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투명해져도 노래를 부르고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7.0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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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십삼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의 폭력은 더 노골적인 쪽으로

그걸 감추는 힘은 더 교묘하게 감추는 쪽으로 움직여왔습니다만,

그간 전야를 생각하는 일과 조심하는 마음을 저는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황정은, 百의 그림자, 2022, 창비>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자꾸 사라지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도 무력감이 앞섰다. 생각을 하는 일이 버겁고 또 그것을 버거워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는데 글을 쓰기엔 도무지 기력이 생기질 않았다. 한동안은 쓰기보단 읽기를 가까이 했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이 소설을 다시 찾았다.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라 좋았다. 끝끝내 단념하지 않은 사람의 글. 십수 년의 시간 이후 문득 이 소설이 복간되었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간만에 감상을 남겨 본다.

 


 

그림자답지 않은그림자


 

은교와 무재는 곧 철거를 앞둔 도심의 한 전자상가에서 만났다. 둘은 각각 여씨 아저씨가 운영하는 수리실의 잡무 담당, 트랜스 공방의 견습공이다. 오래되고 영세한 상점들이 모여있는 상가에는 그들을 비롯해 복권 살 이천 원을 꾸러 오는 유곤, 오랜 단골 손님들 등 여러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데 이 공간은 불안정의 공간이다. 이들의 터전은 재개발로 인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작중에서는 여러 차례 묘사된다. 은교와 무재가 일하고 있는 동은 아직 철거되지 않았지만 철거 대책 회의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으며, 상점들은 몇 군데 걸러 하나씩 비어 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상가,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착수되며 동은 밀려버리고, 그 인근의 오랜 전구 가게인 오무사는 사라진다. 밀린 자리에는 이따금 축제가 열리고, 공원이 생긴다.

 

은교와 무재는 그 공원에 찾아가 앞으로의 거처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는 무척이나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다. 공방을 옮길 적당한 장소를 찾기가 어렵다는 무재의 말에 은교는 찾을 수 있을 거”(128)라며 막연한 대답을 건네지만 사실 그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129)하고 덧붙인 말 뒤에는 그런 확신 없음에서 비롯한 침묵이 뒤따르고, “어디로 갈까”(129)하는 무거운 질문으로 무거운 침묵을 깬 무재에게 은교는 또 한 번 대답을 잇지 못한다. 할 수 있는 말은 눈 앞의 광경이 조용하고 예쁘다는 말뿐이다.

 

은교도, 무재도 알고 있다. 상가는 누군가에겐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126) 단순한 재개발 터지만, 누군가에겐 생활계”(126)인 공간이며, 그렇기에 어떤 장소도 완벽히 그를 대체할 순 없다는 것을. 존재는 공간을 필요로 하기에, 어떤 공간은 존재에 진득이 얽힌 채로 누군가의 소중한 일부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은 좀처럼 변하질 않”(142)아서, 돈과 힘의 논리에서 밀려난 이들에게는 그 소중한 것들을 무언가에 내어준 채 마음이 텅 비게 되는 경험이 유독 잦다는 것을.

 

작가인 황정은은 인터뷰를 통해 의 그림자사회가 구석으로 몰아내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이렇듯 구석으로 몰리고’, ‘지워진다는 속성은 비단 전자상가와 그 속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작중에서 '그림자가 일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속성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설정은 바로 그림자가 일어난다는 것이다이는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말 그대로 그림자가 물리적인 탈부착이 가능한 상태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평생의 일터를 잃게 된 여씨 아저씨도 이따금 그림자가 일어나고, 비슷한 처지의 오무사 할아버지도 가늘고 홀쭉한 그림자 하나”(121)가 일어났지만, 소설은 상가 사람이 아닌 여씨 아저씨의 친구, 무재의 아버지, 유곤의 어머니 등의 그림자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도 묘사한다.

