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 가지 상실과 인간 [도서/문학]

단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2019)
글 입력 2024.06.3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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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현실에 맞닿지 못한 허구, 충분히 밀고 나가지 못한 상상에 아쉬워하면서 나는 김초엽의 단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많이 떠올렸다. 가장 먼저 생각난 이야기는 「관내분실」. 죽은 사람의 재현과 교류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설정이 영화 <원더랜드>와 직접적으로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다시 들춰보다가, 역시나 너무 좋은 이야기들이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이야기를 다시 정독하고 있었다.

 

처음 읽을 때와는 다르게 뻗어나간 생각들을 공유해보려 한다. 「관내분실」, 「스펙트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세 가지 단편은 세 가지 다른 모습의 상실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삶에 어떤 의미를 드리우는지, 또한 그 의미를 경유하여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지 새삼스레 다시 그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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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내분실」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현실의 고통을 소환한다. 제목 그대로 도서관에서 어떤 자료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주인공 지민이 전해 들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도서관은 책을 소장하는 곳이 아니라 “사후 마인드 업로딩”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분실된 자료는 죽은 엄마의 “마인드”이다.

 

마인드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은 그의 마인드만을 특정할 수 있게 하는 “인덱스”를 누군가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억과 행동 패턴 자체를 업로드한 것인 마인드는 문자나 이미지 등 언어로 정의될 수 없기에 마인드를 구분하기 위해 검색 가능한 데이터를 덧붙여 놓은 것이 없어져서 엄마의 마인드를 불러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마인드를 다시 찾아내기 위해선 그것만이 각별한 반응을 보일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 지민은 엄마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가 깨닫는다.

 

 

“엄마를 특정할 물건 하나가 없었다.

엄마는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인덱스가 지워지기 전에도.”

 


얼마 전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나의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인가, 그런 얘기가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다른 답들을 듣는 동안 불현듯 선명한 답이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무서워.’

 

그때 나는 그 ‘실패’가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바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어렴풋해도 모두가 분명 같은 공포를 그리고 있었다. 그 공포는 「관내분실」에서 지민이 떨쳐낼 수 없었던 죄책감과도 같다.

 

어느 날 문득 뒤돌아봤을 때 ‘나’를 ‘나’이게 하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주어진 연결고리가 하나둘 떨어져 나간 이후의 고독을 버텨낼 수 있을 만큼 내 자아는 선명할까? -한때 절대적인 존재였던 부모가 실은 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순간엔 이런 연약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나의 보호자이기 위해 그들이 자신을 지불해야만 해서 저 고민에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 정말 무서운 상상이다.

 

나의 공포와 지민의 죄책감은 같은 곳에서부터 흘러왔다. 인간이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연결되고, 그것이 자신을 구성하며, 그래서 ‘나’는 ‘나’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지민은 당신의 고독을 이제는 이해한다고, 되찾은 엄마의 마인드에게 말하지만, 가소적으로 변화할 수 없으며 ‘나’는 ‘나’라는 믿음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마인드에게 건네진 말은 너무 뒤늦다. 상실 이후는 오로지 남겨진 이들에게만 주어질 뿐이다.

 

 

 

2.


 

「스펙트럼」은 내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선입견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로를 있는 그대로 감각하고, 말 그대로 땅과 하늘의 거리보다도 더 먼 두 세계가 서로를 다정하게 들여다보는 관계는 아름답고 신비롭다. 이러한 관계는 외계 지성 생명체와의 “최초의 조우자”라고 주장하는 주인공 희진이 우주 탐사대에서 홀로 살아남아 일체의 관찰과 분석을 위한 도구를 잃어버린 무력한 상태로 머나먼 행성의 “무리인”과 맞닥뜨렸으며, 그들에게 신기하게도 인간의 긍정적인 특질과 유사하게 친절하고 상냥한 마음이 존재했기 때문에 시작될 수 있었다.

