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레임으로부터의 속박과 해방 [영화]

글 입력 2024.06.3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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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2023). 이를 두고 혹자들은 주제나 형식의 측면에서 그것의 참신함을 예찬한다. 과연 그러한가. 우선 형식을 보자. 동일한 타임라인을 다양한 인물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관객의 예상을 배반하고 은엄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은 으레 창작물이 극적인 효과를 꾀하기 위해 애용해 온 플롯이지 않은가. <라쇼몽>(1950)을 위시해 <엘리펀트>(2003)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 자장에 속한다.

 

주제 면에서는 어떠한가. 조금 범박하게 압축하자면, <괴물>의 골자는 타인을 손쉽게 재단하는 행태의 폭력성을 들추는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뼈대를 바탕으로 오늘날 비근한 마녀사냥과 성소수자를 향한 배타적 시선에 대해 설파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 역시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다. 전자의 경우, <더 헌트>(2013), <소셜포비아>(2015), <죄 많은 소녀>(2018)가 있다. 후자의 경우, 학원물과 퀴어 코드가 접목된 영화로만 좁혀봐도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4), <야간비행>(2014), <어바웃 레이>(2016), <톰보이>(2020) 등의 근작이 다수 있어, 소재의 기시감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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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괴물>의 논의점은 주제나 형식의 개별적 측면이 아닌, 두 요소를 긴밀하게 조응시키는 방식에서 응당 찾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프레임’이 있다. <괴물>은 ‘프레임’을 통해 각자의 ‘프레임’에 얽매여 불화하는 인간들을 다룬다. 여기서 전자의 프레임은 영화 이미지의 조형적 기틀을, 후자의 프레임은 인간의 인식적 기틀을 함의한다. 나아가 영화는 이미지 - 기호의 반복, 이차 프레임의 삽입, 탈 프레임화, 프레임의 공백과 개방을 경유해 극중 인물들이 그러한 인식적 프레임으로부터 어떻게 포박되고 한편 해방되는지의 양상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따라서 필자는 <괴물>이 ‘프레임’을 소재로 영화의 형식과 주제를 어떻게 합치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톺아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독자와 필자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영화를 크게 3개의 막으로 분할해 표기했음을 주지한다. 사오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단락이 1막, 호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단락이 2막, 미나토의 시점을 위주로 전개되는 단락이 3막이다.

 

 

 

1. 프레임으로부터의 속박


 

전술했듯 <괴물>은 동일한 타임라인을 크게 세 명의 시점을 경유해 새로운 진실을 공개하거나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플롯을 취한다. 그로써 기억의 편린으로 타인을 쉽게 재단하려는 욕구의 폭력성에 대해 웅변한다.

 

사오리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1막은 그녀가 아들인 미나토의 이상 행동을 감지하고 그의 증언에 기반해 담임인 호리의 책임을 추궁해가는 것을 화두로 삼는다. 한편 호리의 시점으로 반전되는 2막에서는 그가 사실 살뜰한 담임이었음이 밝혀지며, 도리어 미나토가 동급생인 요리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이는 정황들이 포착된다. 그리고 종반 3막에 다다르면 그러한 가정 역시 철회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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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영화가 부러 표지를 제공하지 않음에도, 막의 전환, 시점의 전환을 가늠할 수 있게끔 기능하는 것은 두 가지 지표(일종의 이미지-기호)다. 1막과 2막은 모두 마을의 한 상가에서 발생한 화재를 전경으로 비추는 것으로 포문을 열고, 마을에 들이닥친 태풍을 비추며 문을 여닫는다. ‘말하기(telling)’가 아닌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 서사의 단락을 구분하는 셈이다. 이는 두 개의 막을 일종의 닫힌 구조 즉 프레임으로 인식되게끔 하는 효과를 낸다.

 

그러한 ‘닫힌’ 형식은 해당 막에서 영화가 질료로 삼는 것과 긴밀히 상통한다. 괴물을 추적하는 것에만 천착해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한 채, 도리어 진실을 왜곡했던 두 어른의 ‘닫힌’ 인식을 증명하는 구간의 기틀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2막의 닫힌 구성(프레임)은 두 어른의 인식적 기틀(프레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아가 막을 열고 닫는 두 가지 재난은 인식적 기틀(프레임)에 얽매여 서로를 오해하고 비난하는 인간의 관계적 재난을 암시한다.

 

보다 미시적으로 살펴보자면, 프레이밍의 과정은 극중 이차 프레임의 삽입으로 더 직접적으로 시각화되어 제시된다. 이를테면 영화의 1막 중에는 사오리와 미나토가 식탁에 앉아 몰래카메라 관찰 예능을 시청하는 시퀀스가 있다. 사오리는 몰래카메라인 것을 알고는 격동하는 여성 연예인에 대해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며 웃어넘기지만, 미나토는 “TV에 나오니까 거짓말인 걸 아는 거지”라며 대꾸한다. 카메라는 이어 사오리와 미나토의 후면을, TV 화면을 정면으로 내화면에 한데 포착해 자연스레 그들을 객석의 관객과 동기화시킨다. 그러한 설정은 영화의 프레임을 주지함과 동시에 제 인식적 프레임에 함몰되어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극중 인물들과 3막에 이르러 모든 정보를 공유 받는 관객의 간극을 은유한다.