 

그들의 그림자가 일어나게 된 계기는 제각기 다르지만, "절망스럽고 무력감을 느낄 때, 무기력할 때” 그림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평생을 자식의 유학 뒷바라지에 바쳤으나 그 사실이 완전히 모욕당했거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졌거나, 끔찍한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었거나. 결국 모두 삶에서 밀려나는 경험을 겪은 이들이다. 내몰리고 또 밀려나서, 자신에게는 너무나 선연히 존재하는 이 고통을 어찌할 바가 없는 사람들. 고통이 너무 선명해서 막상 제 존재가 희미해진 사람들.

 

그림자는 그가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그건 어찌 되었든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것들의 표식이다. 그림자는 물체를 모방한다. 물체가 이 땅에서 살아간다면 그림자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런데 이 표식이 그림자답지 않게발을 떼고 일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상 같은 것의 중력에 더 이상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훌훌 날아가고 싶을 만큼 강력한 절망과 고통을 느낀 이들의 마지막 호소 아닐까.

 

호소는 그 자체로 강력한 에너지를 가졌지만, 그 에너지를 어떤 방향으로 흘려내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50)하며 견뎌보기도 하고, “따라가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으니 살 수가 없”(21)어서 자꾸 죽음으로 이끌리기도 하는 것이다. 내몰린 사람들, 다시 말해 버티고 서 있는 일에는 완전히 이골이 났을 그 사람들에게, “맥없이 따라가다보면 왠지 홀가분”(34)하니 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강력한 유혹이기에.

 

 

 

투명해지다


 

그런데 그림자가 일어난다는 일을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있어야 할 그림자가 없게 되는 또 다른 방식에 대해. 분명 존재하지만 그림자가 생겨나지 않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들은 결국 유리처럼 ‘투명성’을 가진 것들이다. 그림자가 본떠야 할 물체는 그 스스로 존재하기를 체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한편으로 체념‘당한’ 것일 수도 있다. 밀려난다는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투명해졌다는 것이다. 그림자가 일어나는 사람들,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려 비가시화된 채 투명 인간처럼 취급되는 존재들. 바로 그런 이들의 그림자가 ‘일어난다’.


앞에서도 그들의 비가시성과 소외에 대해 논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투명했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은교가 무재의 마뜨료슈까를 실수로 망가트린 일을 사과하자 그에 대해 돌아온 무재의 대답을 잠시 살펴보자.

   

  
이런 것들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것을 남기고 죽는구나, (…)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158-159)
 

 

무재는 같은 모양이 반복되기만 할 뿐 사실상 그 안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마뜨료슈까처럼, 어떤 인간의 삶이든 삶은 그 자체로 조금 공허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 사건을 계기로 조금 바뀌게 된다. 폐지를 주워 생활하던 이웃 할머니가 다른 폐지 줍는 노인과 박스를 두고 다툰 이후 그림자가 일어났고, 결국 그를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박스 몇 개에 생계가 좌지우지되는 이들은, 말마따나 고작 그 박스 몇 개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모든 삶은 어느 정도로 허망할 수 있지만, ‘유독’ 더 허망하고 투명한 삶과 죽음이 있다. 그들이 그림자를 일으킬 만큼 ‘정도 이상으로’ 투명하게 된 까닭에는 분명히 어딘가 인위적인 부분(빈곤, 불평등, 일자리 분배 등의 사회구조적 문제)이 있다. 무재는 그 사실이 인간 삶의 허망함보다 더욱 무력하고 허망하다는 것이다. 투명해져 그림자를 붙잡아둘 힘이 없는 사람들.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들 역시 원래 어딘가 공허할 수는 있지만, 파사삭 소리를 내며 깨진 마뜨료슈까처럼 분명히 아직은 깨지고 부서질 부분이 있는, 존재적 양감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들은 태초에 사람이었고,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했으나, 외부에 의해 점차 그 존재감을 박탈당한 이들이다.


