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영화/기술이 낳은 사랑스러운 실험, 하이퍼 보리안과 에스퍼의 빛을 중심으로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BIFAN

글 입력 2024.07.1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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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BIFAN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ID 필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I는 근본적으로 기입력된 데이터의 총합이기 때문에, 단순히 '거울'에 불과하다. 예술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고려할 때, 이 한 줄의 메시지에서 영화의 속성과 공유된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막상 나눠진 섹션을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번 영화제에서 눈에 띄는 작품들이 AI에 있다는 인상은 크지 않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영화제가 표방한 AI가 제한적인 의미의 AI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노리스가 모티브가 되었다던 BIFAN의 비유는 하나의 기술보다는 기술적 진보에 가깝고, 에이치 자의 상징물의 안과 밖을 비추는 이미지들은 당대 시대 문화를 반영하는 영화의 속성을 비유하는듯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대를 반영하는(예술) 거울(기술)인 영화를 다루려는 이번 BIFAN의 컨셉에 개인적으로 매우 동의한다. 오늘날 다양한 범주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예술 경험은 매체를 고정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전 시대보다 더 역동적이고 다양하다. 그리고 인류사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기술이었다. 오늘 예술작품 창작 행위에서 종종 사용되는 '행위'나 하이퍼링크처럼 옮겨가는 '상호참조'의 예술은, 인터넷 기술의 빠른 전파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번 BIFAN 영화제는 "기술을 통해 우리는 또 어떤 경험을 또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런 관점에서 출품작들은 충분히 그 질문에 좋은 답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AI와 다수 창작자-심지어 청소년들인- '단일 인간 생산자'에 대한 경계나 '일방향적 수용'이라는 경계를 흩트려놓기도 했으며, 각 세대나 콘텐츠 내에서 기대되는 클리셰를 합치고 변화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작품은 판단과 상상,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흩트려 놓으면서, 10년 전부터 유행했던 메타게임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BIFAN에는 아주 흥미로운 장단편이 출품되었다. 현대영화임에도 고전적인 표현을 통해 기묘한 생동감을 살린 <악마와의 인터뷰>와 같이 흑백 슬랩스틱 영화를 가져와 잔혹함과 유쾌함을 생생하게 표현한 <비버 대소동>,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성장 불안과 컬트하고 키치한 퍼펫을 함께 엮은 <미트퍼펫>, 영화를 말 그대로 체험의 영역으로 이끌어내고자 했던 <신코팟>, 예술가의 강박증과 위대한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고전적인 매력을 보이는 <스톱모션>까지 영화제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쉴 틈 없이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본고에서는 지면상 가장 인상 깊었던 두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제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내가 소개하지 않은 다른 작품들도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내가 선정한 두 영화- <하이퍼보리안>과 <에스퍼의 빛>-는 이 영화에서 내가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던 질문-기술을 통해 영화는 또 어떤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아주 성실하게 답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기술을 통해 다양한 실험이 가능해진 BIFAN의 정신처럼 나의 글도 독특한 지점에 있음을 먼저 알린다. 내가 이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미래예술의 감상 공유에 대한 아이러니한 낙관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몇 안 되는 리뷰글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의 인상이 고정되지 않길 바라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범할 수많은 실수를 먼저 사과하는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느껴지겠지만, 나의 관점은 아주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관객으로서 솔직하다. 근본적으로, 이 글은 영화를 본 당신 옆에 있던 친구와 약간 과몰입해서 떠드는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기술에 대한 이해와 이론을 동원하지 않고 주관적인 시선을 가진 일반 대중인 내가 이러한 플랫폼에 글을 쓰는 것은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낸 읽기 쓰기의 변화나 평론문화의 변화와 덕분이다. 나는 이 부분이 상당히 이번 BIFAN의 평론답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권위가 없다는 점에서 순진할 것이며, 많은 대중을 향해 상영되는 대중의 시선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공적인 장소에서 쓰인 글이 가지는 책임감을 인지하고 있다. 나의 글이 여전히 '이상한 채로 남아'있지만, 진심 어린 애정을 통해 완성되었음을 전하면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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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이퍼보리안


 

