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37.2도의 사랑 그리고 자유 [영화]

Jean-Jacques Beineix, (1986), <37.2 Le Matin>
글 입력 2024.07.1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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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는 다리가 부러진 야생마 같았다.

근데도 일어서서 벽을 넘으려고 발버둥 쳤다.

우리에겐 넓은 초원도 그녀에겐 우울한 감옥이었다.

 

 

베티블루를 봤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친구의 외침을 되뇌며... 강렬한 필름 속에 부유하는 사랑과 자유를 포착한다. 다리가 부러진 야생마가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이 엉망진창인 베티가 찬란하게 보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의 젊은 사랑과 자유로움은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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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 '베티블루'를 검색하면, 세 개의 글이 뜬다. 그중에서 남영신 에디터님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추락 욕구로 베티를 써 내려간 것이 정말 좋았다. 베티가 그토록 가깝게 느껴지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달까. 나 또한 참존가를 매우 좋아하기에. 그리고 추락 욕구를 강하게 느꼈던 사람 혹은 느끼는 사람이기에. 슬그머니 베티에게 나를 투영해 본다.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싶다거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일을 저지르고 싶다거나,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들에 대한 충동적 욕구 말이다. 누군가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와 약간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지난 본인의 충동 혹은 행동을 떠올리며 남몰래 공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베티블루에 대한 평가가 나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사랑이라거나, 도저히 정신병이 올 것 같아 두 눈 뜨고 볼 수 없다거나... 둘간의 감정이 사랑이냐 아니냐에 대한 저들만의 판단도 극명하게 갈리곤 한다. 사람은 자기 안에 없는 것은 보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한다고 한다. 그러니 단순하다. 베티가 나의 안에 있고, 그 둘의 사랑이 나의 안에 있다면,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보지 못하는 것인데. 이건 참과 거짓 혹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저 '나의 세상에서의 존재 유무' 정도가 될 테다.

 

확실한 건 나는 베티를 그리고 베티와 조르그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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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를 보면 정말로 다리가 부러진 야생마가 떠오른다. 야생의 말처럼 큰 포부와 뜨거운 열정이 있으나, 다리가 부러져 뛸 수 없는 베티에게는 넓은 초원이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 당연하다. 벽을 부수는 조르그를 보며 글을 쓸 때의 모습 같다던 베티는. 결국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던 사람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둘은 뗄 수 없기에. 글 쓰기과 벽을 부수는 일은 둘 다 자유를 쟁취하는 일이기에. 베티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하다.

 

눈을 파내버린 베티는. 더는 이 뛰어다닐 수 없는 넓은 초원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나를 담지 못하는 세상의 딱딱한 것들에게서 해방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런 베티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주는 조르그는 베티에게 영원한 자유를 선사한다. 나도 잘은 모르겠다. 죽음과 자유를 동일시하는 것처럼 묘사해도 되는지. 감히 '선사한다'라고 말해도 되는지... 이런 나의 표현과 묘사조차 베티를 가두는 세상의 갑갑한 것들 중 하나가 아닐지 우려되기까지 한다.

 

나체에 앞치마만 걸치고 등장한 베티. 이제 갓 스무 살에, 편집장을 무작정 찾아가 때리고, 식당 손님을 포크로 찌르고. 영화 속에서나 밖에서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음에 틀림없지만. 그 모든 눈초리까지 베티라는 캐릭터의 완성일 것이다. 베티를 보다 보면 나 또한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너무나도 일시적인 세상의 관습과 규칙들에서 멀어져 베티 그 자체만을 바라보려 노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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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그에게서 사랑을, 베티에게서 자유를 포착한다. 베티는 너무나 자유로워 사랑이 어려웠고, 그런 베티를 조르그는 사랑했다. 엉망이 되어버린 베티의 얼굴을 닦아주기보다는. 함께 스파게티를 잔뜩 묻히고는 안아주는 조르그는 베티의 세상에 직접 들어가 응시하고 이해해 준다. 남들이 제아무리 베티를 미쳤다고 말해도, 조르그는 베티 그 자체를 끊임없이 안쓰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한다. 토마시가 테레사에게 느끼던 사랑처럼. 조르그의 베티에 대한 사랑은 곧 연민. 있는 그대로의 모순적이고 복잡한 모습을 응시하고, 언제까지나 안쓰러워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사랑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베티를 자유와 가장 가까운 곳에 올려두고선. 조르그는 같은 자리에 여전히 남아 또다시 글을 쓴다. 그러니까 벽을 부순다.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자유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도록. 베티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여전히 베티의 목소리가 울리는 방 안에서 하염없이 글을 쓰고. 자유를 쟁취하고. 남겨진 사랑을 앓는다.

 

 

[한정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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