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미술/전시]

글 입력 2024.07.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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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답하기 전에 한숨을 한 번 쉬어야 하거나, 말문이 막히거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려야 하는 질문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의 대답은 대개 ‘…모르겠어’뿐이다. 답도 모르는 쓸모없는 질문을 뭐 하러 좋아하나 싶지만, 그 질문을 들은 순간의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을 좋아한다.

 

순간 숨 쉬는 방법을 잊은 듯 숨이 막히며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지금 순간 현실의 고민은 모두 쓸모없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현실을 살아갈 때면 눈앞의 일에 매몰되어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데, 질문을 듣는 순간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 느껴진다. 내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와 같은 우울보다는, 그보다 이 광활한 밤과 별, 우주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그러니 숨이 막히는 것은 어쩌면 우주에서 새롭게 숨을 쉬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말문이 턱 막힌다. 한숨을 한 번 쉬고, 먼 곳을 한 번 바라보고는 결국 ‘...모르겠어’라는 말 한마디만 내놓는다. 1970년, 이 질문을 제목으로 한 그림을 그린 김환기는 알았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이 질문을 사랑했다는 것과 그가 하염없이 대답을 고민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고민의 과정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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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는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자신의 근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다. 인터뷰에서 김환기는 창작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를 읽다가 대단히 아름다운 구절이 나와 그림으로 그릴까,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을 읽고 한국을 떠나 있던 사이에 간절히 그리워진 친구들 생각을 했지요. 이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점 하나하나를 찍어서 그린 것인데, 나는 그리운 친구들을 연상하며 점을 그렸어요. 물론 그중에는 7년 동안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무척 많고요.”

 

 

그리고 그의 에세이에서도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1월 8일. 내 작품은 공간의 세계란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 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 주는 것일까. 그렇다. 내 점의 세계…… 나는 새로운 창을 하나 열어 주었는데 거기 새로운 세계는 안 보이는가 보다. 오호라……

 

1월 27일. 내가 그리는 선, 하늘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가끔 그가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때를 상상해 보곤 한다. 몇 미터가 넘는 캔버스 앞에 서서 파란색과 검은색, 청록색이 가득한 팔레트를 들고 무수히 많은 점과 사각형으로 캔버스를 채워간다. 수많은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내가 그리는 선은 하늘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은 저 별만큼 빛날까? 어떤 사각형은 옆 사각형보다 조금 크고, 어떤 사각형은 조금 작다. 사각형 속 원이 조금 크게 찍혔다가, 이번에는 조금 작게 찍힌다. 그렇게 제각각의 사각형에 둘러싸인 원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캔버스를 뒤덮는다. 각각의 점은 나의 친구 하나, 떠난 친구 하나, 저마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점은 화면 전체에서 바라보면 세계의 일부가 된다.

 

또 김향안의 삶을 다룬 뮤지컬 <라흐 헤스트>에서 김환기 역의 배우가 부르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넘버의 가사는 그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밤 별 나 소리 없는 날 눈 덮인 풍광 푸른색 밤

서울을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그렇게 채워가는 내 점의 세계

점 하나 작은 섬 하나 점 하나 친구들 하나

점 하나 그리움 하나 점 하나 눈물 하나

점 하나 당신 나 하나

우린 서로 만날 순 없을 것 같아도 연결돼 있는 우리

너 하나 나 하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밤은 깊어지고 별은 사라져 간다

나 어둠 속으로 향하네 소리 없는 날

눈 덮인 풍광 속 새로운 창 내 맘을 알아줄 것 같은 내 선의 세계

선 하나 작은 섬 하나 선 하나 친구들 하나

선 하나 그리움 하나 선 하나 눈물 하나

선 하나 당신 나 하나

내가 그린 점 밤하늘의 별만큼 빛날까

내가 그린 선 하늘에 닿았을까

눈 감으면 선명해지는 세상

우린 서로 만날 순 없을 것 같아도 연결돼 있는 우리

너 하나 나 하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는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내가 그리는 선이 하늘에 갔을지, 내가 찍은 점이 별만큼 빛날지 자신에게 질문했다. 그 고민을 보여주는 수많은 점은 그 대신 대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가 그린 선은 하늘이 되었다고, 그가 찍은 점들은 수많은 별이 되었다고. 눈을 감아야만 선명히 보였던 그의 세계는 이제 그가 그린 선과 찍은 점들로 비로소 눈을 떠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그의 세계 속에서 그가 끊임없이 질문해 온 질문의 대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자기소멸과 자기소생을 반복하는 별은 이 질문의 대답 그 자체인 것만 같다. 찰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다시 사랑을 반복한다.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만은 명확한 듯하다. 별이 그러하듯이.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이고,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했구나, 다시 사랑하는구나. 나도 수많은 선을 그리고 수많은 점을 찍고 있다. 언젠가 내가 떠나고 난 뒤 ‘무엇’이 되어 돌아와도 이것이 내 세계였구나, 내 사랑이었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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