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실을 통해 나아가는 법 [영화]

다가오는 것들 (2016)
글 입력 2024.07.17 21: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 글은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스포일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를 바라볼 때면 유독 작은 순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오기가 발동하곤 한다. 특이함은 곧 신선함이 되어 줄곧 내게 충격을 선사했고,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인간적인 메시지를 시사하기도 했다. 이를 제한 프랑스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은 마음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동시에 뜬 두 가지의 눈으로, '참 좋은' 영화를 마주했다.


여주인공 나탈리는 남편과 함께 파리에서 철학 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나탈리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불안증을 호소하고, 이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나탈리를 괴롭게 한다. 또한 책 출간에도 종종 참여하고 있는 나탈리는 판매량이 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나탈리에게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겨 그녀와 살겠다는 충격적인 말을 건넨다. 최악을 거듭하는 상황 속에서 우선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고, 종종 아끼는 제자 파비앵을 만나며 위로를 받지만 그가 곧 글을 쓰러 이사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실 나탈리가 가장 상실감을 느끼는 부분은 그동안 열심히 가꿔온 자신의 삶의 정원이 모두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빈 집에서 공허함을 느끼다 홀로 찾은 영화관에서는 옆 좌석 남성으로부터 추행을 당할 뻔하고, 곧바로 영화관을 나온다. 계속해서 따라붙는 남자를 겨우 떼어내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게 되고, 또다시 무너진다.

 

 

[크기변환]ff.jpg

 

 

이 때 글을 쓰고 있는 파비앵을 만나러 오랜만에 긴 여행을 떠난다. 나탈리는 파비앵과 드라이브를 하며 해방감을 느끼고, 온전한 자유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러나 파비앵과 그의 동료들, 즉 젊은 작가들의 토론을 경청하며 전보다 자신의 의식이 따라가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파비앵의 책장에서 급진적인 책들을 많이 발견한 나탈리는 그가 인간 생명에 조금 더 가치를 두면 좋겠다고 충고하지만 오히려 파비앵은 그녀의 발상이 구시대적이라 지적하고, 나탈리는 상처를 받는다. 오후에 다같이 간 계곡에서는 홀로 젊은이들과 떨어져 있다가 소외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세대 차이에 절망하며 그 곳을 떠난다.

 

1년 후, 교사 생활을 이어가던 나탈리는 자신의 고양이인 판도라를 입양하고 싶다는 파비앵의 연락을 받고 선뜻 내주지만 이제 정말 혼자가 되었음을 느끼며 외로워한다. 파리로 돌아온 크리스마스 저녁, 파비앵이 만든 어린이 철학책을 선물로 건네고 어린 손자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탈리와 판도라


 

영화에서 고양이 판도라를 통해 찾을 수 있는 상징적 의미들이 있다. 나탈리는 현실로부터 수없이 상처를 받고 불안정해지자 처음에는 귀찮은 존재로 여겼던 판도라에게 점차 의지하게 된다. 처음에는 자동차 뒷자리에 판도라를 태웠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무릎 위에 데리고 탔다는 점에서 친밀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판도라가 사라졌을 때 밤새 찾아다니고 파비앵에게 입양시키기로 결정한 후 울적해하는 모습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탈리는 마흔이 넘은 여자는 가치가 없다며 스스로를 폄하하고, 판도라를 설명할 때에 늙고 뚱뚱한 고양이라고 표현한다. 이 장면에서 버림받았다는 비슷한 처지를 가진 두 개체를 보고 판도라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둘 다 오랜 세월 동안 한 환경에서 길들여져 있었고,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탈리와 판도라 모두 가족을 잃음으로써 고수해오던 환경이 무너진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상실’이었던 것이다.

