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모임] 가로수길 클럽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야?
글 입력 2024.06.2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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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서는 어쩐지 작은 것 하나하나 주의 깊게 보게 된다. 특히 런던은 내가 상상하던 영국의 길거리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것들이 정말 눈에 띄게 지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길거리의 표지판, 주소판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이 블룸즈버리 거리라 적힌 현판. 울프의 블룸즈버리 클럽과 같은 이름이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며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서점인지 출판사인지 인쇄소인지 편집숍인지 여하튼 그런 것이 있어 더 기막힌 우연이라며 감탄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런던에 있고, 그렇다면 이 블룸즈버리가 정말 그 블룸즈버리렷다.


그들이 거기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안타깝게도 나는 시공간적 한계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내가 그들의 시공간에 살았다고 해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그 대신 나는 이십일 세기의 서울에서 가로수길 클럽에 참여하게 되었다.

 

 

 

가로수길 클럽


 

사실 지하철을 애용하는 나로서는 가로수길보다도 신사역에 간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사 클럽이라는 이름을 지으면 아무래도 젠틀맨들의 모임이 되는 것 같으니까. 사실 신사 클럽만 되어도 최악의 이름은 아니다. 만약 강남 클럽이 된다면… 책 같은 건 감히 펼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현란하게 번쩍이는 조명이 벌써 눈을 어지럽힌다.


어쨌든 내가 마음대로 가로수길 클럽이라 방금 이름 붙인 이 모임은 다섯 번의 만남을 가졌다. 정해진 일정만 따지자면 네 번의 만남을 가지기로 되어 있으나 우리는 서로의 성향 및 책 취향을 파악하는 사전 모임을 한 번 더 갖기로 했다.


새로운 오프라인 취미 모임을 신청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잘 맞지 않는 모임이 만들어지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다. 모든 만남에서 잘 맞는 사람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취미는 특히나 개인의 영역이기에 더 그렇다. 여기서 잘 맞는다는 건 비슷한 종류의 책을 읽는다거나 비슷한 주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도 살짝 다르고, 흔히들 말하는 ‘코드가 통한다’와 그나마 가까운, 지독히도 애매모호한 기준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적이다 못해 이기적이기까지 한 이 기준에 부합하는 모임에 성공할 자신이 없어 걱정이 앞섰으나, 내가 항상 그렇듯 그리고 알고 보니 세상만사가 그렇듯 어영부영 모임 날이 다가왔고 네 사람이 가로수길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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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단편 중 제목이 <네 인생의 이야기>로 번역된 작품이 있는데 이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네’를 숫자 4로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당신’에 해당하는 말이었지만 첫인상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저 제목을 볼 때마다 인생 네 가지의 이야기를 먼저 떠올린다.


미리 말하는데 저 단편을 우리 모임에서 같이 읽은 건 아니다. 첫 모임에서 가볍게 언급된 적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마저도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냥 서로 다른 네 사람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썼다. 인생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모임에 쓰기에 거창한 감이 조금 있긴 하지만 소제목을 먼저 정하고 꼭지를 쓰는 경험은 내게 드물기 때문에 강행한다. 우리가 정말 개개인의 삶을 대화의 중심에 놓았던 건 아니지만 우리가 책을 읽으며 가진 제각기 다른 생각들이 결국 우리가 각자의 인생 대표로서 입을 열었기 때문에 나온 것일 테니까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소제목의 정당성을 위한 말을 좀 더 늘어놓자면, 우리가 함께 읽은 네 권의 책이 각각 네 인생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이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곧잘 비유되곤 하니까. 우리가 살아 본 네 인생은 순서대로 샐리 루니의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그리고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이재박의 <다빈치가 된 알고리즘>, 마지막으로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다. 첫 두 권과 마지막 두 권을 각각 문학과 비문학, 또는 해외 작가와 국내 작가로도 분류 가능하다. 우리가 굳이 다양성을 고려하여 책을 고른 건 아니었음에도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네 권의 책이 뽑혔고 덕분에 우리도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가 워낙 길고 불규칙하게 흘러갔기 때문에 말끔하게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대충 큰 주제만 떠올려보자면……? 떠오르지 않는다. 최소 두 시간, 가끔은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떠들었던 것 같은데 왜…… 강의 들으면서도 안 하는 필기를 여기서는 했는데…….

 

 

 

가로수길 클럽이 극복한 한계와 극복하지 못한 한계


 

이 시점에서 내가 이전에 가졌던 독서 모임과 이 가로수길 클럽을 비교해 볼 수 있겠다. 난 이전에 친한 친구들과도 독서 모임을 꽤 오래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 모임도 분명 즐거웠으나 분명한 한계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우리가 유유상종의 표본이었기에 우리끼리 대화해서는 도저히 새로운 의견이나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모임은 지식의 교류 현장이라기보다는 네 마리의 개구리가 모여 앉아 지구의 핵을 뚫을 기세로 한 우물을 파고 또 파는 모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가로수길 클럽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사람이 주는 새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남의 우물에 놀러 가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궁금해했던 다른 우물을 들여다보았고, 또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우물까지 알게 되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니’라는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어 즐거웠다.


친구들과 한 독서 모임의 두 번째 한계는 대화가 정말 막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친한 사이다 보니 어떤 주제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데다가 형식이 있는 모임도 아닌지라, 정신 차려 보니 주제가 되어야 할 책은 저 뒤편에 홀로 남겨져 우릴 애타게 부르는데 우리는 새로 찾은 주제에 빠져들어 책의 존재를 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가로수길 클럽에서도 극복할 수 없었다. 이 클럽의 대화도 만만찮게 급발진이 심했다. 핸들은 어디로든 돌아가고 브레이크는 없되 엑셀은 많다. 운전석에만 하나 있어야 할 엑셀이 각 좌석에 하나씩 부착되어 있으니 기나긴 대화의 주제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의 대화를 필기가 아니라 녹음을 했어도 다시 들어보면 그 맥락을 따라가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문제점이 아닌 듯하다. 앞서 말한 그 애매모호한 기준에 맞는 사람이, 그것도 네 사람이나 한자리에 모이면 당연히 생기는 일로, 한계나 문제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도리어 반가워해야 할 일이리라는 것이 최종 결론. 그냥 우리가 원하는 대로 대화가 튀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즐거운 모임이 완성되었을 테다.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야?



가끔 정신없이 떠들다 보면 종잡을 수 없는 대화 흐름에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곧이어 ‘그래서 좋다’는 답이 나왔다. 모든 모임에 큰 기대를 하고 가서,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얻어 돌아온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어디까지 가는지 절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블룸즈버리 클럽의 대화도 별로 안 궁금하다. 거기도 비슷하게 흘러갔을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도 블룸즈버리 클럽의 모임이 끝나고 혼자 남으면 ‘아 오늘 진짜 많은 말을 했고 정말 재밌었는데 놀라우리만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잊힌 것 같은 모임의 산물은 울프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다가 그의 예술 활동에 어떻게든 기여하지 않았을까.


2월에 결성되어 6월까지 이어진 가로수길 클럽은 여름맞이 변모를 맞이하는 중이다. 구성원 중 두 사람은 계속해서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고(?), 한 사람은 넉 달 뒤에(??), 한 사람은 오 년 뒤에 재합류하기로 했다(???).


네?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물론 그래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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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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