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평온함이 넘쳐 흐른다 고통의 눈빛을 보지 않았기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4)
글 입력 2024.06.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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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관심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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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우거진 집에 단란한 가족이 등장한다. 매미 소리와 새 소리가 들리고 모두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 가족은 강가에서 놀기도 하고 숲속을 걷기도 한다. 일반적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다.


아이들은 집 앞마당에서 제각각 놀고 한쪽에서는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한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와서 집에 사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집에 사는 여자는 좋아 보이는 모피 코트를 입고 다각도로 살펴보며 옷매를 확인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는 립스틱을 꺼내 발라본다. 응접실로 간 그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수다를 나눈다. 한 명은 다이아몬드를 꺼내 자랑스레 보여준다. 치약에서 발견했다는 그 다이아몬드는 그들에게 가벼운 소재거리다.


다른 방에서는 한 남자가 장교로 보이는 동료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가스실에서 적재물을 태우는 순간 다른 곳에서 가스를 냉각시킨다.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면 더 빠르고 끊임없이 적재물을 태울 수 있다.”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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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바깥쪽에는 담장이 하나 있다. 꽃들이 그 담장을 둘러싸고 있지만, 그곳의 굴뚝에서는 자주 연기가 난다. 자세히 들어보면 비명과 비슷한 소음이 들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이 소리는 공기의 소음인가, 누군가의 비명인가.


평온한 일상과 아름다운 정원에 이 소음은 자연스레 묻어난다. 크지는 않지만 은은하다. 영화는 계속해서 한 가정집의 안온한 일상을 전개해 나가는데, 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관객은 어딘가 지루하다. 우리에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이 소음은 따뜻한 풍경과 함께하기에 이토록 평범하다.


눈치챘겠지만, 이 가정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의 집이다. 장교 신분인 그의 동료들은 회스의 생일을 축하해주었고, 그들의 회의 내용은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이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에게서 압수한 짐 중 좋은 것을 골라 입어보고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말투와 행동을 보니 그에게 이런 일은 전체 일상 중 평범한 일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소리로 느껴지는 악에 대하여


 

“소리는 본능적이기에 눈을 속이는 것보다 귀를 속이는 게 더 어렵습니다.”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이너 조니 번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기에 그는 영화의 소리에 주목하며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 중 하나는 진짜 사운드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소리는 처음엔 은은하기도, 등장인물의 말소리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기도 하지만, 확실한 건 모두 특정 현장에서 발생한 실제 소리라는 것이다.


영화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계속 들려주지만, 이 소리가 매우 커질 때가 있다. 영화의 중반부와 마지막 부분에서다. 영화의 중간 장면에서 회스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벽에 예쁜 포도나무를 더 심어 담장 너머가 보이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한다. 이후 클로즈업되는 여러 꽃과 점점 커지는 소리 속에서 전체 화면은 빨간색으로 뒤덮인다. 피를 연상케 하는 배경과 크게 들려오는 소리는 실제로 많은 이들의 비명을 모아 놓아 더욱 무섭고 끔찍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삽입된 소리도 마찬가지다. 검은 화면 속 크게 들리는 비명은 그 소리에만 온전히 집중하기에 더욱 섬뜩하다. 이렇듯 우리도 딱 두 번의 장면에서만 유대인들의 고통을 상상하며 그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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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스 가족의 일상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그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처음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들의 잔인함에 놀란다. 그들은 청력이 손상되었나?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나? 하지만 이내 영화를 보는 우리도 그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회스의 가정에서 발생하는 상황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평화로운 생활과 아름다운 꽃,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인해 비명은 우리의 청각에서도 서서히 멀어져간다. 관객이 보는 건 오로지 그 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가정의 단란한 일상 뿐이기에.

 

 


살갗으로 느끼는 악에 대하여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철저히 소리를 중심으로 고통을 묘사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절대 고통받는 이의 모습과 참혹한 현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루돌프 회스를 비롯한 장교들은 수용소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그 안락함 속 그들이 하는 행위가 어떤 짓인지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회스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누군가의 금니, 피가 씻겨져 나오는 장화, 물놀이 중 발견한 인간의 뼈는 모두 불분명한 출처를 가지고 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고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수용자들의 시신은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하고 떠내려온 일부 시체는 외면하고 피하면 그만이다. 직접 보지 않은 것들은 이토록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다.


