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장 느린 계절, 여름

뜨겁고도 느긋한 여름의 특성
글 입력 2024.07.05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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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Huijae Lee ICY

 

 

여름은 가장 느린 계절이다. 여름의 더운 기운은 불쑥 찾아오고 더디 물러간다. 화창한 봄날씨를 몰아낸 뒤 막무가내로 무더위를 데려오고, 가을의 서늘함이 그리워질 때까지 늑장을 부린다. 지구 열대화로 여름이 길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여름의 영향력이 진득한 이유는 시원함이나 추움, 따뜻함의 속성과는 다른 뜨거움의 강렬함 때문이다.


여름철의 기후를 ‘불쾌지수'로 표현하듯 여름으로의 변화는 여타 계절과 달리 쾌적함과 거리가 멀다. 묵직하도록 습한 공기와 지나치게 쨍쨍한 하늘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기력을 앗아가고, 아주 일상적인 행동마저 가로막는다. 봄에서 여름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여러 불편들을 감당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번 여름은 올해의 본론을 채 시작하지 못한 시점에 불현듯 들이닥쳤다. 난데없이 30도를 훌쩍 웃돌며 순식간에 더워졌던 그 하루는 특히나 갑작스러웠다. 후끈한 더위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 경종을 울렸다. 여름의 촉감이 화상처럼 얼얼한 탓에, 꼭 무조건 반사처럼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꿔 앉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를 기록 중인 여름의 온도처럼 한 해의 절반에 도달한 당장도 기승전결의 순서처럼 클라이맥스를 향해 질주 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름은 한 해의 시작과 중간 사이에 출몰해 연초의 다짐을 과거의 단계로 몰아넣었다. 이미 한 해의 서론부가 지나가버렸다면 그때의 각오가 가시화되어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올초의 버킷리스트를 다시 꺼내봤다. 작은 목표부터 1년의 포부에 이르기까지, 꼭꼭 눌러담은 항목들을 다시 살펴보자 세모와 가위표, 동그라미 순이었다. 동그라미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이 세모와 가위표였다. 지난 상반기가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한 해의 방향성은 대부분 연초의 예상과는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 내 통제 바깥에 있었다.


물론 버킷리스트에 그어진 가위표와 세모는 계획 위에 현실이 자리 잡으면서 생겨난 타협의 흔적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상적인 2024년을 상상하며 항목을 채웠던 연말을 떠올려보면 씁쓸함을 숨길 수 없었다. 아직 여지라도 있는 세모와 달리, 가위표는 남은 희망마저도 사정없이 조각내는 확실한 실패 같았다. 속절없이 지나간 상반기를 바라보자 시간의 속도 앞에 무력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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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Karori Production

 

 

사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와중에도 계절의 변화를 굳이 실감하며 좌절감에 사로잡힌 이유는 순전히 숫자의 변화 때문이었다. 봄에 비해선 기껏 몇 도쯤 기온이 올랐을 뿐이고, 6월이 7월이 되었을 뿐이다. 나아가 2023년에서 2024년, 그리고 2025년으로 향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다. 그 변화를 연속적이고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줄만 안다면, 작은 위기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텐데.

 

그러나 평생을 예민하고 조급하게 굴었던 버릇은 쉽게 고쳐질 리 만무하다. 더군다나 시간의 변화라는 중대함 앞에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내게 유일한 차선책은 숫자라는 명목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뿐이다. 숫자가 짓누르는 부담감을 차라리 사용해야 한다. 다가올 8월이 벌써 두렵다면 그 사이의 짧은 며칠간이라도 안간힘을 내는 수밖에 없다. 1년을 둘로 쪼개 앞전의 성과를 따지게 된다면, 하반기는 또 다른 무언가로 다시 채워야만 한다.

 

지금은 돌연 들이닥친 여름의 열기를 차라리 연료로 삼아 새로운 동력에 불을 붙일 때다. 위안이 되는 것은, 여름은 가장 느린 계절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의 무더위는 어차피 질리도록 이어질 것이다. 여름은 그 무엇보다도 끈질기게 자신의 공기를 지켜낼 줄 안다. 그래서 여름은 그 안에서 가장 오래도록 머물 수 있는 계절이다. 작은 숫자에 연연하더라도, 여름은 그 조바심마저 넉넉히 이해하고 안연히 기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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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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