 

도구와 언어의 매개 없이 낯선 세계의 낯선 존재와 서로를 향하는 다리를 놓는 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원래 희진의 세계는 현미경 속에, 정량화된 데이터 속에, 그래프와 숫자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행성은 오직 희진을 둘러싼 풍경으로만 존재했고 희진은 그 사실을 수용해야 했다.“

 


도구를 사용해서 감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얘기된다. 특히 오늘날의 우리는 세상을 직접 느끼는 게 아니라 매개된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 더 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적인 예로 나는 지난 평일 내내, 휴일인 지금 이 순간조차 모니터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서 매개 수단을 박탈했을 때, 그럼에도 인간다운 무언가가 남아 있을까? 「스펙트럼」을 읽으면서는 서로에게 뻗어나가는 관계의 다리들이 남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놀랍도록 인간과 닮은 점이 많은 외계 지성 생명체 무리인이 인간과 가장 다른 지점은 그들에겐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아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몸을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전달될 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당신이 무리인이고 지금 이 순간 죽게 된다면, 당신과 거의 모든 면이 동일한 (하지만 조금쯤은 다르기도 한) ‘다음’ 당신이 당신의 모든 기억, 행태, 사고를 물려받아 같은 자아로 이어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아를 넘겨받는 것은 결국 무리에서 어떤 개체의 특성이 구분되고 또 그러한 특성을 다른 개체들이 인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모든 특성을 그대로 받아들인 바로 저 개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누군가’라고-예를 들어 희진의 소중한 타자였던 ‘루이’라고- 인지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희진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같은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한 루이와 다른 루이, 또 그다음의 루이는 ‘루이’, 희진의 선량한 보호자가 되어 준 바로 그 루이가 되게 되었다. 그리고 루이에게 희진도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 낯설지만 미소를 건넬 만한 타자로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희진이 그런 낯선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루이의 세계를 맨몸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뛰어난 자질을 몇 꺼풀 벗겨내고도 더 깊은 곳의 인간적인 무언가가 남을 거라는 상상이 참 다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3.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단편의 제목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건,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걸 거스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우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이야기 속에서 인류는 “워프 항법”의 시대를 지나 혁명적인 “고차원 웜홀 통로” 항법을 통해 안전하고 빠른 성간 항해를 할 수 있는 우주 개척 시대를 살아간다. 시대가 전환되던 그 순간을 주인공 안나는 생경하게 돌아본다.

 

그가 워프 항법을 보조하는 핵심 기술의 개발 성공을 눈앞에 둔 순간 고차원 웜홀 통로를 통한 항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발견되고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더 효율적인 기술이 나온 이상 이전의 기술은 사양의 길을 걷기 마련이며, 그 길에 함께 휩쓸려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우리는 익숙하게 안다.

 

우주 개척의 영역에서 이 내리막길의 경사는 너무 가팔라서, 워프 항법으로 개척된 슬렌포니아 행성은 한순간에 닿을 수 없는 “먼 우주”가 되어버렸다. 슬렌포니아에 닿는 고차원 웜홀 통로가 없고, 워프 항법으로 우주선 운행을 계속하기엔 고차원 웜홀 통로 항법보다 지나치게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안나는 가족이 있는 곳에 닿기 위해, 올 거라는 기약이 없는 슬렌포니아행 우주선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안나는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기 위해 “딥프리징”이라는 기술을 통해 언 채로 세월을 보냈다. 너무 긴 세월이 지나 슬렌포니아의 가족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일 것이다. 그래도 안나가 먼 우주로의 여정을 떠나야만 하는 건, 사랑하는 이들을 상실했다는 것을 지금, 이곳에, 상실이 있는 바로 그곳에 발붙인 채로 감각하고 슬퍼할 권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관계에 온점을 찍는 일은 피하고 싶어도 어쩔 도리 없이 모두에게 덮쳐오는 사건이고 온전한 애도만이 그 매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점점 더 많이 남겨져 가는 사람들의 존엄한 권리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에 사회적 비용을 들이는 일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현실도 분명 이야기 속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근원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데에는 너무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서, 언제나 우선순위 저 아래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모든 것이 더 합리적이고, 날로 더 부강한 사회에서 살아가며, 그러나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독한 존재가 되어버린 우리는 각자 어디로 향하는 우주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영영 출발하지 않게 되어버린 우주선이 실은 우리가 올라탔어야만 하는 우주선이었던 건 아닐까. 모두를 뒤에 남기고 말 거라면 인류는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전진하고 있는 것일까.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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