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금 이 순간이 모여 삶이 된다 – 영화 ‘퍼펙트 데이즈’

코모레비;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
글 입력 2024.06.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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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충만한 삶에 대해 고민한다. 기쁨, 성취, 보람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고민이지만 가끔은 버겁게 느껴진다. 삶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 때도 있고, 당장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마음에 불안감이 닥쳐오기도 한다. 앞으로 몇십 년이나 남은 인생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으로 애를 태운 적도 많다.

 

충만한 삶에 대해 내린 나름의 기준마저 흔들리던 시점에 이르렀을 때, ‘퍼펙트 데이즈’를 만났다. 영화는 지금에 충실한 삶이 곧 충만한 삶이라는 시선을 견지한다.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삶을 말한다. 충만한 지금이 모여 충만한 삶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미래의 삶을 어떻게 그려갈 것인지에 매달리다가 쉽게 잊곤 한다.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대하는 태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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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의 하루를 비추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의 일상은 매일 다름없이 반복된다. 동이 트기 전 빗자루로 낙엽을 쓰는 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방 안의 작은 화분들에 물을 준다. 나갈 준비를 마치면 그만이 아는 순서대로 가지런히 놓인 열쇠와 동전들을 챙겨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뽑는다.

 

날씨가 좋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하늘을 보며 옅은 웃음을 짓는 행위도 그의 일상 중 하나다. 오늘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속마음이 읽히는 미소다. 곧바로 차에 올라타 좋아하는 카세트테이프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항상 같은 자리에 곧게 서 있는 스카이 타워를 바라보며 일터로 향한다.

 

그는 청소부로 일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하는 경험도 적지 않게 겪는다. 그러나 화장실 구석구석을 누구보다 정성스럽게 청소하며 느끼는 작은 보람과 혼자 보내는 고요한 시간이 그의 삶을 지탱한다. 일이 끝나면 벤치에 앉아 우유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찍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작은 전등을 켜놓고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에 평온함을 느낀다.

 

쉬는 날에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달린다. 세탁소에 가서 작업복을 깨끗이 빨고, 동네 헌책방으로 향해 자기 전에 읽을 책을 산다. 지하철역 안에 있는 단골 술집에 가서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한다. 일이 없는 날에도 한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으로 하루를 채워 나가는 삶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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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토록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그에게도 불안과 외로움이 찾아온다. 유쾌하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이 일상에 조금씩 틈입한다. 간혹가다 옛날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아 홀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항상 무탈하고 평안한 시간을 지내고 싶지만 자신을 종종 덮쳐오는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더해, 소원한 조카 니코가 갑작스럽게 그를 찾아오면서 평온했던 일상에 변화가 더해진다. 오래 떨어져 지냈기에 서먹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조카의 존재는 그에게 웃음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마주하고 싶지 않던 기억과 한참 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냈던 가족들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서서히 변화하는 일상과 함께 밤마다 꾸는 꿈의 장면들도 달라진다. 흑백으로 그려지는 꿈에서 그가 느낀 새로움이나 불안감과 같은 여러 감정들이 읽힌다. 그날 겪었던 사소한 변화나 자극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깊고 어두운 바다의 이미지와 소리가 재생되기도 한다. 하루를 충만하게 보낸 날도 잠에 들면 잠시 잊고 있었던 불안이 찾아오는 것처럼, 사람은 본래 긍정적인 경험뿐 아니라 불안과 공허처럼 우울한 경험 또한 안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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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야마의 평온한 일상과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교차되는 모습을 보면서, 쳇바퀴 돌듯 변함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도 사실 날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 역시 니코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느슨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이 사실을 곱씹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은 변한다.

 

방금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던 니코가 집으로 돌아가고,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일하던 수다스러운 후배가 일을 갑자기 그만둔 것처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한다. 긴 연필로 카세트테이프를 되감는 그와, 아이폰 속 스포티파이에서 음악을 찾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는 빠르게 지나간 세월의 거리가 존재한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가 집중한 지점은 이 순간은 오직 지금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겪은 불안하고 두려운 순간들이나,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행복한 순간들이나 모두 그때만 존재한다.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현재의 나와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기쁘고 충만한 순간들뿐 아니라 위태롭고 절망적인 순간들까지 모두 내 몫이니 껴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대신 불안함도 순간일 테니까 금세 지나갈 것이라고 믿으면서, 지금 느낄 수 있는 사소한 행복으로 하루를 채워갈 수 있을 것이다. 히라야마가 도움을 준 아이에게 손 인사를 받던 순간, 화장실에 누군가 넣어놓은 작은 쪽지로 서로 게임을 주고받던 순간, 그리고 단골 술집의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말해주던 순간처럼 기쁨은 일상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감독 빔 벤더스는 코모레비라는 단어를 소개한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코모레비는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뒤이어, 히라야마 역 배우 야쿠쇼 코지의 얼굴이 비치며 영화가 전하고자 한 뜻이 더 분명해진다. 환희, 기쁨, 희망, 좌절, 불안, 회한까지 모든 감정이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다.

 

이 모든 것이 모여 삶이 만들어진다. 슬프거나 평범하거나 기쁜 하루하루가 쌓여서 삶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나는 내 충만한 삶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불안감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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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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