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절단난 생명력 [문화 전반]

글 입력 2024.07.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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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보면 최근 들어 눈에 띄는 모습이 있다. 소규모 개체에만 국한되는 줄 알았는데, 지역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불쑥 나타난다. 아파트 화단, 차도와 인도 주변, 학교 주변 등등. 처음엔 놀란 마음으로 감추고 일부러 모른 척 지나갔다. 그다음엔 핸드폰에 고개를 콕 박은 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니, 관심을 두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 흘러갈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느껴버린 불편함을 무관심이라는 포장지로 애써 밀봉하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들이 적나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지고 거슬려져 결국은 눈앞의 광경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요즘 들어 나무들이 댕강 잘려 있다.

 

 

 

나무는 이제 우리가 알던 모습이 아니다

 

나무가 보여주는 모습은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줄기와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잔가지들. 그리고 공백을 채우는 풍성한 잎이야말로 나무에서 빼놓을 수 없는 3요소이다. 종마다 구체적인 잎의 모양이나 줄기의 거칠거림은 달라도 대체로 비슷한 모양새를 지닌다.

 

그러나 나무들은 이제 우리가 알던 나무의 모습이 아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곁가지는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되었고 줄기의 중간부는 잘려있다. 사방으로 뻗친 잔가지와 수많은 잎으로 구성된 무성함을 잃어버린 채 잘못 쪼개진 나무젓가락의 일부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마치 중세 시대의 사형 방식인 참수형 혹은 프랑스의 단두대를 연상시킨다. 설명이나 증명은 생략한 채 줄을 탁, 하고 끊어버린 찰나의 순간. 전기 톱질 몇 번으로 나무는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어 반토막이 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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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체들은 뭘 그리 잘못했길래 햇볕과 수분과 양분으로 만든 시간의 산물을 단숨에 잃어버렸나. 이렇게 무참하게 잘려진 나무에서는 생명력이라고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다. 그저 무생물로 태어나 지금까지 무생물로 존재해 왔다는 듯한 딱딱함만이 전해진다.

 

 

 

목적을 상실한 가지치기


 

가지치기는 나무의 수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골격이 되는 굵은 가지를 중심으로 잔가지를 제거하여 미형으로 만들고,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나무의 크기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햇볕을 받지 못하는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함으로써 나무의 성장을 돕기도 한다.

 

그러나 과도한 가지치기는 문제가 된다. 미관을 해치는 단순한 거슬림뿐만 아니라 나무의 생장에서 큰 걸림돌이 된다. 전정 작업에서 곁가지 중 굵은 가지를 절단하는 두절 방식은 잘려진 횡단면에 감염을 일으키거나 부패를 유발하여 결국 나무 전체가 고통받을 수 있다.

 

갑작스럽게 잎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사계절에 맞도록 설계된 광합성 사이클도 제대로 실행시킬 수 없다. 또한 나무의 생존을 위해 절단면의 주위로 솟아난 어린 가지들은 기존의 생장 과정과 달리 불규칙하게 발육되어 가지치기가 필요한 상황을 더 자주 초래하기도 한다.


사실 광합성은 생각보다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 있다. (식물만이 광합성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제의 쉬운 설명을 위해 식물로 표기한다) 광합성은 엽록체가 태양에너지를 받아 물과 이산화탄소로부터 포도당을 생성하는 과정으로, 이때 우리가 숨 쉴 때 필요한 산소가 방출된다. 엽록체는 대체로 잎의 윗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잎의 존재는 식물에 필수적이다.

 

특히 목본의 경우 줄기가 목질화되어 있기 때문에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부분은 잎이 유일하다. 물론 겨울에는 광합성 효율이 낮아지므로 잎을 떨어뜨린 후 수분을 최소화하고 양분을 비축시켜 일정 기간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식물은 장기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마주하자 무기력해지는 현실

 

나무의 지상부가 무성할수록 지하부의 뿌리가 조직적으로 얽혀져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 말은 산에 오를 때면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지상으로 솟아나 자연의 계단을 자처한 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적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손과 무릎을 털며 알지 못하는 땅속 미지 세계의 광활함에 호기심을 느끼곤 했다. 나무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언제 처음 뿌리를 내렸는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을지가 궁금했다.

 

이처럼 지하에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을 나무조차 자신의 허리가 잘려지는 것을 면치 못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자 참을 수 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이미 베어진 나무를 원상태로 되돌릴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더욱 무력해졌다.

 

이렇게 잘려 나간 나무는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애초에 그 기나긴 시간을 견딜 만큼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생명은 끈질기다


 

비록 상체를 잃어버린 나무라고 할지라도 이따금 강인한 생명력의 투지를 엿볼 수 있다. 잘려진 줄기의 끝에 기적적으로 잎사귀 하나가 돋아나 있다. 아직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뒷면이 다 비칠 만큼 얇고 연약하다. 여름에 잘 어울리는 진초록색이기보단 막 봄에 진입하는 연녹색에 가깝다. 혹여나 벌레가 갉아 먹고 구멍이 생길까 걱정스럽고 자칫 손톱자국이라도 남을 까 조심스럽다.

 

아마도 이 잎 한 장을 돋아내기 위해 나무는 온 힘을 다했을 것이다. 뿌리로부터 있는 힘껏 수분을 끌어 올리고 모아두었던 양분을 줄기의 정단에 집중시켜 싹틔우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작은 잎사귀가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으로부터 한 그루의 광합성을 모조리 책임지고 있다. 우주 멀리서부터 도달해 오는 태양에너지로 양분을 합성하는 자연의 기묘하고도 유구한 절차를 작디작은 잎이 책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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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찾아온 시련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나무에 애잔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다.

 

나무들은 이제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의 미관도 신경 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이라도 간판을 가리거나 벌레가 많다거나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가지들은 마구 잘려지고 해쳐진다. 구체적인 수목 관리 규제의 부족과 업무 담당자의 전문성의 결함, 관습에 따른 근무 형태가 겹쳐 야기된 결과다.

 

지금까지 앙상한 나무줄기를 수없이 마주했지만, 개인의 역량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는 핑계로 모른 척해왔다. 그러나 나와 같은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면 앞으로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까.

 

지나가는 여름 속에 공허했던 나무들을 남겨두고 다가올 계절에는 생명이 생명을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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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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