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름 공식 입장

매년 나는 여름을 기다린다.
글 입력 2024.07.0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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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나는 여름을 기다린다. 어떤 여름이 올지 몰라도 일단 기다릴 수밖에 없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가끔 그렇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장마에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하는 하늘이 와도, 현관을 열자마자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도 눅눅한 시간이 와도. 나는 여름을 기다린다.


매미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미약하지만 어느 것보다도 확실한 여름의 알림음.


초여름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벌써 한여름 햇빛에 팔이 그을리고 있다. 땀이 난다고 해서 체온 조절이 잘 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울 때마다 불쌍할 정도로 땀을 흘리지만 결국은 몸 안에 차곡차곡 쌓인 열 때문에 더위를 먹고선 열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느 정도는 찬물에 몸을 씻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해결되지만 심해지면 속까지 울렁거리면서 몸이 아파 온다. 좋아하는 것이 나를 해치는 경험은 언제 겪어도 똑같이 서글프다.


올해는 여름이 몇 번이나 나를 아프게 할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일단은 보름이 채 못 가 다시 찾아온 감기가 나에게 머무는 중이다. 기침할 때마다 골이 울리며 얼굴으로 피가 몰린다. 붉은 얼굴은 역시 여름에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다.


초여름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다. 남들보다 먼저 반팔을 꺼내들고선 언제쯤 입어도 되나 눈치를 살핀 기억이 더 많다. 이마에서 땀이 삐쭉 솟아도 반에서 가장 먼저 하복을 입는 애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습도가 지배하는 섬에 있는 나의 연인이 그리워진다. 손을 마주 잡는 것도 버거워진다 해도 한 치의 공간 없이 달라붙어 있고 싶은 나의 연인.


언제 피나, 언제 피어줄래, 출근길마다 공들여 쳐다봤던 능소화 덩굴이 너를 보러 다녀온 사이에 활짝 피었다. 덕분에 집에 돌아가는 길이 아주 조금은 덜 쓸쓸했다.


썸머워즈를 봤다. 첫 장면을 보자마자 누군가에게 추천 받았던 영화임이 기억났다. 추천인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영화의 내용만 기억났다. 올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재앙의 종류에는 변화가 없다. 지구인들에게 재앙을 마케팅하는 미지의 부서가 있다면 그들에게 너무 게으르다고 민원을 넣고 싶을 정도.


영화는 2009년에 만들어졌다. 2024년의 재앙도, 2009년의 재앙도 인공지능에 지배 당하는 인간이라니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불행과 재앙은 너무 뻔하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학습하게 됐다. 크고 작게 겪어왔던 일상의 상실은 예습도, 복습도 되지 않는 무자비한 시험이다.


뭔가에 끝이 있다면 여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계절을 잃고 싶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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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려운 문제는 숙제였고 대학교에 들어가니 과제가 됐고 직장을 다니면서 과제는 다시 숙제가 됐다. 어렸을 땐 수학 문제집 몇 쪽을 풀어오는 게 숙제였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까 삶 자체가 숙제다. 두고 생각해 보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문제집을 덮으면 끝나는 것처럼 내 숙제도 하나의 챕터가 있으면 좋겠다.


글을 쓰는 내내 비가 내렸다. 창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빗방울에 내 몸이 다 아프다. 지금 내 방 온도는 30도다. 에어컨을 돌려도 습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의 숙제는 제습기를 사는 게 되겠다.

 

여기서부터는 지금의 이야기


작년부터 여름에 대해서 쓴 일기의 파편들을 모아봤다. 순서에 상관없이, 문단도 구분없이 흐트러 놓은 일기는 파편이 아니라 한 번에 쓴 여러 가지의 생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기장을 펴지 않은지 좀 됐다. 휘발되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들을 메모장에 적는 것이 일기의 전부다. 내가 느끼는 것들을 일일이 글자로 남기면서 내 존재를 확인해야 했던 시기는 조금 멀어졌다.


순간순간을 같이 기억하며 내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삶은 막막하고 퍽퍽해서 잔가시를 세우고 혹시나 모를 공격에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걷지만 너와 손을 잡고 있는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해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만큼 날카롭게 글을 벼려 쓰기 힘들다. 잔뜩 예민해져 있던 감각들이 전부 느슨해진 느낌이다. 그런데도 위험 신호가 켜지지 않은 건 어떻게 보면 진화처럼 느껴진다.

 

슬프고 아프고 괴로울 때가 아닐 때도 내 감정을 제대로 꺼낼 수 있다는 건 내가 앞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더 길어진다는 의미 같다. 장마철의 공기는 눅눅하고 무거워서 감정이라도 가볍고 솔직하게 가져가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하루에도 몇십번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인 거지.


일기들을 읽으면서 토마토를 꺼냈다. 평소라면 잘라서 먹지만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한 입 베어 물었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갈아입은 잠옷 위로 토마토 즙이 후두둑 떨어졌다. 예상했던 결과, 행동하지 않은 어리석은 자의 결론이지만 화도, 짜증도 나지 않는다.

 

뭐든지 용서가 가능한 나의 계절, 여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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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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