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피스] 유리의 이야기를 듣는 아티스트, 고새의 세계

유리과 관계를 쌓아가는 고새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글 입력 2024.06.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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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스터피스를 이해합니다.

 

 

 

고요한 새벽은 유리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리공예를 하고 있는 고새라고 합니다.

 

고새라는 이름의 뜻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저의 본명은 효정인데, 새벽 효에 고요할 정을 사용해서 고요한 새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고’요한 ‘새’벽의 앞 글자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저는 램프워킹이라는 기법을 활용해서 유리 공예를 하고 있습니다. 블로잉이 녹아있는 물을 떠서 성형을 한다면, 램프워킹은 작은 토치 앞에서 바로바로 녹여내며 성형하는 기법입니다. 이를 통해 유리가 가진 물성이 신체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런 물성이 내 삶에 어떻게 가까이 접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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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공예라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 접하기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울 것 같아요. 작가님께선 초등학생 때부터 유리 공예를 좋아하셨고, 수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셨는데. 유리 공예의 어떤 점이 어릴 적 작가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요?

 

아무래도 어렸을 때이다 보니 명확하게 제 마음 속 어떤 부분을 유리가 건드렸다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래도 유리가 오감을 자극했어요. 유리는 유리만의 아슬아슬함이 있잖아요. 건드리면 바로 으스러질 것 같은데, 또 단단하고, 먹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투명하고 너무 예쁘기에 만지고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아슬아슬하고 긴장되는 이 모든 복합적인 감정들이 저에게 많은 자극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유리를 갖고 싶다고 생각을 했고, 갖는다는 것은 곧 수집이니까 수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제가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애니메이션 중 유리구슬을 입안에 넣으면 마법이 생기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 어린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자기 전에 유리구슬 두 개를 입에 넣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하나가 없어진 거예요. 아무래도 먹은 것 같아요. 하하. 그때 유리구슬을 먹어서 지금 유리 공예를 하는 거라고 말하기도 해요.

 

 

-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시다가 대학생 때 유리공예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유리 공예를 시작하셨고, 그 과정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과정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저는 창업을 했었어요. 생리컵 사업을 해서 열심히 판매했는데, 그 과정에서 컨디션이 너무 나빠져서 몸이 아프게 되었죠. 그렇게 그만두게 되고 아무것도 없는 공백기를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때 불쑥 떠오르는 거예요. ‘어, 나 초등학생 때 유리 좋아했네. 해야겠다.’ 그래서 유리 공예를 시작했어요. 하하.

 

말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저는 어느 순간 어떠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정답이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걸 하면 항상 100%의 확률로 제가 정말 잘 하고, 좋아했죠. 좋아하니까 열심히 하게 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이 느낌이 ‘끌림’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 공예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과정에서 다른 재질에 대한 공예도 함께 고민해 보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작가님께서는 오직 ‘유리’만을 바라보셨네요.

 

맞아요. 저는 유리 공예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다른 것보다도 ‘초등학생 때에는 컬렉터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만들 수도 있네, 만들어야지’라는 생각을 통했기 때문에 그 중간에 다른 선택지들을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유리는 다른 것들에 비해 까칠해요. 유리공예 할 때 유리를 정말 잘 다스려줘야 하거든요. 구슬려주고, 그만큼 녹여주고, 딱딱해지면 절대 힘을 주면 안 되죠. 저랑 유리랑 싸우게 되면 나중에 무조건 제가 다치거나 유리가 깨지는 상황이 발생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유리의 기분에 맞춰줘야 해요. 그런데 그런 부분이 제가 어떤 물성과 동등한 선상에서 대화를 한다는 느낌을 받으니까 다른 물성으로 대체가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리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저에게는 상호작용으로 느껴지니까요.

 

 

- 그렇다면 처음 유리 공방에 가셨을 때의 추억도 공유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처음 배웠을 때 정말 설렘으로 가득했어요. 그리고 유리 공예를 배우면서 유리 공예라면 평생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죠.

 

그런데 저는 유리를 처음 했을 때, 빨리 유리가 지겨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겨워지고 나서의 유리와 저의 모습이 정말 기대되었거든요. 한 번 지겨워지면 포기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 포기하지 않고 그 권태기를 넘어섰을 때의 나는 얼마나 노련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죠. 또, 사람하고도 권태기를 넘어서면 정말 장기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순간을 유리와 함께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 현재, 유리와 작가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권태기를 넘어서서 더 단단해졌을까요?