온라인 상영작으로도 소개된 이 작품은 작품을 보는 내내 관람객의 사고의 껍질을 까게 한다. '사고의 껍질을 깐다'라는 표현에 대해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작품을 감상한 이들은 이 표현의 의미에 공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작품은 수많은 층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는 처음 관객을 향해 말하는 듯한 배우 안토니아가 자신의 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이 '관객들에게 어떤 사연을 소개한다.'가 첫 번째 껍질이다. 일반적인 메타게임의 형식이 그러하듯, 안토니아는 관객에게 직접 이 말을 검으로써 필름과 영화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나중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안토니아는 자신이 임상심리학자임을 밝히면서, 자신이 만난 조현병 환자 메탈헤드를 소개한다. 안토니아가 자신의 경험을 인용하는 것이 두 번째 껍질인데, 이 시점부터 때때로 의문의 수 있지만 최면을 걸듯 그녀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미묘하게 그 목소리에 통제를 받는 것처럼 묘사되고 주변 등장인물들이 퍼펫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현실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메탈헤드가 열광하고 있는 칠레의 네오나치 영웅 세라노의 이야기에 매료되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여 그것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쯤부터 네오나치 세라노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삽입된다. 신화학과 융의 정신분석학에 심취한 세라노는 히틀러가 죽지 않고 남극의 어느 부분에서 살아있다고 믿었다. 이 세 번째 껍질부터 영화는 종잡을 수 없는 장면들이 연출되기 시작한다. 세라노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부터 안토니아는 화자로서 존재하는 대신, 메탈헤드가 세라노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엑셀작업'을 경찰관으로서 재현한다. 그런 경찰관 안토니오를 나레이터이자 그녀의 상관이 통제하고 조정한다. 그로부터 안토니아는 9mm 필름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고,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안토니아는 남극처럼 보이는 기묘한 곳에서 만난 아바타로부터 카메라가 총처럼 사용됨을 배우고, 카메라를 들고 그 세계를 방황한다. 그녀는 이곳에서 메탈헤드를 다시 조우하고,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마침내 필름을 찾기 위해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지키는 우물에 들어간 그들은, 순수한 아리아인의 세계인 '하이퍼보리안'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에는 순수한 육체에 히틀러의 의식을 심어 넣을 수 있는 일종의 데이터센터가 존재했다. 그곳에서 히틀러를 내보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는 나레이터는 안토니아와 메탈헤드를 구속한다. 그들은 안토니아의 순수한 복제물에 히틀러의 뇌를 이식하고 바깥 세계로 내보낸다. 하지만 메탈헤드의 희생 덕분에 히틀러 뿐만 아니라 제정신을 가진 안토니아도 외부 세계로 나간다.

 

다시 영화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안토니아를 비춘다. 안토니아는 인형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을 겹치면서 현실의 침묵에 집중하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필름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한 첫 번째 껍질로 돌아오지만, 관객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침묵의 인식을 통해 영화가 그 경계를 다시 한번 찢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하이퍼보리안>의 재미는 칠레의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영화 속에 깔린 무의식적 파시즘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동경과 복종은 그 표현과 상징만 바꾸면 사상과 이념의 상처로 얼룩진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한테도 익숙한 것이 된다.

 

나는 영화에서 메탈헤드의 희생을 통해 안토니오와 히틀러-퍼펫-가 함께 나왔다는 비유를 좋아한다. 안토니오는 세라노와 히틀러의 망상에 동조하는 이가 아니다. 하지만 아주 깊은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순결한 피'를 가지고 있음을 묘하게 인식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관의 말을 따라 기계적이고 무의미한 일을 하고, 카메라를 총처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히틀러를 막기 위해 현실로 돌아온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온전히 이성적이지도, 충동적이지 않은 것처럼 안토니오도 그렇다. 무의식이 의식의 세계를 뚫고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사상과 의지의 덩어리인 영화는 현실로 뚫고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인 이유로, 이 작품이 칼 융의 분석심리학을 가져온 부분도 아주 흥미롭게 이해했다. 분석심리학 자체는 정치적이지 않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비와 상징의 세계를 탐구하는 분석심리학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나치가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을 인용하면서 무분별한 학살의 이유를 찾았음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영화는 명확하게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기예를 선보이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심리학적인 무언가로 보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영화를 사회 정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것도 영화의 의도가 아닐 것이다. 수많은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이 영화는 어쩌면, 의식과 무의식, 영화와 현실, 개인 심리와 정치의 경계가 거의 한몸에 가까울 정도로 옅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겹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안토니아가 퍼펫이면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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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스퍼의 빛


 

'에스퍼의 빛'은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이야기할만한 소재가 많은 영화다. 기획은 훌륭했지만, 영화의 만듦새는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왜 영화를 보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통 즐겁기 위해, 배우기 위해 본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어떤 즐거움도, 배움도 허락하지 않는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2시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묘한 사명감으로 온몸을 비틀면서 영화관의 좌석에서 앉아있었고, 수많은 관객이 영화관을 떠났다.

