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지은 집 -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 [공연]

확신을 넘는 이해에 관하여
글 입력 2024.06.2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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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들어서면 무대 위에 세워진 하얗고 각진 한 가정집의 골조가 보인다. 골조 안의 테이블, 소파, 서랍 같은 가구 몇 개 만으로도 무대 위 공간이 누군가의 ‘집’이라는 것은 바로 알겠다. 하지만 벽지에는 무슨 무늬가 있었는지, 커튼은 무슨 색이었는지 묻는다면 관객은 알 수 없다. 일상에서 매일 보는 공간이기에 무대 위 장소를 쉽게 '집'이라 인식한 관객들은, 새삼스레 물어보기 전까지 골조 사이사이 빈 공간들을 모른다고 자각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다고 여기는 대상을 대하는 확신 어린 태도이다. 엄마인 미옥이 자신의 아들 진우에게 보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신경 쓸 겨를 없이 분주하게 등교 또는 출근을 준비하는 익숙한 아침 풍경 속, 미옥의 아들 진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선다. 곧이어 진우가 미옥의 자동차로 등교 중인 초등학생 두 명과 학부모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누가 봐도 익숙하지 않은 일을 저지르면서 미옥의 익숙함에서 기인한 확신은 산산조각 난다. 그렇게 미옥이 아들에 대해 가진 인지의 골조 사이 빈 공간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는 '착하고 바른' 줄로만 알았던 아들의 잔혹한 이면을 마주한 엄마가 아들이 저지른 범죄를 막기 위해 계속해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는 타임루프 물이다. 엄마 미옥은 아들 진우를 막고자 자동차 열쇠를 미리 숨겨도 보고, 직접 애원하고, 설득도 해 보지만, 사건을 막기는커녕 계속해서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진우의 모습만을 마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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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극단 산수유의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김나영 작, 류주연 연출)은 온라인 플랫폼 '플레이 슈터'에서 실황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상대의 방 문을 여는 일


 

각자의 방 안에서 등교 준비를 하는 아들과 출근 준비를 하는 엄마. 입고 나갈 검은 셔츠를 찾는 아들과, 아직 빨지 않았으니 다른 옷을 입고 가라는 엄마의 낯설지 않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화 내내 서로를 마주 보지 않는다. 말을 하는 쪽이 자신의 방 문을 열고 상대방의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소리치는 형태이다. 자신이 말하는 바가 상대에게 전해지긴 했으니 대화는 큰 문제 제기 없이 끝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상대방의 방 문을 열어보진 않는다. 진우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은' 경찰은 두 사람의 집 문을 두드리고, 진우의 방 문을 열어본다. 역시나 사건에 대해 알고 싶은 유가족과 희생자의 친구들은 두 사람의 집 창문에 벽돌까지 던져가며 그 속을 들여다보려 한다. 미옥과 진우가 서로에게 보이던 태도와는 상반된다.

 

객석에서 보면 집의 골조 사이로 두 사람의 방 안이 훤히 보인다. 두 사람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관객까지도 두 사람의 방의 내부와, 진우는 무슨 생각을 자신의 노트에 썼는지 그 내면의 생각들을 골조 사이로 볼 수 있다. 어쩌면 빈 골조는 미옥과 진우의 내면의 착시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의 시선과 같이, 굳이 문을 열지 않아도 서로를 다 들여다보고 있다는, 문을 열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옥의 ‘내 아들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말처럼.

 

방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쌓아 온, 빈 틈이 많은 인지의 골조를 파괴하고 싶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마침내 미옥이 진우의 방을 열어보는 것은 진우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는 진우와 다른 진우를 사회에 만들어 낼, 진우의 유서를 숨기기 위해서이다. 경찰과 미옥이 이야기를 나누며 미옥의 기억 속 진우와 타인이 밝혀내는 진우의 모습 사이에 균열이 생겨나갈 때, 진우는 그 옆에서 여유롭게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미옥과 경찰의 긴박한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평화로운 진우의 모습이 주는 생소함은 미옥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의심만큼이나 관객에게도 이들이 상대방의 문을 열지 않았을 모든 순간들을 새로이 돌아보게 만든다. 한 컵의 물이 식물을 한 순간에 눈에 띄게 자라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며 물을 주는 순간이 쌓이고 쌓인다면 이는 단단한 나무를 자라게 하기에.