 

사실, 최근 권태기가 왔어요. 하하. 그래서 요즘에 사용하는 방식이 계획을 안 세우고 그냥 만들어보는 거예요. 그전에는 스피치를 하고, ‘이걸 구현해야겠다’, ‘나는 자신이 있다’는 생각과 마음에 작업을 진행했다면 지금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리와 대화했을 때 어떤 것이 나올지에 대해 다시 탐구해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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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신 만큼 실용성, 필요성에 대해서도 염두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실제 작가님의 작품에도 실용성이 많이 고려가 될까요?

 

아무래도 제가 4년 동안 관련해서 공부를 했고, 디자인으로 물건을 팔아본 경험도 있다 보니 유리를 대할 때도 어느 정도 실용성에 대해 고려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도 작가주의적인 디자인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디자인이라고 하면 주변에 있는 문제점을 내가 가져와서 해결하고, 창작해서 다시 내보내는 과정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제가 가진 것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 하는 성질이 강했어요. 그런 점이 산업디자인으로 중화가 되며 그 중간 단계로 공예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유리가 가만히 한자리를 차지만 하고 있다는 것이 싫었어요. 저는 유리가 독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래서 유리가 살아있으면 하죠. 그런데 그 ‘살아있음’에 대해 저는 유리가 실용적으로 무언가에 사용되게 만들면서 살아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누군가와 상호작용하고, 돌아다니고, 다른 풍경을 투과시킬 수 있게 함으로써 유리가 살아있을 수 있게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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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새가 유리를 소개합니다


 

- 자기소개를 해주셨을 때 유리의 물성이 신체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작품을 표현한다고 해주셨는데, 어째서 이것을 표현하고 싶으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신체는 무언가를 먹고 배출해요. 체액으로 나오기도 하고, 땀, 눈물 등으로 나오기도 하죠. 그런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저는 신체가 파이프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체성을 ‘어떤 것이 통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렇다면 그 사이를 통과하는 것들이 어느 부분에서 멈춰 있고, 어느 부분에서 흘러나갈까 궁금했어요. 우리가 잡고 있는 것들은 고체로 남아있고, 흘러나가는 것들은 액체로 흘러나간다고 생각했거든요. 기억이 휘발되는 것도 흘러나가는 것이잖아요.

 

유리도 흐르는 것 같아 보이다가도 식으면 멈춰 있는 것이 그 흐름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육체가 가진 ‘흐르게 만드는 성질’, 그리고 ‘내가 잡아놓은 성질’이 유리의 물성과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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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저는 개인적으로 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편이에요.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저는 저는 저의 신체가 분절된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 특정 기억들로 인해 저의 몸이 파트별로 나눠지는 느낌이었는데, 유리는 몸에 닿았을 때 몸을 왜곡시키잖아요. 확대시키기도 하고 축소시키기도 하는 그 왜곡을 확인하며 저의 분절된 왜곡을 다시 섞고 싶다는 욕구도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 앞서 유리가 '오감을 자극했다'라고 하셨는데, 오감에 ‘미각’도 포함되어 있죠. 이전에 작성하신 글에서는 유리를 보며 청량감과 동시에 달콤함이 있다고 말씀하셨고요. 유리를 먹었다고 말씀하셨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 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저는 유리를 보며 달콤해 보인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굉장히 흥미로운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리를 만드는 사람이어서 달콤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유리 공예는 설탕 공예와도 굉장히 비슷하거든요. 열을 가했을 때 녹는 농도나 모양을 잡는 부분이 설탕이랑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또, 유리가 열을 받으면 빨갛게 달아올라서 요리가 되는 것처럼 존재하다가 식으면 완전히 투명해지잖아요. 그 투명한 유리만이 가질 수 있는 투과되는 성질에서 시원함, 청량감도 느낀 것 같습니다.

 

 

- 유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유리에게 감정이 있고, 심지어 다른 것에 비해 까칠하다고 표현하시는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유리의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유리 작업을 할 때, 정말 이유를 모르겠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해요. 제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깨져버릴 때도 있고요.

 

물론 유리의 질이나 불순물 등 원인은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제가 조절할 수 없는 부분에서 변화무쌍하게 움직인다는 점에서 저는 앞서 말씀 드렸듯 유리 자체가 독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리고 그 독립된 변화무쌍함에 맞춰주면서도 제가 원하는 형태로 유리를 이끄는 과정에서 저는 유리를 저의 친구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리 와볼래?’, ‘이렇게 움직여볼래?’ 하면서요.

