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길 잃을 권리 -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첫 번째로 소송(燒送)하며.
글 입력 2024.07.0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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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활자들은 천재적이다. 그렇게 평(評)해졌다.

 

천재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뛰어남을 타고났다는 것,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내재한 것. 그것을 천재성이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카프카는 천재적인 것이 맞다. 카프카는 그만이 선천적으로 가진 것을 활자로 담아냈다. 문학사에서 그의 등장은, 아니, 예술사에서 그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글로써 지극히 개인적인 누군가의 머릿속, 마음속 이세계를 실재(實在)로 불러온다는 것은 아무나 시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카프카는 과감한 시도를 한 것이다. 그 시도는 -당연스럽게도- 가치를 갖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지부진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근데, 그의 내면이라는 것은, 그것의 특징은, 과연 카프카만이 가지는 것인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국가, 나아가서는 국가와 국가 간의 알력 다툼을 불러일으킬 만큼 권위적인 것인가?

 

 

 

낙서들


  

 

내가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은 글들은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고, 나는 그저 그 글들을 썼던 그때를 존중할 뿐입니다.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p. 182.

 

 

카프카는 그의 글들을 "낙서들"이라고 불렀다. 카프카가 작가로서 행하는 글쓰기는, 그 자신에게 있어 무감각하고 관성적인 작가살이(Schriftstellersein)일뿐이었다. 생전에 카프카가 괜찮다고 말한 글은 『판결』, 『화부』, 『변신』, 『유형지』, 『시골 의사』, 『단식 광대』 정도다. 카프카의 말에 따르면, 절친인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서랍에서 발견했던 다량의 문서들은, 전부 태워야 할 것들이었다.


"내면세계는 삶이 될 수 있을 뿐, 글이 될 수 없음", "내가 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터무니없는 세계", "나는 줄곧 전해질 수 없는 것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등. 카프카가 남긴 말들은 그가 자기 글에 가진 여러 복합적 감정을 유추하게끔 한다. 그 말들은 명확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며, 그조차 정확하지 않다. 작가로서 써야만 했던 것들을, 남겨야만 했던 그때만의 카프카를, 카프카 그 자신이 폐기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그때의 그를 존중했다. 남겨질 다량의 문서들을 보게 될 이가 가장 믿을만한 친우인 브로트이길 바랐던 것, 그리고 브로트가 그 모든 것들을 폐기해 주길 바랐던 것은 그래서였던 것이다. 당시 지향해야만 했던 정체성과 그때의 자신에 대한 일말의 존중, 그 속에 남아버린 회환 내지는 미련과 같은 것들이 카프카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이는 그의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카프카의 삶은 늘 그랬다. 전쟁과 혼란의 사이에서 그가 밟아야 했던 수많은 땅들, 도래해야 했던 목적지들은 그의 삶을 계속해서 제한했다. 그의 범위는 넓어졌다가, 좁아졌다가, 달라졌다가, 이내는 그의 죽음과 함께 없어졌다. 카프카는 그가 가졌던 수많은 제한들과 추구들의 증거물을 자기 손으로 남겼고, 그것들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했다. 그리고 종내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안배에도 불구하고, 재차 이뤄진 소송의 끝에 카프카의 흔적은 어딘가에 속(屬)하게 됐다.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될 것들 - 잊어줘도 될 것들.


 

세계를 일직선으로 놓고 본다면, 이 전에는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하나의 거대하고 지적인 눈에서 비롯되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내려다보는 눈은 다양해지고, 무수해졌다. 세계와 시선이 평행을 이루는 것이다. 각기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개인이 세계를 각각 다르게 바라보고, 그들의 감상이 정보화되어 배설된다.


의문이 생기는 지점은 그와 같은 배설들이, 과연 정보(情報)가 맞을지에 관한 부분이다. 정보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분야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긴 하나, 정리된 지식(Knowledge)과 내용(content)을 공통적으로 뜻한다. 어떠한 생각이나 의견이 정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어느 분야에건 유용하거나 활용도가 있는 형태로 정제(精製)되고 축적(蓄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면, 유용성이나 신뢰성이 떨어지는 지식이나 자료는 정보가 아니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유용성이나 신뢰성이라고 할만한 것이 현대 사회에서도 정형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정당하게 판별된 정보를 우리는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가? 애초에 그러한 정보가 만들어지려면, 그 기반이 되는 지식과 내용들을 표출하는 이들부터 신중하고 섬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보가 과잉된 시점에서부터, 시선이 무수해진 시점에서부터, 정보에 대한 이러한 개념과 기준들은 점차 희미해진 듯하다. 이미 정보와 지식, 내용과 형태는 구별되지 않는다.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고, 아무렇게나 퍼뜨릴 수 있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활자들은 점점 힘을 잃고 혼재되어 간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유동적이고 희미한 것들. 예컨대 어느 순간에 자기 자신이 위치하고자 했던 어느 측면의 이데올로기, 잠시 잠깐 추구하고자 했던 정체성, 내면에서 발생하는 여러 감정과 감각 같은 것들 말이다.

 

카프카가 남긴 것들이 사회경제적으로, 문학사적으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알겠다. 그것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도 알겠다. 근데, 그것이 정보화되어 남는다는 것이 과연 유용하기만 할까? 이 사안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한다. 그 낙서들이 어딘가에서 창출하는 영향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악하든 선하든 관계없이, 그저 카프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부표로서 기능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정보 사회에, 무분별하게 생산되는 텍스트와 이미지들도 그러므로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것들은 결국 그 주인에 의해서든 타자에 의해서든 없어지거나 잊히지 않나. 카프카의 글들이 무분별하게 생산되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작가로서 카프카는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것이고, 그의 독특한 시도들은 높게 평가될 만하다. 다만, 그 주인이 소멸되길 바랐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몇몇의 글 속 그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그 거취에 있어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보아야 한다. 


남겨진 이들의 이권 다툼인지, 해묵은 앙금이 초래한 또 다른 냉전(冷戰)인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생기는 소망은 누구에게든, 길 잃을 권리가 앞으로는 보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능할지조차 장담할 수 없지만, 카프카가 언젠가는 그의 의지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모두가 무언의, 무형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첫 번째로 카프카를 소송(燒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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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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