그렇다면 어떤 순간들이 쌓여 인물들 사이에 단단한 격차와 증오를 만들어냈을까.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


 

작품의 제목에서 사용된 ‘당신’이라는 지칭이 눈에 띈다. 단순히 엄마 미옥만을 의미하지 않는 듯한, 포스터와 공연을 마주할 모든 관객을 향해있는 듯한 지칭은 작품 속 인물들의 태도로 구현된다. 미옥은 가족으로서 아들에 대한,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 밀접하고 개인적인 기억이라는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작 극이 진행될수록 다른 사람들이 아는 진우와는 명백하게 어긋난다. 경찰의 경우 직업이 가진 이미지와 맞물려, '죄 없는 아이들을 희생시킨' 진우의 행위와, 진우의 계획을 알고도 '자동차 열쇠와 유서를 숨긴' 미옥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의문을 합당한 근거를 들어 지적하는 듯싶다.

 

그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진우의 행위를 따라가는 듯 싶다가도, 곧이어 진우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즐겨 읽었다는 이유로 저자의 소아성애적 성향을 쉽게 진우와 연관 짓고, 미옥과 진우의 가정사를 추측하여 미옥에게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합당한 논의는 일방적인 분노로 변모해 버린다. 이는 어쩐지 오늘날 sns와 인터넷 댓글에 나타나는 발화의 양상을 닮은 것도 같다.

 

두 사람이 각각 애정과 정의라는 명목을 극단으로 몰고 가며 혼란을 일으킬 때, 사건의 피의자인 진우가 직접 목소리를 낸다. 일상 속에서 자신이 이해받지 못했던 기억들을 구체적 순간들과 그 순간의 정서와 함께 쏟아붓는다. 하지만 진우의 주장 역시 머지않아 니체의 저서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확증 편향적 읽기를 통한 기성세대 전체에 대한 무차별적인 분노로 바뀌면서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다. 진우의 파괴적인 행동,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인물들 사이의 격차의 원인은 명쾌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모든 객석의 '당신'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소 성급한 스페어 키


 

미옥은 진우가 저지른 비극을 끝내는 방법을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찾아낸다. 미옥이 진우를 자신의 사고방식과 규칙 속으로 데려오려 애원하는 대신, 처음으로 자신이 진우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자신이 보기엔 칙칙해 보이는 검은 셔츠를 입겠다는 진우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해주는 것. 진우가 추구하는 ‘파괴를 통한 초극’을 함께 하는 것. 동시에 미옥은 깨닫는다. 진우가 타인이 아닌 자신을, 자신과 함께하는 지금의 관계를 파괴하고 벗어날 때 죄의 반복은 끝날 수 있다고. 미옥은 집을 떠난 큰아들 현우의 성 지향성을 인정해주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남겨놓은 빈틈마저 견고하게 유지하던, 자기 자신의 사고의 골조를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다.

 

곧이어 자신이 모르던 진우의 모습을 부정하던 것을 넘어 진우에게 손을 내민다. 그들이 가족 간의 소통에 대한 정석적인 정답을 구축해오지는 못했을지라도, 잘못되어 온 것들을 바로잡을 스페어 키 정도는 찾았다고 볼 수 있겠다. 미옥이 진우가 숨긴 자동차 열쇠를 찾지 못했어도, 스페어 키는 찾아왔듯이. 조명은 극 내내 배경으로서 주목하지 않던 집의 골조를 새삼스럽게 비추며 끝이 난다. 특정 대상에 대한 당신의 익숙함에 가려진 이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다. '집의 골조'가 놓인 무대의 활용이 마지막까지 돋보이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운 점도 보인다. 작품의 문제의식을, 경찰이 내포한 대중의 영역과, ‘당신’으로서의 관객의 영역까지 확장시켰던 것과 달리, 결국엔 미옥 한 사람의 자기 고백적 독백에서 드러나는 반성과 각성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와 책임을 회피하는 기성세대’의 대표자를 미옥으로 설정했다 하더라도, 불특정 다수에게 행했던 질문을 무대 위 실존하는 한 인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관객의 사고를 제한시키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미옥이 진우와 ‘함께 간다’라는 의미의 사용 역시 어딘지 와닿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 진우의 ‘파괴’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오던 상태에서 그것을 인물 사이의 ‘이해’의 측면과 연결시킨 것이 조금 성급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 모든 아쉬움에도 몰랐던, 또는 모르고 싶었던 아들의 모습을 마주한 엄마의 타임루프가 더없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관객이 늘 마주하는 오늘날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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