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몸을 던져야 발견되는 사랑에 관하여 - ‘인피니트 에이크’ 김혜리 배우

글 입력 2024.07.03 13:3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극단ETS_인피니트 에이크_포스터.jpg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시행착오 없이, 검증된 데이터에 의지해 효율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알고리즘의 추천을 따라 콘텐츠를 선택하고, 성격을 유형화하는 MBTI가 유행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매끄럽고 명쾌한 이론과 달리 현실의 삶은 울퉁불퉁한 변수로 가득하다. 극단 ETS의 연극 <인피니트 에이크>는 미국 LA를 배경으로 찰스와 호프라는 너무나 다른 두 개인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더 나아가 이 예측불허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극은 110분 동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20대 시절부터 노인이 된 80대까지 50여 년의 시간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 시간 속에서 둘은 제목처럼 '인피니트 에이크', 즉 끝없는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고 있자면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은 지난하고, 삶이란 매번 새로운 고통에 적응해 가는 것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러나 극장을 나오면서는 그러한 고통이야말로 삶을 살았다는 증거,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 흔적임을 깨닫는다. 관객은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고통 속으로 뛰어들 용기를 얻어 간다.


큰 호응을 얻으며 2023년 초연을 마친 공연은 지난 6월 14일부터 30일까지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났다. 공연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22일, 나이 든 호프를 연기한 김혜리 배우를 인터뷰했다. 극단 ETS 대표이면서 이 극의 번역과 연출까지 맡은 그가 들려준 <인피니트 에이크>는 어떤 작품일까.

 

 

10.jpg

 

 

“이 작품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지 깨닫는

 ‘느낌표’에 대한 이야기예요.”


 

반갑습니다. 배우님과 극단 ETS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극단 ETS 대표 김혜리입니다. 미국 뉴욕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계속 배우로 활동했습니다. 극단을 만들면서부터는 극본도 쓰고 연출과 번역도 하고 있어요. 


2009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1인극 ‘FACE’를 썼고, 1인극 페스티벌인 ‘솔로노바(SoloNOVA) 페스티벌’에서 'FACE'를 공연하며 극단 ETS를 만들어 지금까지 계속 운영하고 있어요. 어린 배우들에게 더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은 배우보다 연출을 맡을 때가 많지만, 여전히 제 뿌리는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극단 ETS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공연할 때가 많아요. <인피니트 에이크>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 작품은 어떻게 공연하게 되었나요?


뉴욕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배우 생활을 하는데, 사실주의 연극에서는 아시아계 여배우가 설 자리가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 2003년쯤 아시아계 여성이 주인공인 이 작품을 발견했죠. 시간이 흘러 최근에 다시 봤을 때도 정말 좋은 작품이라 극단에서 공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한테 섬세하게 가닿는 공연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프랑스 난민 캠프의 이야기를 담은 ‘THE JUNGLE’, 평화, 성 정치성, 공존 등의 굵직한 화두가 있었던 ‘BIG LOVE’, 히틀러 시대를 살던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BENT’ 등 이전에 극단 ETS가 공연한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되기까지의 시간이라고 봤어요. 이들은 투쟁하며 서로가 다름을 인정해 갑니다. 나중에는 서로를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시간을 나눠 주기도 하지요. 이 작품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지 깨닫는 ‘느낌표’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이전에 공연했던 작품들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요. 성소수자 인권이나 난민을 둘러싼 갈등처럼 시사적인 문제도 결국에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거든요. <인피니트 에이크>는 물론 사랑 이야기가 맞지만, 단순히 사랑 이야기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에요.

 

 

그래서인지 초연 당시 공연 기간 내 재관람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초연을 할 때 공연을 보고 돌아가시며 바로 다음 예매를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연인이나 배우자를 떠올린 분도 있겠지만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엄마나 언니, 아니면 자기 자신의 특정 시기가 떠올랐다고 하더군요. 부모님, 형제자매 등 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공연을 보고 나서 ‘그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서사가 있었지.’ 하고 다시 돌아보게 되는 듯해요.

 

 

4.jpg

 

 

“저는 나이 든 호프를 맡았는데,

무대에 오르며 ‘나이듦’을 연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 공연에서는 노인을 사실적으로 연기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봤거든요.”

 


<인피니트 에이크>를 처음 알게 된 건 유학 시절이었다고 하셨는데, 그때 본 호프와 지금 보는 호프는 또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배우로서 이제 막 시작하던 20대 때 봤던 호프는 ‘내가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였어요. 한 캐릭터로 다양한 나이대를 연기할 수 있다니 배우로서 정말 좋은 캐릭터다 싶었죠. 나이가 들고 프로덕션을 책임지는 위치가 된 지금 시점에서는 호프를 보며 이 이야기를 통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를 더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럼 이번에 호프를 연기하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수동적이지 않고 솔직한 게 호프의 매력이에요. 지금 자기가 느끼는 것을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계산하지 않고 바로바로 표현하는 스타일이죠. 그렇다고 무성의하거나 무관심한 건 아니에요. 본인의 느낌에 확신이 있기에,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하죠. 이번에 연기할 때도 그 부분들을 잘 살리고 싶었어요. 


