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원할 내일을 기대하기 위한 두 소녀의 사랑 이야기 - 뮤지컬 ‘카르밀라’

뱀파이어 소녀, 인간 소녀 사랑하며 살아가다
글 입력 2024.07.20 02:5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뮤지컬 카르밀라_메인포스터.jpg

 

 

뱀파이어 소녀, 그리고 인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카르밀라’가 지난달부터 막을 올렸다. 끝을 뻔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뱀파이어와 인간의 위태로운 애정 관계라니, 학창 시절 온갖 인터넷 소설을 섭렵하고 그 중에서도 판타지 소설에 몰두했던 입장으로서는 사실 조금 식상한 주제였다.


그럼에도 극장에 발걸음을 하기까지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방점은 ‘소녀’에 있었다. 남녀 간 사랑이 아닌 소녀 간 사랑 이야기, 이건 뻔하고 뻔한 연인간의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뮤지컬 ‘카르밀라’는 나의 이런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정말 오랜만에 따스한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가슴 속에 품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제목의 주인공인 카르밀라는 지루한 영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친, 그러나 외관은 소녀의 모습에서 멈춰버린 뱀파이어다. 그녀는 대외적으로 ‘자매’관계인지만, 실상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움켜쥐고 있는 뱀파이어 ‘닉’과 함께 무미건조한 회색조의 세상에 갇혀 꾸역꾸역 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카르밀라에게 삶이란, 그 어떤 동기도 없이 기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벗어나고 싶은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텅 빈 껍데기 같은 뱀파이어 소녀의 욕망에 불을 붙여 동력을 부여할 수 있는 인물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티 없이 맑은 희망을 지닌 순수한 인간 소녀 ‘로라’ 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닉은 자처해서 카르밀라와 함께 폭풍우 치는 밤, 위태로운 마차를 타고 로라의 집이 있는 슐로스로 찾아가고, 마차 사고를 핑계로 로라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되며 이들의 얽히고 설킨 비극적인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카르밀라_공연사진 (1).jpg

 

 

로라와 카르밀라는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끌린다. 그것은 비단 오래전 로라가 어렸던 시절 그들의 만남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 듯하다. 카르밀라에게 아마 로라는 그 존재 자체로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열쇠가 되어주는 ‘지도’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느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뱀파이어 소녀에게 대책 없을 정도로 순수하게 세상의 아름다운 면을 발견할 줄 아는 인간 소녀는 보라빛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지도 속 새로운 공간에 대한 설레는 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카르밀라에게 로라의 붉은 핏방울만큼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새로운 자극이 되어 다가왔고, 그렇게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그렇기에 이들의 관계를 단순히 연애적 감정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삶의 모든 원동력을 잃고 그저 죽지 못해 살며 은둔하던 카르밀라의 무채색 카렌슈타인 성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와 그 안에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로라,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서만 미래에 대한 기대를 꿈꿀 수 있기에 서로에게 영원한 반려가 되겠다고 피로 맹세한다.

 


카르밀라_공연사진 (2).jpg

 

 

어쩌면 닉 또한 카르밀라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이 비극적 운명의 포문을 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공연이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낙이라는 캐릭터가 아픈 손가락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소중했던 가치도 퇴색될 만큼의 영겁의 시간을 살며 무료했던 닉에게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 카르밀라의 존재가 한 줄기 희망이었지 않았을까?


물론 닉이 카르밀라를 소유하고자 저지른 일들, 그녀의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사냥은 평범한 유한의 생을 사는 인간인 나로서 지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냥 닉을 ‘순수 악’, 내지는 ‘공공의 적’으로 여기기 어려운 데에는 닉과 카르밀라의 관계가 카르밀라와 로라의 관계의 궤적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깐 삐끗하면 언제든 비극으로 접어들 수 있는 관계, 그렇기에 닉이 필사적으로 로라를 감싸는 카르밀라를 향해 외친 “너네라고 뭐 다른게 있을 것 같아?”하는 외마디 비명이 저릿하게 다가왔다. 이 엉켜버린 관계의 중심축에 있는 카르밀라가 닉의 죽음 이후로 로라의 피를 통한 부활을 마다한 데에는 어쩌면 되풀이될 비극적 결말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무의식에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로라가 스스로 불멸의 삶을 선택하면서까지 자신에게도 삶의 의미 그 자체가 되어버린 카르밀라를 살려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나누는 장면은 비단 이들의 (당장은)해피 엔딩에 대한 반가움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나에게 인류애적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카르밀라_공연사진 (3).jpg

 

 

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이 일종의 놀이로 번지고 그로 인해 삶의 희망을 버리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상, 타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워진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내일의 희망을 찾아가자고 약속할만한 사랑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단비 같다.


영생이 아니어도 삶의 궁극적 목적이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진 요즘 세상에서, 마찬가지로 별다른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한 나이지만, 공연을 보면서 조금쯤 인류애적 희망을 꿈 꿔볼 수 있었다. 아, 저렇게 영생을 살아도 될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가, 희망이 되어주는 관계가 있구나. 어쩌면 혼자서 그 의미를 찾고자 바둥거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언젠가는 나에게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줄만한 존재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것은 비단 연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까지 간만에 충만한 기대감에 기인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이 공연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컬처리스트 명함 (1).jpg

 

 

[박다온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0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