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군가의 삶에 역사가 있다 - 연극 새들의 무덤

글 입력 2024.06.27 11:5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객석 사이를 비집고 한 남자가 환한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는 용접 작업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빈 무대를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눈에 한 무리의 새가 눈에 띈다.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남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새 한 마리. 새는 이내 남자를, 그의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이끈다.

 

연극 <새들의 무덤>은 주인공 오루의 기억들로 구성돼 있다. 그의 삶에서 가장 강렬했던 기억들이 단편적인 장면으로 하나씩 펼쳐진다. 새는 그 기억들로 오루를 이끌고, 오루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내밀한 기억들을,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다.

 

 

[즉각반응] 새들의 무덤 포스터 0429.jpg

 

 

오루가 5살이었던 1968년부터 시작되는 그의 기억은 군부 독재와 산업화, IMF 외환위기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 지난한 시간 동안 오루는 해방 이후 계급과 이념으로 분열되는 공동체를, 군부 독재 시기 탄압받는 공동체와 끝내 희생되는 개인을, 그리고 누군가를 착취함으로써 쌓아 올린 경제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마는 모습을 보았고, 살기 위해 그 시간들을 참고 견뎠다. 그 시간들을 거치며 5살이었던 오루는 고등학생, 공장노동자, 그리고 아버지가 된다.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기억은 어둡고, 혼란스럽다. 불행했던 격동의 시대, 공동체의 가치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선인과 악인은 하루아침에 뒤바뀐다. 지주를 죽인 아버지가 결국 지주와 같은 자본가로 변절해 동네 주민들을 착취한다며 비판했던 오루의 삼촌 수필은 시간이 흘러 결국 아버지와 똑같은 자본가가 된다. 고향 마을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수필의 친구 판수는 서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선다.


각광받던 산업은 순식간에 빛을 잃고, 노동자들은 부품처럼 버려진다. 자본가들 역시 갑작스러운 외환 위기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공장을 운영했던 오루와 그의 아내는 외환위기 앞에서 결국 가족같이 아끼던 직원 태봉을 해고한다. 경제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에서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오루의 아내는 시간이 흘러 ‘일이 거의 없다’고 한탄한다.


오루라는 한 평범한 개인의 삶의 시간을 함께 걸으며, 암울하고 부조리했던 시대와,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변했던 혼란스러운 세상을 본다. 한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그의 기억에 놓인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본다. 그러나 극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연극 <새들의 무덤>은 탐욕과 착취로 굴러가는 한국 사회의 폭력적 시스템이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말한다. 오루의 마주하는 그의 기억 끝에는, 그가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2014년이 있다. 그 2014년에, 자신에게 용접 일을 소개해 준 태봉은 작업 중 추락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루는 세월호 참사로 딸 오손을 잃는다. 오루의 2014년에서,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후 새와 오루는 2024년 현재, 공연장으로 돌아온다. 그가 두려워했던, 잊고 지냈던 그의 기억을 모두 보여준 새는 다시 무리로 돌아가 멀리 날아간다. 새가 떠나간 후 오루 역시 용접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뜬다.

 

 

새들의 무덤 썸네일.jpg


 

러닝 타임동안 지난하게 이어진 오루의 기억들은 모두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만 얼룩져 있다. 그리고 그는,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착취되고, 희생되었지만 그것을 헤쳐가며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남은 오루의 삶은, 또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역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슬픔과 상처로 이뤄져 있는 걸까. 앞으로 쓰여질 우리의 역사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연극을 본 후 나에게 남은 질문들이다.


 

[한수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0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