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과 베르나르 뷔페

글 입력 2024.06.1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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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의무적인 일이며, 작업은 창조적인 노력이고, 행위는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하에 함께 경주하려는 노력이다.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행위를 ‘악의 평범성’ 이론으로 풀어내 이름을 떨친 한나 아렌트는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의 조건과 의미를 노동, 작업, 행위의 삼중구조로 설명했다. ‘인간성의 상실과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한 비인간화 인간’을 그림으로 표현한 프랑스 화가 베르나르 뷔페의 인물화를 보면 한나 아렌트의 인간 조건에 대한 고찰을 떠올리게 한다.

 

파리를 근거지로 한 베르나르 뷔페 (Bernard Buffet, 1928-1999)는 수많은 인물화를 남겼다. 그의 인물화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윤곽을 표시한 검은색의 굵은 테두리와 어딘가 기괴해 보이는 형상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내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고 궁핍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기술의 등장으로 의무적인 일을 반복하는 노동자로 전락해버린 황폐한 내면을 그림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뷔페의 그림들이 가진 형상이 아닌 그 피사체 너머의 감정들을 파헤치고 싶어진다. 그래서 인물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인물들도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 않다. 뷔페는 인간 실존에 대해 고민했고 그 고민의 흔적들은 그의 그림들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기술의 등장으로 숭고한 인간의 노동은 ‘자동화’로 대체되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을 물질적으로, 내면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고 산업화로 인간 실존은 흔들렸다.

 

뷔페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이다. 그럼에도 20세기 사회상은 묘하게 지금 우리의 시대적 고민과 겹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이 역할 상실에 대한 고민은 현재에 더욱 유효하다. 우리 인간은 왜 노동하는가? 노동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기는 실로 어려운 것일까? 노동 자체에 우리의 능동적이고 보다 창의적인 노력을 더하려는 행위의 의미는 없는가? 인간보다 더 똑똑한 AI와 경쟁하며, 사라지거나 대체되는 인간의 일로 고민이 깊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담론이다. 혼란의 시기에,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도 마음은 가난한 이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통찰은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상과 프랑스 천재 화가 뷔페의 그림에서 표현되었다.

 

아름답지만 거칠고 사나운 그림의 질감에서 고독한 그의 인생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는 생전 당대 최고의 프랑스 천재 화가로 평가받았다. ‘피카소가 질투하고 앤디 워홀이 칭송한’한 화가였으며 20세에 프랑스 최고 비평가상을 받고 단번에 스타가 되었다. 화려한 수식어와 어린 나이에서부터 받은 관심과 대비되게 그의 내면은 늘 고독했고 외적으로는 시대적인 급변을 마주하고 있었다. 입체파 화가로 대표되는 피카소와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추상회화 사조가 득세하던 20세기에 뷔페는 일관되게 구상회화만을 고집했다. 구상회화는 현실 세계의 대상 혹은 실재할 법한 대상을 작가 자신 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빠른 성공과 몰락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구축해왔기에 그만의 방식으로 대상들을 창의적으로 재편한 그림들의 의미는 더욱 숭고하다. 베르나르 뷔페는 살아있는 동안 8,000작의 유작을 남기며 다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화, 회화, 드로잉 등 매체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그의 내면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림을 통해 뷔페의 삶을 그리고 그의 동시대 삶을 살았던 인간상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림은 단지 느끼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작가 자기 삶과 인간 자체에 대한 고찰을 담은 그림들을 통해 우리가 예술을 탐닉하는 이유는 선명해진다. 모든 그림과의 대화 끝엔 작금의 세태 속 나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세계 속 ‘나라는 작은 존재의 의미와 세계와의 관계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우리는 ‘커다란 바닷속 항해하는 작은 배’라는 뷔페의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명을 준다. 우리는 항해를 항상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진짜 감정은 숨긴 채로 항상 웃어야 하는 광대와 같은 내면을 갖지는 않았는지, 혹은 가면을 쓴 다른 얼굴로 사회에 나를 내놓고 있지는 않은지, 공허해 보이는 그의 인물화 속 동공은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뒤엉킨 무한한 경쟁 시대의 어쩌면 괴물 같은 우리를 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익숙한 듯 새로워 보이는 일상의 사물들, 외면받은 인물들, 풍경들에서부터 그의 최고의 뮤즈였던 아내, 문학과 철학, 종교를 예술로 형상화한 그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죽음을 앞두고 남겼던 죽음에 대한 의미를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그림들은 9월 1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신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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