 

뿐 아니라 미나토의 스마트폰 화면 역시 그러한 이차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극중 영화의 카메라는 화마로 휩싸인 상가를 수차례 포착하는데, 이는 당시 현장에 있던 미나토의 학급 친구들의 인스타 라이브 방송으로 송출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현장 인근에서 호리가 여자와 동행했다는 것을 빌미 삼아 그를 화재가 발생한 상가에 있던 걸스바의 여성들과 엮는다. 이후 그러한 거짓 소문은 점차 사실로 굳혀지게 되고, 호리는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변태 선생’으로 낙인찍힌다.

 

루이 마랭은 프레임에 대해 ‘재현을 절대적 현전의 상태로 상정하며, 재현에 대한 시각적 수용 혹은 응시의 조건들과 관련해 정확한 규정을 제시한다’고 했다. 즉 프레임은 시각 주체 혹은 창작 주체의 규정을 바탕으로 구성된 타자에 대한 재현의 공간이다. 가시화된 실체적인 프레임이건, 인식 상의 프레임이건 간에 ‘프레임’은 주체의 의도와 주관, 이념과 불가분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프레이밍은 타자화의 폭력을 배태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앞선 두 설정은 그러한 프레임을 통한 타자화의 과정을 증명하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TV 스크린 속 여성 연예인과 스마트폰 화면 속 호리는 시선의 주체의 유희적 목적에 속박되어 무지하거나 부덕한 인물로 희화화된다. 2막에서 호리의 연인이 화재 현장을 연이어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재난에 준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주체와 분리된, 타자의 영역에 멀찍이 둠으로써, 이를 일종의 스펙터클처럼 관람하는 것이다.

 

호리가 집에 들이는 관상용 금붕어 역시 두 소년의 처지를 대변한다. 2막의 초반부, 호리는 새로 구매한 금붕어를 어항에 옮긴 뒤, 홀로 몸을 뒤집지 못하는 한 마리를 발견하자 이를 병어(病魚)로 치부한다. 이때 호리와 금붕어를 가르고 있는 어항은 주체와 타자의 경계 즉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경계 밖 인식 주체인 호리의 시선과 기준에 의거해 어항이라는 프레임 속 물고기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진단되는 것이다.

 

대상의 특질에 대한 규정은 사회적 합의나 보편적인 사례에 기반한 것에 불과하다. 성적 지향 역시 마찬가지다. 푸코는 ‘합리성, 이성, 도덕은 사실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할지의 논리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때 선택되고 인정된 것은 ‘동일자’가 되고, 배제되고 누락된 것은 ‘타자’가 된다. 즉 이성애와 동성애를 비롯한 주류와 비주류의 구도는 ‘옳음’과 ‘틀림’, ‘정상’과 ‘비정상’이 아닌, ‘선택’과 ‘배척’의 문제로 치환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 체계 내의 교육을 거쳐 정신과 신체의 무의식적 통제를 받게 되면서 비주류는 자연스레 ‘틀림’, ‘비정상’의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학습은 때로 소수자 그 자신에게도 체화되어 발현된다. 극중 미나토가 내비치는 감정적 동요와 정체성의 혼란이 그것이다. 3막의 초반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요리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 미나토는 그날 밤 자신의 머리카락을 직접 가위로 자른다. 이때 그의 상반신이 비치는 ‘거울’은 미나토의 (제 자신을 사회의 시선에 맞춰 교정하려는) 억압된 내적 자아를 상징하는 이차 프레임이다.

 

나아가 그러한 프레임의 존재를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는 주민들로부터 기찻길로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진 ‘철창’이다. 폐터널과 폐열차를 지나 풀숲 이곳저곳을 누비던 두 소년은 철창에 이르러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이는 두 소년을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상성’의 범주에 감금하고자 하는 이차 프레임이다.

 

 

 

2. 프레임으로부터의 해방


 

이렇듯 <괴물>은 이미지 - 기호의 반복과 이차 프레임의 삽입을 경유해 인식적 프레임에 속박된 인물들의 처지를 시각화하는데, 한편으로는 탈 프레임화를 통해 그로부터 인물들이 어떻게 해방되는지를 묘사하기도 한다.

 

‘탈 프레임화’는 이미지의 기틀이자 경계로서의 프레임의 속성에 대한 전복과 위반, 해체에 토대한다. 즉 시선을 유도하는 내화면과 상상을 유도하는 외화면의 장악력이 비등해질 때, 즉 현실태와 잠재태의 장악력이 비등해질 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한 탈 프레임의 양상은 3막(세 번째 막)의 열린 구성에서 확인된다.