 

 

- 견고하게 유리와의 관계를 쌓아나가는 고새님께서 지금까지 유리와 다투었던 경험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항상 유리와 다투고 화해해요. 최근에는 제가 유리한테 혼이 난 경험이 있어요. <물의 기억법> 전시를 했을 때같이 전시했던 깨진 강화 유리에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렇게 만들려고 만든 것이 아니에요. 유리를 자를 때는 유리 칼로 자르고 유리를 눌러야 해요. 그래서 제가 이 유리를 유리 칼로 자르고 눌렀는데, 유리가 와장창 깨진 거예요.

 

이 전시를 준비할 때 저는 굉장히 답답했어요. 더 잘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제가 유리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 유리가 깨지더니 이후로 차각, 차각 소리가 나는데 그 순간 저는 놀라는 것과 동시에 통쾌했어요. ‘내가 너무 마음대로 하려고 했구나, 또 유리에게 혼났구나’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 정말 많이 기억이 남아요.

 

저는 그래서 유리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이거라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저에게 자중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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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내다보는 시선을 유리에 담아낸 <100개의 보는 방법>


 

- 작가님의 프로젝트 중 <100개의 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00개의 보는 방법>은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100개의 보는 방법>은 모델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앞을 어떻게 내다보는 것 같으세요?’라고 질문을 드리고, 그 질문의 대답이 모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들은 뒤 그것을 조형화하는 작업입니다.

 

제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했던 프로젝트였어요. 유리를 자주 만들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영감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프로젝트였죠.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제가 거기에 영향을 받아 유리를 조형화를 하는 과정에서 습관이 많이 생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를 들면 너무 비슷한 느낌의 조형만이 계속 나온다든지, 안경이라는 특정한 아이템의 사용감에 대한 틀에 갇혀 형태의 변화를 많이 주지 못했죠. 그래서 중간에 잠깐 멈추었던 프로젝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DM을 받은 적이 있어요. 1년 전에 질문을 드린 분이 계신데, 그분께 제가 천천히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렸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연락을 해주셨어요. 그분께서는 ‘앞을 어떻게 내다보는 것 같은지’ 1년 내내 생각을 하신 거예요. 정말 많은 고찰을 하신 뒤 거의 에세이처럼 자신의 앞을 내다보는 방법에 대해 글을 쓰셔서 저에게 보내주신 거였죠.

 

이번에 보내주신 DM 덕분에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다시 찾은 것 같아요. 질문을 내가 던지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자체로도 서로에게 정말 영향을 많이 주고받을 수 있구나, 그리고 그런 식으로 탄생된 무언가가 유리라면 삶을 유리에 적용시키고 싶다는 마음과도 부합할 수 있구나,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나 깊이 있게 나눌 수 있구나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감을 얻고 싶어 시작하셨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안경이었을지, 왜 하필이면 ‘보는 방법’이었을지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유리공예를 시작했을 때는 저의 인식 안에서 안경 알과 유리가 따로 놀았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안경알도 유리알이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유리알을 본다고 하지 않고 앞을 본다고 하죠. 사실 저희는 세상을 유리로 보고 있는 거니까, 항상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으면서도 이 안경이라는 소재가 우리가 앞으로 미래를 볼 때 가진 시선에 대한 필터 역할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과 함께, 그렇다면 그 외의 비슷한 점이 무엇이 있을지 찾아내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작가님의 세상을 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제 얼굴에 스스로 씌웠던 안경의 이름을 <밭을 일구는>이라고 했어요. 

 

저는 항상 땅을 다지고 싶었거든요. 세상이 힌트들로만 가득 차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공중에 떠있는 서로 관계가 없는 불특정 다수의 어떤 요소들 안에서 제가 헤엄치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방을 만든 것도, 유리 공예를 하면서 창작을 하는 것도 제가 그런 불특정한 힌트들을 모아서 견고한 물체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에게 창작 과정이란 마치 작물을 기르듯이 주변의 영양소들을 모아서 계속 만들어내는 거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아서 밭을 일구어 내고, 무언가를 생산하고, 그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저의 안경을 <밭을 일구는>이라고 작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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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해 주셨다시피 <밭을 일구는>을 작업해 주셨는데, 그때 SNS에 함께 올리신 문구가 ‘낫과 호미가 필요하다’였어요. 작가님의 밭을 일구기 위해 작가님의 인생에 필요한 낫과 호미는 무엇인 것 같으세요?