또 작품의 깊이를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서 미국 공연과 달리 젊은 시절과 나이 든 시절을 각각 다른 배우가 연기하도록 캐스팅했어요. 저는 나이 든 호프를 맡았는데, 무대에 오르며 ‘나이듦’을 연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 공연에서는 노인을 사실적으로 연기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봤거든요. 대신 인물의 삶의 질감이 잘 드러나기를 바랐죠. 

 

흐르는 시간 속에서 찰스와 호프의 생각과 위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표현하고 그 과정에서 이들이 함께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최대한 잘 살리려 했습니다.

 

 

110분간 두 인물의 20대부터 80대까지를 보여주는 만큼 이 작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이 부분을 연출적으로 어떻게 표현했는지도 들려주세요.


무대 중앙에 둔 침대를 중심으로 두 인물의 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모습을 표현하려 했어요. 대표적인 게 두 사람의 첫 데이트 날, 찰스의 집에 온 호프가 침대에서 1시간 자는 사이 찰스가 그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장면이에요. 그동안 시간이 뀌며 두 사람은 연인이 되죠. 사랑에 빠진 다음부터는 둘의 시간이 마구 섞이며 침대 위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가, 갈등을 겪으면서는 둘의 시간이 다시 갈라져요. 찰스가 침대 위에 머무는 동안 호프는 계속 바쁘게 돌아다니죠.


결혼 후 첫 아이가 죽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는 함께 침대 위에 있어도 공간이 완전히 반으로 나뉘어 있지요. 일어나는 시간, 불을 켜는 시간도 어긋나고요. 시간이 바뀌는 모습과 함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한정된 공간 안에서 감각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프로그램 북에서 ‘우리의 시간이 우리의 사랑이었어’라는 대사를 가장 좋아하신다고 꼽아 주셨는데, 관련해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시간이 쌓이며 그 사람과 다양한 경험을 하고 부딪혀 나가야 상대방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런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상대방을 알기를 바라죠. 그러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봐요.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한 시간이 존재해야지만 사랑의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어요.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니에요. 저는 타인을 알기 위한 노력이 인간으로서 굉장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양성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나와 다른 인종의 사람, 다른 성 지향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많은 것이 변하지 않을까요.

 

 

8.jpg

 


“어려움이 밀려와 무너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게 도와주는 삶의 놀라움이 이 세상에 있다고 믿죠.

그게 가능하게끔 해주는 자양분이 사랑인 것 같습니다.”

 

 

극중 나온 ‘베셔르트(Bsert)’라는 단어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어떤 아름다움은 몸을 내던져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야만 알 수 있다고 했죠. 배우님도 살면서 따지지 않고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지요.


좀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연기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은 때가 생각나요. 원래 예정된 유학이었는데 그때 IMF를 겪으며 집안이 많이 어려워졌어요. 유학을 간다 해도 6개월 버틸 돈밖에 없는 상태라 포기하고 취업을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후회 없이 사는 게 중요하다는 부모님의 말씀 덕에 마음을 다시 먹었어요.


6개월밖에 못 버티더라도 일단 가자고 생각한 거죠. 그때 직감했어요.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내가 여기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나중에 망하더라도 지금은 일단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서 악착같이 12년을 버텼어요. 그때는 정말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느낌이었죠. 그랬던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믿냐며 결혼을 망설이는 찰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어요. 배우님은 사랑이라는 것의 존재를 어떻게 체감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 ‘신뢰감’입니다. 저희 극단 공연 중에는 인간의 회복 탄력성을 다룬 작품이 많아요. 어려움이 밀려와 무너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게 도와주는 삶의 놀라움이 이 세상에 있다고 믿죠. 그게 가능하게끔 해주는 자양분이 사랑인 것 같습니다.

 

 

극단 ETS의 다음 공연에 대해서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극단 ETS는 항상 창작극 아니면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 초연을 올리려 노력해 왔어요. 11월에도 새로운 두 작품의 낭독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직 제목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는 고립된 사람들이 나의 사고방식이 왜곡되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상대방을 판단해버리는 상황을 다룬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결국 다른 사람의 평가에 맞춰 스스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번역하고 배우들이랑 다 같이 읽어봤는데 재밌었어요. 낭독공연을 마치고 나면 내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공연을 한 편씩 올릴 예정입니다.

 

 

<인피니트 에이크>는 삶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사람의 등을 떠미는 작품이라는 느낌도 들었어요. 망설이는 관객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잖아요. 나의 경험도 도망가요. 시간과 함께. 결국엔 내 인생이고 내가 채우는 삶이니까 그 시간 안에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경험하기를 바라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건 열심히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주어진 순간순간을 용기를 내어 충실하게 살고 있느냐의 문제인 듯해요. 내가 내 인생을 충분히 경험하면서 살았다는 걸 깨닫는다면 작별할 때도 그리 많이 슬플 것 같지 않아요. 호프도 그랬을 겁니다.

 

 

[김소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7.0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