그리고 세상이 이들을 ‘투명하게’ 만드는 방식에 대해서는 “가마”와 “슬럼”의 유사성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무재와 은교가 두 가지 화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각각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는데, 대화 속에서 설명되는 가마와 슬럼의 특성은 서로 상당히 닮아 있고, 그들의 대화 형식 역시 닮아 있다.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씨가 말했다./전부 다르게 생겼대요./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그렇대요?/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그런가요./가마./가마./가마./어렵다./어렵죠. (41-42)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그런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그런 걸까요./슬럼, 하고./슬럼./슬럼./슬럼./이상하죠./이상하기도 하고. (126-127)

 

 

사실은 모양이 모두 다른 가마를 ‘가마’로서 통칭하기에, 그 명칭은 가마끼리의 차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가마, 가마, 하면서” 말을 거듭해 보면 어딘가 이질감이 드는 건 그 때문이라고 무재는 말한다. 나를 설명하지 못하는 말에 대한 가마 나름의 반항인 것이다. 어떤 통계나 총칭 속에서 생략되고 묵음 처리되는 개개의 특성들. 그것이 인간의 문제가 될 때는 더욱 그 무게가 무거워진다. “슬럼”이라는 명칭처럼 ‘뭉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공간에 얽힌 무재의 유년 시절의 기억, 그 이후의 시간, 고통, 모든 마음들.

 

무재뿐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세계라는 말처럼 간단한 설명으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개개의 고유성과 역사를 가졌다. 각기 다른 가마처럼 말이다. 그런 존재의 맥락이 간과되는 순간, 이해받지 못한다는 감각은 얼마나 가혹한가.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2018, p. 390.

 

 

이렇게 사회가 각자의 삶이 가진 입체성을 납작하게 내리누르는 과정 속에서 고유함은 빛을 잃고, 누군가의 현실은 그저 건조한 문자 몇 개면 담아낼 수 있는 평범한 사연이 된다.


효율의 이름 아래 “슬럼” 정도의 표현으로 존재가 요약당하는 경험. 그런 경험 속에 빚어진 상처를 호소하고 또 반항하는 방식이 어쩌면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그림자를 일으키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의 압력 속에 그림자를 붙잡아둘 수 없을 만큼 투명해져 버렸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림자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실재, 한 명의 사람이라고.


 

 

그래도 어둠 속에서 노래 부르는 마음


 

소설은 그림자와 물체간의 불가분성을 환상의 형태로 비튼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이 빚어진 이유는 그림자를 빚어낼 물체가 희미해지기를 택했거나, 혹은 희미해지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을 보면, 자연스럽지 않은 고통들이 비재하나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무마하는 현실을 반추해보게 된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소설 속 인물들이 고통을 대하는 무던한 태도가 곧 소설 자체의 태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를 둘러싼 이 어둑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소설이 한데 감싸 안는 방식은, 결국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그림자가 일어나도 화단에 청개구리를 풀어주고 걱정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65-66), 좋아하는 사람의 쇄골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것이 반듯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43), 떡잎 모양 화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60) 소설에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계속해서 그려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매우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비단 연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연인들의 이야기지만 결국 이 사랑은 삶과 세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결말부의 은교와 무재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마주치게 될 누군가를 상정하고 노래 부르는 것처럼.


한때 은교는 그림자에 이끌려 숲을 헤매고, 정전이 된 방에서 어둠이 두렵다 못해 차라리 이 자신이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99)어 어둠 속에 녹아들 수 있게 되면 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늠하기도 했다. 이때의 어둠은 꼭 정전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삶이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컴컴하고 막막할 때, 그 시커먼 광경이 두렵기만 할 때, 살아내서 빛을 보려는 의지를 놓아버린다면, 그림자를 일으킨 채 그를 따라간다면, 오히려 편안해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재 역시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삶의 허망함을 일찍이 배웠고, 그 이후로도 그림자가 꾸준히 일어났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제 둘은 서로가 한없이 투명해지도록, 어둠에 몸을 내맡기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은교가 어둠을 무서워할 땐 무재가 노래를 불러주고(106), 사방이 어두운 섬에서 무재가 “어둠의 입”(182)에 먹힐 것만 같을 때 은교가 그의 손을 잡고 나가보자며 이끌었던 것처럼. 누구의 것인지 모를 그림자가 이따금 일어나도 은교는 더 이상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184)다. “노래할까요.”(185)하고 나지막하게 물어오는 마음의 존재를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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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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