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적는다 [사람]

메모의 효능
글 입력 2024.06.2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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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한 날 술이나 퍼마시는 내게도 권할 만한 습관이 하나 있다면, 나는 적는다.

 

아이폰 메모장에 적고 수첩에 적고 A4 사이즈 노트에 적고 A5 사이즈 노트에 적는다. 메모장이 없으면 영수증 뒷면에 적고 쓰레기에도 적는다. 뭘 그렇게 적느냐 물으면 머리가 나빠서 그렇다 얼버무리지만 나는 사실 머리가 좀 좋다. 비결은 칼슘도 아니오 숙면도 아니오 유전도 아니오 적는 습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일이 쉽고 빠르게, 오토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태세가 있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그렇다. 그래서 나 같은 게 뭘, 이라는 자기연민도. 너 같은 놈이 뭔데, 라는 꼬장도 눈을 뜨고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카페를 가거나 술집을 가거나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좌회전을 하거나 우회전을 하거나 어디를 들어가나 나오나 노트북을 열거나 닫거나 쉽게 볼 수 있다. 신세한탄만 하다가는 정말 변하는 게 하나도 없다. 나이만 성실히 먹는다.


막연한 미래 앞에 현실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극복하려 애써야 될까 말까다.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다. 내가 돈이 없으면 나가서 노가다를 뛰면 되고. 내가 학력이 딸리면 책부터 보면 되고. 내가 누굴 좋아하면 섬세해지면 된다. 단순하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래 철학서를 읽으래 그것만 알면 만병통치약 이래 입 다물어라. 입 다물고 적는 것부터 시작한다. 내 기억력이 후달리면, 그래서 일을 망쳤다면. 내 생각부터 내가 모르겠다면 일단 적는다. 일단 뭐든 적어봐야 한다. 적어봐야 안다.


내일이 와도, 기억하겠지. 라던 밤이 아침이면 어떻던가. 기억하겠지, 라는 다짐만 남고 내용은 휘발된 지 오래다. 지금 당장은 뜨거울 다짐도 내일이면 밍숭맹숭 까먹는다. 술 먹고 하는 다짐은 그래서 감동한 한쪽만 기억하기 마련이다. 찜찜한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가. 정말 그러고 싶은가. 나는 싫던데.


운전할 때는, 시리를 불러 메모해 줘. 잠들기 직전에는 최소밝기로. 취했을 때는 ㅗㅜㅕㅛㅐㅇ 삐뚤빼뚤. 바쁠 때는 단어만 적는다. 주차를 하고, 그 생각을 왜 했는지. 어디에 써먹으면 좋을지를 다시 적고. 아침에 일어나 최대밝기로 다시 읽고 술이 깨면 똑바로 다시 적고 한가해지면 문장으로 바꿔본다. 뭐라도 적었기 때문에 다시 적고 읽고 바꾸고 기억할 수 있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나는 왜 그랬는지, 너는 왜 그랬을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지금 내 기분은 왜 좋고 네 기분은 왜 나쁜지. 내 인생은 왜 이모냥인지 저모냥인지. 적으면 알 수 있다. 객관화에 근접해질 수 있다. 실수를 줄이고 앞으로를 실체있게 고민할 수 있다. 머릿속으로만 가슴속으로만 고민하다 보면 앞서는 건, 결국 감정이다. 감정은 대개 일을 망친다.


포털 메인에 걸린 글들이, 신박한 노래와 광고들이, 디테일 미친 영화들이 정말 변기 위에서 똥이랑 같이 나왔을까. 단상과 공상으로 시작한 것들을, 적은 메모들로부터일 확률이, 매우 높다. 많이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그리고 많이 적었기 때문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게 보면 변기신화가 놀랍지 않은 이야기다.


육두문자던 사자성어던 일단 적자. 적으면 뭐가 됐건 지금과는 조금 달라져 있을 거다. 두 줄짜리 메모가 되어도 좋다. 일기가 되어도 좋다. 일단 적자. 나는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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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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