태도를 지닌다. 게스트하우스 저녁 식사에서 만난 스무 살 시인과 스스럼없이 친해지며, 자신의 지위나 경제 상황을 탓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술에 취한 시인은 동주를 형처럼 편하게 부르고 동주는 전형적인 연장자의 말투로 시인에게 충고를 건넨다. 나이에 따라 서열이 갈리는, 흔한 남성끼리의 대화이지만 영화 초반부에서 드러난 동주의 캐릭터성에 비추어 봤을 때는 가시적으로 나타난 큰 변화이다. 영화 후반부는 관계성에서 비롯된 압박을 풀어헤친 동주가 자신의 자아를 본격적으로 찾는 양상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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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고향인 청주를 다음 여행지로 정한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거주 중이지만 사실상 절연 상태이기에 친척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동주는 중학교 동창들을 불러 모아 술자리를 갖는다. 소개팅 때 꽃 도매 회사의 직원이라고 자신을 속였던 과거와 달리, 중학교 동창들에게는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사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밝힌다. 동주의 개인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자, 영화는 청년들이 직면한 공통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동주와 친구들은 어릴 적과 현재를 비교하며 상상했던 모습대로 성장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현실에서 이러한 주제가 다뤄지는 방식처럼, 영화에서도 술자리 이야깃거리로 소비되는 방향으로 연출되었는데 이러한 방식 덕분에 시의성이 크게 두드러지는 효과가 야기되었다. 한창 술을 마시던 중 친구 중 한 명이 밖으로 나가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는다. 동주는 친구를 찾으러 밖으로 나서고 친구들은 동주가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이라며 그저 술잔을 기울인다. 동주가 짝사랑했던 친구를 따라 밖으로 나서면서 친구들은 각박한 현실이 아닌, 천진난만했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술에 취해 밖으로 나간 친구는 꽃을 찾아 동주에게 보여주고 동주는 그녀에게 꽃을 심은 화분을 선물해주리라 약속한다. 꽃을 좋아하는 친구의 욕구, 과거에 짝사랑했던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동주의 욕구. 이런 개인적인 욕구들이 이 시퀀스에서 발생했기에 관객은 다음 시퀀스에서 이러한 욕구들이 해결될지 귀추가 주목되었다. 게다가 동주와 친구들은 다음날 등산을 가자고 약속했기에 인물의 개인적인 욕구가 충족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으나, 약속 시간에 산에 도착한 사람은 동주 한 명뿐이었다. 짝사랑했던 사람에게 꽃을 선물해주고픈 욕구, 친구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픈 욕구가 무산된 동주는 홀로 산에 오른다. 그곳에서 과거 초등학교 담임으로 추측되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자신의 담임선생님이 맞는지 확인하지만, 할머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인연을 확인하고자 질척댈 정도로 질문을 이어간 동주와 흘러간 인연에 집착하지 않는 할머니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여행의 종착지에서 깨달음을 재차 확인한 동주는 절연한 부모님 집에 몰래 찾아간다. 과거의 동주였다면, 어떤 방식이든 부모님과 만나며 관계를 재확인했을 테지만, 여로를 통해 성장한 동주는 부모님과 마주하지 않고 시계에 숨겨진 씨앗을 훔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집에 도착한 동주는 부모님 집에서 훔쳐 온 씨앗을 자신의 화분에 담아 물을 주고 미래의 희망을 기약한다. 동주는 여행을 통해 행복으로 향하는 몇 가지 방법을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고 흔들리는 일도 많았지만, 결말을 통해 우울에 대처하는 방법을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늦더위>는 개인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행을 채택한 청년의 모습을 흥미롭게 그려내었다. 시의성이 훌륭하기에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화였다는 점, 섬세한 연출과 정감 가는 배우의 연기가 어우러져 웰메이드 독립영화라 칭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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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는 사회의 문제로 인해 야기된 개인의 고민과 불안을 개인 스스로가 해결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현대 한국에서는 지위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차별이 두드러지며, 사회는 이를 전혀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인된 미디어가 선입견과 혐오를 강화하는 콘텐츠를 막대하게 생산하는 행태를 보인다. 청년 고독사 비율이 나날이 늘어나는 와중, <늦더위>의 동주처럼 자기효능감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년의 모습은 곧 스러질 갈대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동주는, 감독은 이 서사를 통해 자그마한 희망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준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 깊은 곳에 숨은 행복을 깨닫길 바라는 마음이 영화 곳곳에 베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늦더위>와 이 글을 통해 30대의, 그리고 비청년의 우울과 불안이 중2병과 대2병처럼 주목받게 되었으면 한다.

 

 

[김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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