 

저는 스스로의 힘을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힘을 믿으면 믿을수록 저의 힘이 더욱 생겨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무언가 파괴되거나 전복되었을 때, 그것을 견뎌내야만 더 나은 창작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때에는 분명히 좌절을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예전에 일궈놨던 밭이 나의 가치관이나 무언가의 변화에 의해 다 엎어져 버렸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저의 힘밖에 없어요. 그 힘을 스스로가 믿어야지만 계속해서 밭을 일굴 수가 있죠.

 

또, 삼시 세끼를 잘 먹는 것도 굉장히 중요해요. 얼마 전 어떤 분께서 저에게 ‘영감을 어디서 받으시느냐’ 여쭤봐주셨는데, 사실 저는 영감이라는 것이 잘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조건 체력이 좋아야 뭐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체력이 없으면 아이디어도 안 되어서 저에게 영감은 삼시 세끼라고 말을 해요.

 

그래서 저의 밭을 일구기 위한 낫과 호미는 스스로를 믿는 힘과 삼시 세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지금까지 진행했던 <100가지 보는 방법> 중 소개해 주고 싶으신 것을 하나 말씀해 주신다면?

 

제일 처음 작업했던 저의 친구 파도와의 안경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착실하게 더듬기 위한 기관이 있다>라는 문구를 써서 올렸었거든요. 제가 이 친구를 정말 사랑하기도 하고, 제가 평소 이 친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해서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한 것도 있어요.

 

저는 이때 만들었던 작품이 정말 제가 감각을 했다고 생각해요.

 

감각한다는 것은 같은 세상 안에 있는 느낌이에요. 제가 만들고 있는 것과, 상대방과, 제가 같은 세상 안에서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거죠. 

 

감각하지 못할 때는 제가 만드는 작업물이 그저 영상물처럼 느껴져요. 영상물은 그 안에도 세상이 있지만 제가 침범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감각하는 작업물은 저와 대화가 가능해지죠. 그런 부분에서 저는 그 친구의 작품과 감각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 친구는 정말 열심히 살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요소들, 감정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지금 당장 너무 괴롭고 힘들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하나하나 들여다보려 노력하는 친구죠. 그런 부분에서 제가 많이 영향을 받았어요. 저는 많이 놓치는 사람이거든요. 만약 우리에게 더듬는 기관이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파도라는 친구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조화가 이루어지며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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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지으며


 

- 처음 SNS에 유리 작품을 올리기 시작한게 2021년도네요. 2021년과 지금, 고새에게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유리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기술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아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컸죠. 그래서 선생님 밑에서 착실하게 지도를 따라가며 테크닉적인 면에 집중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일을 평생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어떻게 평생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붙는 거예요. 그러면서 조금 더 깊은 탐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중간에 제가 유리 기법을 블로잉에서 램프워킹으로 바꿨어요. 그런데 그때는 선생님이 없어서 저 혼자 직접 훈련을 했거든요. 그래서 누군가를 따라가며 테크닉을 익힌다기보다는 제가 유리와 대화를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굉장히 많이 중요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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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에는 공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미술도 공부하려고 해요. 테크닉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가 인간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무언가를 만들 때 솔직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변화가 있었지만 결국 저는 필연적으로 제 삶에 유리가 위치할 수 있는 것을 계속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유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유리와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고새님께 여쭙습니다. 인간으로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고민하셨을 때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요?

 

제가 최근에 스스로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 저는 너무 많은 껍데기를 거쳐왔다는 거예요. 저는 주변에 있는 환경이나 주변의 가치관에 따라 많이 좌지우지되는 사람이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계속 옷을 바꿔 입고, 주변의 환경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살아왔죠.

 

그런데 그렇게 살며 주변을 만들어내면 결국 정말 쉽게 무너져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무너지고, 입고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입어왔던 옷만 남아있다고 느껴져서 과연 내 안에는 무엇이 남아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어요. 거기에 대해 탐구하며 ‘진짜 변할 수 없는 나는 무엇일까?’에 대한 위화감을 찾게 되었죠. 

 

사실 ‘진짜 나를 찾는 과정’이라는 것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찾아나가는 과정 자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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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푸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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