 

앞서 언급했듯, <괴물>은 3막으로 구성되며, 그중 1,2막은 화재로 문을 열고 태풍으로 닫는, 일종의 닫힌 구성(프레임)을 취해 인식적 프레임과 이에 갇혀 불화하는 어른들의 현실을 다뤘다. 눈여겨볼 점은 3막의 경우 의도적으로 그러한 시작점과 종점을 비껴간다는 것이다. 나아가 3막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을 통한 추측과 재구성을 요함으로써 탈프레임화를 추동한다 (1,2막의 시작점이 되는 화재의 경우, 외화면에 대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이내 화재 현장을 먼발치에서 목도하는 요리의 모습을 포착해 그가 방화범임을 주지하며 다시금 재프레임화한다)

 

먼저 3막의 시작은 교장이 수감된 남편을 면회하는 장면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중, 남편이 손녀의 묘에 관해 묻자, 카메라는 180도로 회전해 투명한 유리창 뒤편에 놓인 교장의 얼굴을 포착한다. 때문에 전사를 감안하지 않고 접한다면 마치 남편이 아닌 교장이 수감된 듯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이로써 영화는 사실 손녀를 차로 친 주범은 교장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죄의식에 속박된 그녀의 내면을 형상화한다. 나아가 남편의 물음에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아들이 묘를 따로 쓰겠다고 전했다며 답하는데, 이 역시 내화면 바깥에서의 모자 관계의 이격에 대해 가늠하게 한다.

 

3막의 종점 또한 관객의 개입을 요한다. 초원을 내달리던 두 소년을 비추다 이내 화면을 암전해버리며 그들의 미래를 미결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글의 후반부에 부연하려 한다). 이러한 설정들을 미루어 본다면, 3막은 닫힌 구조에서 열린 구조, 프레이밍에서 탈프레이밍으로의 형식적 변환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관계적 재난을 암시하는 두 기호로부터 이탈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인식적 프레임으로부터의 해방을 지시하게 된다. 이는 모든 진실이 투명히 공개되고, 두 소년의 소우주와 그들이 해방에 이르는 과정을 좇는 3막의 서사와도 공명하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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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괴물>은 프레임의 개방 혹은 공백을 통해 소년들의 해방을 구체화하기도 한다. 그중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미나토와 교장이 음악실에서 금관악기를 연주하는 시퀀스에서의 ‘열린 창문’을 통한 암시다. 앞서 전술했듯 미나토는 자신의 주관과 사회적 시선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다가오는 요리를 밀치거나 그 자신마저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연히 조우한 교장과 음악과 언어로 느슨한 연대를 형성하면서, 미나토는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고 요리와의 동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 순간, 미나토의 자아가 의탁된 호른 연주 소리는 음악실의 열린 창문(프레임)을 통해 외부로 전파되는데 이는 미나토의 봉쇄된 자아를 상징했던 거울(프레임)과 대척되는 것으로, 그의 해방을 암시한다.

 

후자 즉 프레임의 공백을 통한 묘사는 주로 두 어른 - 사오리와 호리가 아이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3막에 이르러 영화는 극중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가르는 기능을 하기도 했던 프레임으로부터 소년들을 이탈시키려 든다. 폐열차의 상단 창문을 활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요리의 글을 단서 삼아 내막을 알게 된 두 어른은 소년들의 비밀 아지트이자 현 소재지라 추정되는 폐열차에 당도한다. 그리고 흙탕물로 뒤덮인 창문을 쓸어내리며 내부를 확인하려 한다. 이때 카메라는 열차 내부에서 그 창문을 클로즈업해 한동안 주시하는데, 분연히 창문을 쓸어내려도 빗줄기와 흙더미로 뒤덮여 창문은 더욱 불투명해진다.

 

하는 수 없이 두 어른은 겨우 창을 열어 내부를 탐색한다. 그러나 이때 영화는 부감 숏으로 이미 물에 잠겨버린 폐허를 조명한다. 이때 물로 잠식된 폐열차의 내부는 앞서 언급한 몸을 뒤집지 못하는 금붕어가 담긴 호리의 어항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정상성 담론으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어른들의 시야로부터 소년들을 방생시키고 쉬이 포착, 포획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유를 수호한다.

 

한편 폐열차에서 이탈한 소년들은 그동안 그들을 차단 혹은 감금했던 철창(프레임)이 부재한 광활한 초원 속으로 함성을 지르며 질주한다. 이는 두 소년이 사회의 시선에 포박되지 않고 성적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가시화한 것이다.

 

이후 영화는 찰나 동안 약동하는 자연의 초록과 작열하는 햇빛 속에서 그들의 실루엣을 뭉개버린다. 그리고 종반에는 암전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니까 영화는 사오리와 호리의 시선에서 소년들을 지우는 것에서 나아가 관객의 시선에서조차 그들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 프레임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자체의 프레임을 그들의 소우주로부터 밀어내는 시도이며 외화면에서의 사유를 자극해 탈 프레임화하려는 시도다. 즉, 프레임으로부터의 온전한 해방인 것이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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