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옷 일대기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글 입력 2024.07.0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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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나를 만들었다.


혹자는 옷이 겉멋일 뿐이라고 할지 몰라도, 옷이 나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옷 덕분에 나는 자아를 형성하고, 관계를 맺고, 미래를 그리며 전보다 선명한 ‘내’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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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옷과 밀접한 삶을 살고 있다. 옷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22년부터, 근 2년간 옷을 사는 데 대략 천만 원 가까이 쓴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큰돈이 아닐 수 있지만, 아르바이트를 놓지 못하는 대학생 신분인 나에게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군 적금 대부분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식비까지 아껴가며 옷을 사는데 몰두했다.


투자한 건 돈뿐만이 아니다. 옷을 탐색하고, 공부하고, 보러 다니는 데 투자한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천만 원 그 이상일 것이다. 군 전역 후 2022년에 내가 뭐했는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는 ‘쇼핑했다’. 방구석에 누워서 스크롤을 내리며 쇼핑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한번 보기 시작하면 절제하는 게 힘들어서 몇 시간씩 들여다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옷이 좋아서 다음 해에는 어느 SPA 브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학업과 병행하면서 주 3일을 근무했다. 고객으로만 가던 의류 매장의 일원이 되는 경험은 색달랐다. 그렇게 14개월 동안 소중한 에너지를 쏟았다. 옷을 팔아서 번 돈으로 다시 옷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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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잘 입고 싶어서 패션을 공부하다가 패션 매거진도 많이 찾아봤다. 그러다가 즐겨보던 어느 온라인 패션 매거진에서 객원 에디터를 모집하길래 지원했더니, 덜컥 합격했다.

 

그렇게 지금 6개월째 간간이 매거진에서 글을 쓰며 활동하고 있다. 스스로 주제를 선정하고, 비평적 시선을 담고, 한 편의 글을 구조적으로 작성하는 과정을 통해 패션뿐만 아니라 매력적이고 읽기 쉬운 콘텐츠를 만드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 옷은 나에게 열등감이었다. 부모님은 누나와 달리 나에게 옷을 사주지 않으셨고,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 나는 부모님께 옷을 사달라는 각서까지 작성하며 울분을 표출했다. 그 나이대부터 옷을 향한 욕망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옷은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었다. 소위 ‘등골 브레이커’라 불리는 값비싼 패딩이 유행하던 시절,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는 검은색 털이 삐져나온 나의 패딩을 보며 ‘요즘엔 닭털로도 패딩을 만든다’며 아무렇지 않게 외쳤다. 당시 옷은 하나의 계급이었고, 그 순간 나는 저 밑까지 바닥을 모르고 마음이 무너졌던 기억이 지금까지 선명하다.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찍을 때 찍는 줄 모르고 원치 않는 옷을 입고 갔다가 오래도록 후회하기도 했고, 중학생 때는 교복을 입지 않는 소풍날에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던 끝에 겨우 고른 옷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내 옷이 싫어 자주 누나 옷을 물려입거나 아빠 패딩을 빌려 입어서, 그때의 나는 확실한 ‘나의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그때 지금보다 훨씬 말라서, 옷을 넘어 ‘몸’ 자체도 하나의 콤플렉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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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옷에 깊게 관여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나의 외면을 창조하는 옷은 내면의 자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근 2년간 나에게 옷은 겉으로 보이는 외피를 넘어, 하나의 철학적 실천이었다. 돈은 한정적이고 살 수 있는 옷도 제한이 있으니, 한번 사면 질리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는지, 질리지 않은지, 어떤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지와 같이, 나 자신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했다. 어떻게 살 건지 스스로 결정하고 인도하는 시각적 가이드인 셈이었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경험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옷을 잘 입는다는 소리를 듣는 지금, 옷을 향한 열등감은 나의 자존감으로 탈바꿈했다. 옷을 간절히 바랐지만 가질 수 없던 과거가, 옷으로 둘러싸인 지금의 풍경을 창조했다.


지금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볍게 하고자 다짐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패션 역시 가볍고 경쾌해지고 있다. 패션에서 쓰이는 ‘캐주얼’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격식에 매이지 않아 자유롭고 가볍다’라고 한다. 정확히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인 셈이다.

 

이렇듯 지금까지도 옷은 나의 가치관과도 궤를 같이하며 나를 나와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다. 비록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정신을 빼앗길 때도 있지만, 가끔 옷은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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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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