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새가 남기고 간 것 - 연극 새들의 무덤

글 입력 2024.07.0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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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채 꺼지기도 전, 작업복을 입은 한 남성이 객석을 가로지르며 무대에 오른다. 그의 이름은 오루. 관객들은 오루라는 남자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며 자연스레 극에 스며든다. 작업 가방을 손에 쥔 오루는 일을 위해 극장을 찾은 듯하지만, 인기척 없는 극장 안은 고요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아장아장 다가오는 새끼 새 한 마리. 무리 속에서 나온 새는 오루에게 다가가 날갯짓한다. 반가움의 인사 같기도 하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 오루가 그런 새의 행동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교감하자, 새는 적극적으로 오루를 이끌기 시작한다.


새에 이끌린 오루는 자신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극은 순식간에 오루의 어린 시절인 1960년대로 돌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새와 함께 오루의 일대기를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부모의 장례식이 있던 다섯 살 어린 시절부터,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며 미싱사로 성장한 청년 시절, 그리고 선박 용접 일을 하게 된 중년 시절을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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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루의 삶 속에는 해방 이후부터 군사정권 시절, IMF 외환위기, 세월호 참사까지 한국의 현대사가 담겨 있다. 우리는 오루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고, 동시에 그 모든 시간들을 버티고 지나온 한 개인의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느낀다.


1968년, 다섯 살 오루는 마을 사람들과 외할아버지인 수학, 그리고 삼촌인 수필의 대립을 바라본다. 수필은 공동체를 위해 민족해방운동까지 했던 아버지 수학이 개인의 부를 더 중시하는 지주로 변하자 그런 아버지를 일제라고 탓하며 갈등을 일으킨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80년, 수필 역시 아버지처럼 개인의 부를 더 중시하는 지주의 면모를 보이고, 과거 수필이 아버지를 탓했듯 수필의 친구 판수는 변해버린 수필을 비난한다.


1988년, 돈보다 공동체 의식을 더 중요시했던 판수 역시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하며 신념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는 집과 공장을 얻는 대가로 동대문 근처에 만연했던 빈민굴 철거에 앞장서며 자본에 탐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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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본 앞에서 느끼는 무력한 순간은 오루에게도 찾아왔다.


1997년, 배손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오루는 봉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공장 압류를 막기 위해 돈독했던 직원들을 해고해야 했다. 끝까지 선택을 망설인 오루였지만 그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와 지켜내야 할 아내가 있었다.


2014년.


새를 따라 계속해서 기억의 발자취를 따라오던 오루는 이 순간만큼은 기억해 내길 완강하게 거부한다. 새 역시 뜻을 굽히지 않는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듯 돌아선 오루에게 새는 안간힘을 쓰며 머리를 비비고 날갯짓한다. 무슨 말을 하듯 자꾸만 새소리를 낸다.


결국 오루는 또다시 새를 따라 마음 한 편에 묻어둔 2014년의 기억을 더듬는다.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오루의 딸 도손이.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오루에게 안긴다. 오랜만에 딸을 만난 도손은 믿기지 않는 듯 한참 동안 딸을 바라본다. 도손은 오루에게 날아온, 오루에게 과거를 보여준 그 작고 귀여운 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지껏 오루와 과거 여정을 함께 했던 새가 딸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 그동안 새가 오루에게 보인 날갯짓과 몸짓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다음 장면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미래를 뻔히 아는 상태에서 아픈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객석은 점점 훌쩍이는 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똑바로 응시했다. 오루와 도손이 겪게 될 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또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빠는 도손에게 묻는다.

 

"무덤 속에 살고 있는 아빠를 본 거야?"

 

새는 그런 오루의 곁에 조금 더 머문다. 오루의 무릎에 기대어 보기도 하고, 다시금 얼굴을 비비기도 한다. 그리고 훨훨 날아오른다. 새들의 무리 속에 속해.

 

오루는 그런 새의 날갯짓을 웃으며 바라본다. 마치 오루가 새를 날려주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는, 딸 도손이는 오루에게 무얼 말해주고 싶었던 걸까. 그것이 희망이길 바라며 가만히 새들의 날갯짓을 함께 지켜보았다.

 

새들의 날갯짓에 따라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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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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