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약한 날개뼈를 가진 그들을 향해 - 연극 '새들의 무덤'

글 입력 2024.06.2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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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으로 나누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죽은 사람의 옷을 흔들며 혼을 보내는 동시에 땅을 구르는 하얀 백골과 살아갈 수 있다는 조상의 상상력은 절절하다.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모순이 진실한 것이다.

 

우리 조상의 모순된 비유를 고려할 때, 우리가 죽은 사람이 흔히 새로 비유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새는 인간이 쉽게 닿을 수 없는 저 멀리 날아가지만, 지상의 생물이다. 그래서 새는 혼백의 개념과 꽤 닮았다. 육체의 생물로서 이곳에 존재하지만, 도구 없이 인간이 쉬이 닿을 수 없는 곳을 날아가기 때문이다.

 

새가 죽은 사람이고, 인간이 쉬이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를 여행하는 존재를 상징한다면, 그 새로 만들어진 섬은 어떤 곳일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곳은 무덤일 것이고, 여러 혼백이 여전히 활개치고 다니는 곳이라는 점에서 갈라파고스와 같은 신비로움을 유지하는 생명의 섬일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 수 없는 그 섬을 바라보다 보면 어떨까? 상실을 떠올리느라 마음이 욱씬 거리겠지만, 그곳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생생한 기억 때문에 고통만큼이나 치유할 것이다. 백골이 굴러다니는 무덤이자 혼이 돌아다니는 생명의 섬, 그것은 상처와 치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늘 소개할 연극, '새들의 무덤'은 섬이자 무덤에 자신의 역사를 묻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굵직한 역사적 흐름에 따라 한 남자의 인생을 보여주고, 역사의 맥락 속에서 크고 작게 관계를 맺었던 군상과 가까운 사람의 상실을 다룬다. 이 작품은 그래서 역사적이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로 표현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극작가가 앞서 내가 나열한 관점 중 어떠한 관점을 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양쪽을 고려한다는 의미다. 구태여 한쪽을 강조하여 '역사적'으로 만들고 싶었다면, 주인공의 주변인들이 명확히 역사의 희생자로 표현되어야 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역사는 작품의 분위기만 제공할 뿐 주변인들을 역사와 좀 더 동떨어지게 배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어느 쪽에도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

 

나는 극단의 이러한 표현에 공감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장 이 작품의 일부로 표현되는 '세월호 사건'이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건 그곳에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한 쪽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보면, 한쪽 날개를 다쳐 추락하는 새처럼 본질적인 현상- 인간적인 슬픔-을 놓치게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즉각반응의 다른 작품인 '육쌍둥이', '찰칵'도 비슷한 관점으로 인간의 감정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육쌍둥이에도 무자비한 자본의 희생자들을 등장시키지만, 어떤 면에서는 개개인들의 욕심으로 인해 발생한 가족의 개인적인 비극에 초점을 맞춘다. '찰칵'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에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입양 문제가 개입하지만, 작품 내내 그 모녀의 이야기 전개에 초점을 맞춘다.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극단 즉각반응이 연극 '새들의 무덤'을 통해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한 것처럼 느꼈다.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을 고개 돌리지 않고 묘사한 후, 그 사이에서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 관점에서 각색되지 않은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나아가 그 감정을 보존하고 위로하고, 승화시키는 것. 이 작품에서 죽은 영혼들을 끌어내고 위로하는 살풀이 굿을 넣은 장면에서는 정말로 그들이 그러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건, 한 남자의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건 상관없다. 이 작품은 그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의 의도대로, 나는 대부분 관객이 양쪽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이 글을 쓰는 내가 작품의 배경에 살아본 적 없으며, 작품의 주인공인 남자도 아니지만, 그의 경험에 감응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거울 세포 때문이건, 연극의 미세한 서사와 연출이 나의 역사와 공명하건, 인간은 그 사소한 것들로 인해 거대한 집단과 타인의 삶에 감응한다.

 

이 작품의 리뷰를 쓰면서, 이 작품의 이야기나 연출에 대한 섬세한 분석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많은 디테일이 있다. 즉각반응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구태여 미세한 디테일을 분석하지 않기로 한다.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타자기를 두드리는 나의 가장 강력한 자아가 글 기고가라기보다는 감정적인 관객이기 때문이고, 이 작품이 짚는 포인트들을 관객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받아들이기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솔직한 글 기고가로서 게으르지만, 감정적인 관객으로서는 최선이라 확신한다.

 

작품을 보는 내내, 올해 초 아파트 앞에서 죽어버린 아기 새의 시체를 옮기면서 만진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 새가 기절했나 싶어 물을 떨어뜨려 보고 심장 쪽이 두근거리는지 확인했지만, 그 새는 명백히 죽어있었다. 풍성한 깃털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엷은 뼈가 인상 깊었다.

 

나는 주변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벌레에게 가장 덜 뜯어먹힐지 것 같은 밝은 곳에 그 새를 묻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새를 밟을까 봐 인적이 없는 곳에 새를 묻었다. 세상에는 많은 시체가 있고 그 일부는 내가 산속의 벌레처럼 먹고사는데, 내가 가지 못한 먼 곳을 날아다닐 수 있었던 그 연약한 것을 묻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하얀 천 사이에 보이는 여자 배우의 얇은 팔, 그 새를 당장 잃어버릴 것처럼 사랑하는 남자 배우. 이미 죽어버린 연약한 뼈대의 새, 그리고 그 새에게 기묘한 안타까움을 느낀 나. 여자 배우와 새에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닿지 못하는 과거나 이상이 깃든다. 그래서 우리는 새들의 무덤이자 섬을 상상한다. 새가 떨어뜨린 깃털이나 저 멀리 떠있는 섬을 바라보면서 인사를 건네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삶을 이어나가 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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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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