 

BIFAN이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한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나는 TRPG와 영화를 모두 즐겼고, 각각의 매체가 엮이는 것은 어렵더라도 역동적인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적인 장르라고 생각했다. TRPG는 GM의 적절한 유도와 연결, 플레이어들 간의 협동이 있다면 진정한 현재성의 예술이다. 혼자 품어왔던 자신의 상상력을 다른 사람과 함께 적극 엮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예술경험이다. 누군가의 아이디어와 세계를 놀이라는 형태로 진정으로 만나고 싶다면, TRPG는 정말로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그러한 의도로 청소년들의 TRPG 세션을 꾸렸다고 했다.

 

실제 세션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몰라도, 영화에서 내비친 세션은 GM이 적절한 유도를 했다고 보기에는 아쉬웠다. 단적으로 등장시킨 NPC가 단조로운 선택지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상상력을 통해 움직이게 하기보다는 선택지를 제시한다는 점이 그랬다. 다소 일방향적인 전개 때문에 각 캐릭터는 서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각 캐릭터의 단편적인 서사만을 보여주기 급급했고, GM은 이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아낸다는 의도로 이야기를 엮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할만한 찾아다니다 보면, 선택지 게임을 TRPG와 동일 선상에 두는 글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TRPG와 게임은 다르다. TRPG는 선택지가 없지만, 게임은 존재한다. TRPG는 세계관이나 기본적인 캐릭터 설정 외에는 정해진 이야기가 없지만, 게임은 정해져 있다. 행동에 따른 결과를 제시한다면 TRPG의 매력은 터무니없이 감소한다.

 

TRPG로서 역동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아 단조로운 서사를 이어나가게 되었는데, 영화에서 그것을 충실히 전달할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는 하나의 세션에서 하나의 캐릭터를 운용하고, 한 세션에서 거의 여섯 명 정도 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영화는 그것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캐릭터가 NPC와 섞여 등장할 뿐만 아니라, 세계관도 추론을 통해 알아야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의도로 숙련되지 않은 배우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이해하나, 안 그래도 잘 전달되지 않는 발음과 연기로 설명되지 않아 따라가기 어려운 서사를 더 따라가기 어렵게 한다. 이 글을 쓰는 내가 카메라에 관한 기술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야기할만한 얼굴을 비치는 연출과 적은 비용으로 연출한 무대 세팅은 영화를 감상하는 데 심각한 방해가 되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에스퍼의 빛>은 나에게 영화로써 나에게 정말 고문에 가까웠다. 청소년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획의도도 잘 전달되지 않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노련하게 묶어주는 GM이자 영화감독의 존재는 희미해서 TRPG도 영화도 서사는 길을 잃었다. 이 영화에 가해지는 불만은 충분히 그러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일종의 '실험'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뭐가 되었건 '한명의 작가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완성하는 글'이라는 기존의 믿음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이 작품의 작가는 청소년이며, 즉시즉시 떠오르는 트위터의 짧은 텍스트를 합친 것이다. 영화관이라는 공적인 장소에 소그룹의 TRPG 이야기를 옮겨놓고, 서브컬쳐의 클리셰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은 정말로 전례 없는 실험이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퍼의 빛>이 작품상을 받았다는 데에서 공감하고, TRPG 유저나 영화 애호가로서는 아쉽지만 그러한 실험을 시도한 감독의 시도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BIFAN의 정신과 잘 맞는 작품이었고, 이 영화의 실험은 앞으로 더 많은 변용을 통해 멋진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서론에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이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가 이 작품이 가진 가치를 깎아내릴까 봐 몹시 걱정되는 것이다.

 

나는 TRPG의 서사와 영화의 실험이 성역화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고, 두 장르가 더 멋진 시너지를 보여주길 바란다. 그래서 관객으로서는 실망스러웠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끝에 나온 아이들의 어색한 노랫소리는, 조잡한 이야기와 어설픈 기워 설기로 만들어낸 이 작품의 어색한 감동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랴, 그 노래는 감동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본 것을 이번 영화제의 좋은 성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서툴지만 어린 것은 사랑스럽다. 앞서 말한 영화의 힘겨운 여정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묘한 수많은 관객이 것은 그들이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이 잘 보호받아 꿈을 잃지 않고 더 커서 다음에 더 멋들어지는 노래를 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을 위해 먼저는 막 태어난 서툰 아이를 사랑해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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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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