반면 2008년에 개봉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의 경우 악을 평범함으로 여기기에는 거리감이 있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직접 고통을 느끼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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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의 어린 아들 ‘브루노’의 시점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브루노가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친구인 ‘슈무엘’은 유대인이다. 두 사람은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친해지게 되고 이는 곧 브루노가 슈무엘과 함께 수용소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라진 슈무엘의 아버지를 함께 찾고자 여분의 죄수복을 입고 수용소로 들어간 브루노는 가스실까지 들어가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뒤늦게 사실을 안 브루노의 부모님은 그를 찾아 나서지만 이내 가스실의 작업이 끝나 브루노가 사망했음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전한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와 버려진 브루노의 옷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허망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의 모습이 비친다. 특히 아버지는 지독한 나치즘에 빠져 수용소 유대인의 끔찍한 죽음에 가담한 인물이기에 그 모습은 더욱더 부각된다.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방식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데 이용한 수용소에 자신의 아들이 들어간 사실은 악의 아이러니함을 묘사한다. 악은 본인의 일이 되지 않으면 그저 지나치는 일상에 불과하지만, 나 자신과 관련되는 순간 한 사람을 넘어 한 가정을 파탄 내는 지경까지 이르는 거대함을 가진 존재다. 살갗으로 직접 느끼는 악은 이렇게 무섭고 잔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늘 존재했음을


 

타인의 고통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외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를 돕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는 언제나 존재했다.


영화는 중간중간 열화상 카메라로 어린 소녀가 수풀을 걸어가며 사과를 놓는 장면을 묘사한다. 흑백 화면 속 소녀의 형체만 보이고 주변 인물은 반딧불처럼 빛난다. 영화의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인간의 선함을 보여주고자 이 장면을 촬영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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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가능한 모든 면에서 정확하고 싶었다”, 『씨네21』

 

 

감독이 모티브로 한 소녀는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코우오제지크’ 라는 실존 인물이다. 전쟁 당시 14살이었던 이 여성은 밤마다 노역 현장에 들어가 음식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너무 암울하고 절망적이어서 포기하려던 중 이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통받는 사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녀가 보여준 따뜻함은 지금까지 영화에서 보여준 건조한 인물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사방이 어둡고 참혹해도, 모두가 외면하는 곳에도 늘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 이들은 존재해왔다. 소녀가 보여준 인간애는 영화의 제작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희망을 몸소 보여준다. 현실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끔찍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빛나는 선함으로 무장한 이들도 존재한다.

 

 

 

‘그때 그들이 한 일’보다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


 

영화의 마지막은 루돌프 회스가 어두운 복도의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걸음을 멈추고 헛구역질을 한다. 그가 했던 구역질은 유대인들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었을까. 하지만 그것뿐이다. 계속해서 구역질을 하지만 뱉어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어둠 속으로 끝없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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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대체로 한 사람만을, 한 가정만을 비췄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그 평화로운 정원에 남은 이들은 우리 모두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끊임없는 기사가 나오고 그 내용에는 오늘도 안타까운 사건이 넘쳐난다. 처우가 제대로 개선되지 않아 노동 중 끔찍한 일을 당하고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 이들을 작은 화면 속에서 접하는 우리는, 그들의 비명이 커졌을 때만 잠깐 귀 기울일 뿐이다. 여전히 우리의 정원은 평화롭고 때론 지루하다. 간간이 들리는 비명은 그 소리가 너무 작기에 개의치 않는다.


영화의 끝부분은 수많은 옷과 신발 더미, 목발 등이 늘어서 있지만 무미건조하게 창문을 닦고 청소하는 청소부의 모습이 있다. 고통의 흔적이 바로 앞에 나열되어 있어도 그저 그들의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영화 속 인물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영화관에 있을 땐 마음이 불편하다가도 그 공간을 벗어나면 금세 잊어버리고 말 우리의 모습과 말이다.



*참고자료

이주형, 2024, '악은 (평범하게) 존재한다'…"존 오브 인터레스트", 『씨네멘터리』

조경건,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이유”, 『부산일보』

김소미,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가능한 모든 면에서 정확하고 싶었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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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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