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마음의 고향,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만화]

세계명작극장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글 입력 2024.06.2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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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무렵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이미 집에 있어도, 집으로 향하고 있어도, 지금의 이곳이 아닌 다른 공간을 떠올렸다. 그것은 우중충한 날씨의 바닷가이기도, 존재하지 않는 기차역에서야 내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 그곳의 나는 늘 혼자였다. 살아서 걸어 다니는 것은 나뿐인 곳. 그래서인지 그곳의 풍경을 구체화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살아가는 이 공간을 떠나서 어딘가로 도망치듯 떠나는 것만이 나에게 새겨진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폐부 한가득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내가 진정으로 마음의 고향이라 생각하게 된 곳이 생겼다. 직접 가본 적도, 사진으로도 본 적 없지만 진득한 애정을 느끼게 된 곳, 바로 캐나다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다. 그곳은 캐나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의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통해 알게 되었다. 특히 내가 보았던 것은 1979년 일본 후지TV에서 방영된 작품을 1989년에 한국어로 더빙한 판이었다.

 

<빨강머리 앤>은 홀로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던, 마음이 정말로 가난했던 무렵에 만난 애니메이션이다. 그전까지 나는 <빨강머리 앤>을 소설이나 만화로도 본 적이 없었다. 조실부모한 소녀가 초록색 집으로 와서 가족이 되는 이야기라는 주제와, 인터넷에서도 유명한 ‘앤의 흑판 내리침 사건’만 알고 있었다. 처음에 어떤 계기로 그 애니메이션을 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빨강머리 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가 되었다.

 

* * *

 

모든 이야기는 앤 셜리라는 한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이곳저곳으로 떠넘겨지며 그곳에서 외로이 살던 아이는 우연의 장난이 만들어낸 계기로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오게 된다. 애니메이션의 첫 화에서 앤은 기차를 타고 그곳에 오게 되었다. 한편 앤을 남자아이로 기대하고 있던 매튜와 마릴라의 기대와 어긋난 탓에, 그들의 첫 만남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앤이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이 세상 어디에도 앤의 집은 없었을 것이다. 그 어느 마을에도, 어떤 집에서도 앤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속하지 못하던 이방인이었다.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던 앤은 마침내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라는 세상에 뚝 떨어졌다. 그리고 이곳은 소녀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즉, 피로 엮이거나 그렇지 않은 관계 그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앤 셜리의 영혼은 어째서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누군가가 어느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그가 그 장소에 적응함과 동시에 그 장소도 그를 수용함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곳의 사람들이 완전 이방인이던 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앤은 어른들의 말에 마냥 순종적이지도 않고 다루고 가르치기 쉬운 성정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매튜와 마릴라도 그리 호락호락한 어른들은 아니다. 주위의 사람들도 처음에는 앤의 빨강머리와 빼빼 마른 몸을 지적하곤 했다. 그들의 만남도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앤은 그러한 매튜와 마릴라의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고, 자신의 외양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 린드 부인에게 만만치 않은 응수를 둔다.

 

특히 마릴라는 이러한 앤의 특성을 마냥 좋게 보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말이 많은 소녀는 초록색 지붕 집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도 자기의 성격을 굽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마릴라는 앤을 향해 자주 잔소리를 하곤 했다. 가끔은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이거나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감당하기도 했다. 그러니 보호자로서 뒤늦은 육아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튜와 마릴라, 그리고 앤이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향한 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매튜였지만, 마릴라는 주기를 반대하는 초콜릿을 사다 주며 다이애나와의 첫 만남을 축하하고, 항상 앤이 잘 해낼 것이라는 든든한 믿음을 준다. 마릴라도 앤과 함께하며 그 아이가 지닌 선한 마음을 발견하며, 자기의 고집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앤이 맹랑한 잘못을 저질러도 하하 크게 웃는 너그러움을 지니게 되었으니까.

 

이러한 가운데 앤도 매튜와 마릴라에 대한 애정을 쌓아나가기 시작하고, 그것을 주위로 펼쳐나간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 다이애나를 비롯, 에이번리 국민학교의 제인 앤드루스, 루비 길리스, 심지어 조시 파이와 찰리 슬론, 그리고 마침내 길버트 브라이스까지도 그녀는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다정하고 친절한 앤의 천성 덕도 있겠으나, 앤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많은 사람들을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초록색 지붕 집의 보호 아래 받은 지극한 뒷받침 덕분이었을 것이다.

 

총 50부작인 애니메이션에서 앤은 오래도록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던 길버트 브라이스와 화해를 하며 작품의 문을 닫았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경쟁 관계였으나 점점 함께 공부를 하며 미운 마음을 누그러뜨렸고, 마침내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어릴 무렵에는 미워하던 존재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까지, 앤은 여러 상처를 겪었고 슬픈 이별도 겪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상실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창의력과 굳센 심지를 지켜온 앤은 창밖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전 지금 아무런 후회도 없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가 있습니다. 브라우닝의 시 한 구절처럼,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온하도다.’”

 

* * *

 

앤이 겪어온 모든 일을 지켜본 시청자로서, 앤의 강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탄생 때부터 세상은 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고, 못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 주위의 환경이 마냥 풍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앤은 마침내 어른으로 자라났다. 세상의 논리를 배우며 자라되, 자신이 타고난 창의성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그것은 자기 안의 강인함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앤이 그렇게나 강인한 인간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동시에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 덕분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앤의 수다스러움에 진저리를 느끼던 마릴라도, 앤의 마른 몸과 빨강머리를 지적하던 린드 아주머니도, 실수로 딸애에게 포도주를 먹였다며 앤을 의심하던 베리 아주머니도 결국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에 품은, 환히도 빛나는 별을 지켜주었다. 그것은 아주 대단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뭣 모르는 어린애를 위한 배려에서 너그러이 넘어간 것이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앤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애정과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자란 앤은 얼마나 꽉 찬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었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고마웠다. 앤 셜리만이 지닌 특별함을 마침내 받아들여 주어서. 그녀의 맹랑한 행동을 앤의 특성으로 이해해 주어서. 그리고 그 독특함을 지니고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사랑을 주어서. 새로운 도전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앤이 스스로를 단단히 붙들고 일어설 수 있는 어른이 되도록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주어서.

 

한 번도 가본 적도, 사진으로도 본 적 없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그러나 그곳에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이 있다. 낯선 아이도 사랑으로 감싸주는 곳, 독특한 소녀도 아무쪼록 자기만의 어른이 될 수 있는 곳, 든든한 사랑이 있는 곳.

 

여전히 가끔 그곳을 떠올린다. 그곳에 가고 싶다.


 

 

서지원.jpg

 

 

[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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