 

 

[크기변환]common (2).jpg

 

 

판도라는 10년을 도시에서 살았지만 숲에 들어간 지 반나절 만에 고양이의 본능을 되찾아 쥐 사냥에 성공한다. 이와 같이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생물의 본능인데, 인간 역시 같을까? 나탈리는 지금까지의 본인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왔지만,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따라서 스스로와 완전히 친밀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아치는 불행과 상실 이후 오히려 성장을 겪고, 스스로에게 씌우던 프레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 및 독립에 닿게 된다. 가장 친밀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는 판도라를 놓아준 행동도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해졌으며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탈리와 파비앵


 

나탈리의 지금까지의 인생은 평탄하고 무난했다. 걱정이라고는 어머니가 불안정하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으며, 대부분의 것이 평화로웠다. 이 생활에 파동을 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젊은 날 품고 있었던 급진주의 사상을 애써 외면한다. 자신의 나이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며 틀 안에 자신을 가두고 소외를 자처한다. 그러나 불행의 연속은 모순적으로 나탈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찾게 하는 해방구가 되어, 젊은 날의 사상을 포함하여 자신이 잊고 살아왔던 사실들을 깨닫게 해 준다.

 

또한 안식처라고도 할 수 있었던 파비앵과의 만남이 결국 지나간 젊음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이어지고 또다시 상실을 느끼게 하는 지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타인에게서 얻는 탈출구는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결국 진정한 자유와 평안은 본인 스스로와 대면하고 그 마음과 친밀해질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크기변환]common (3).jpg

 

 

파비앵의 급진주의 사상은 나탈리와 파비앵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소신을 지적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판도라를 맡기는 장면에서는 나탈리가 늘 가슴에 묻어왔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마음을 이제부터는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겠다는 다짐이 묻어난다.

 

 

 

나탈리 자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모든 일이 지나간 뒤 1년 후의 시점을 다루고 있다. 1년 후에도 나탈리의 일상에 달라진 것은 크게 없으며, 새로운 사랑을 이룬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자신의 곁에 존재했던 담담한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가족과 보내는 단란한 크리스마스, 우는 손자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등 특별하지는 않지만 가슴을 확실하게 따뜻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씩 찾아 즐기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변화와 좌절을 겪는다. 이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같은 불행의 상황에서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지는 본인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때로는 무너지고 울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다가오는 것들을 덤덤히 받아들여도 보고, 어떻게든 곁에 남아 있는 행복들을 새로이 발견하면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상실을 겪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 슬픔의 과정에서 찾는 새로움들과 늘 옆에 존재했던 행복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동경하며 살아가자고 영화는 나탈리의 삶을 빌려 말하고 있다.

 


[크기변환]common (1).jpg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스스로의 경험이나 사례를 떠올리기보다 인물 자체에 이입했던 것 같다. 나탈리라는 인물은 본인이 정당하게 누려왔던 것들을 하나둘 잃으면서 절망과 반복하여 마주하지만, 완전히 무너지거나 무기력하게 주저앉아만 있지는 않는다. 고충은 있을지언정 상실에서의 배움을 찾으며 중년에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결국 40대 여성이 가치가 없다는 본인의 대사와 상반되게, 스스로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지 않고 인간적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일상적인 행복을 마주하기까지의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제목이 ‘다가오는 것들’인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는 인생에 환희의 순간만 있을 수 없기에, 절망과 불행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데 이것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새로운 시작의 계기로 삼으며 그들의 다가옴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에 다가오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시간과 마음을 견디고 나면 반드시 새로운 도전과 늘 곁에 존재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행복들이 다가온다. 이런 의미들을 통해서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이 모두 제목에 담겨 있는 것 같다.


‘프랑스 영화’ 하면 생각나는 특유의 느낌과 분위기를 담은 영화가 아니었기에 나에게 더욱 인상적으로 남을 것 같다. 지금까지 접했던 프랑스 영화들은 대부분 자유와 혁명을 사실적으로 나타내는 작품들이 많았고 그 색이 진했는데, ‘다가오는 것들’은 그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 진솔된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아 여운이 더 짙었던 예술이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무엇일까. 분명히 후회가 있을 것이고 미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지점에서 다시금 얻을 수 있음을 영화를 통해 배웠다.

 

상실을 통해 새로운 걸음을 걷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또한, 언제나 나를 지켜주고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놓치지 않고 소중히 하며 살아가고 싶다.

 

 

 

명함.jpg

 

 

[박시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0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