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내 일기장을 조각조각 오려서

나라는 사람을 가장 많이 닮아있는 일기장을 살짝 보여드릴게요.
글 입력 2024.07.2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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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일기장.jpg

 

 

자기소개를 할 때 '나'를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고민을 하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몇 가지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라. 음악과 책, 언어는 빠질 수 없겠고 천문학과 뇌과학에 대한 잔 지식 몇 가지, 몇 안 되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박혀있는 어린 나의 기억들. 가족들이 나누어 준 사랑을 기워 만든 심장, 고독,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많던 욕심. 그런 것들을 조금씩 떼다 붙이면 나를 닮은 형상이 만들어지겠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담겨 있는 것은 단연 내 일기장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기장이란 보통 일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적는 것이지만, 어쩐지 그간 적어 왔던 내 일기장들을 훑어보면 일상 속의 내 관념과 침묵을 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 것들도 결국은 일상에서 벌어졌던 일들로 만들어진 것이니 일기장에 적어도 되지 않으려나. 아무쪼록 나를 닮은 것들은 맞으니, 이것들을 조금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래는 작년부터 적어 왔던 최신 버전의 내가 적은 일기의 일부다. 나는 나에 대해 설명하는 재주가 좋지 않아서, 죄송하게도 친절한 방식은 아니지만 아랫글을 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유추해 봐주셨으면 좋겠다.

 

 

2023년 3월 14일 - 시간은 더딘 척하면서 참 부지런히도 흘러가는구나. 2월에 결정하겠다고 한 것 중 그 무엇 하나 턱턱 내놓지 못했는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 3월에, 종국에는 봄. 해사한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라도 내가 가진 것들 세상에 보여줄 기회가 있을까. 9시간 수업을 듣고 나니 허리가 말이 아니다.

으악

던져버리고 싶은 봄의 시작이자 겨울의 반란이다.


2023년 9월 25일 - 스물한 살의 나는 참 사랑하는 것들이 많았고 그래서 슬펐구나. 역시 나를 위로하는 건 나.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은 또 이렇게 전해준다. 그럼 난 또 두 눈 크게 휘어 접으며 살아가 봐야지. 폴란드에는 이 일기장과 새로운 노트 하나를 들고 가야겠다. 가서 과거의 나에게 위로받고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사료들을 더 적어 와야겠다. 나는 아직도 슬퍼. 새로운 시작이 두려워. 내가 겪을 일들이 꼭 나를 짓밟을 것 같아. 그래도 난 지지 않아. 여전하게 나로 살 거야.

 

2023년 12월 19일 - 견딜 수 없이 슬퍼지고 견딜 수 없이 사랑하게 되는 건 나만의 습성인가 인간의 습성일까. 봄과 사랑과 결의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피고 진다던데.

 

내 발길질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쓰레기들을 다시 주워주는 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다. 고민은 너무나 쉽게 살이 찌고, 희망이란 건 아무리 입에 자양분을 쑤셔 넣어줘도 죽죽 살이 빠진다. 너무 따뜻한 겨울이란 건 내가 낄 틈도 없게 나보다 훨씬 더 이상해서 배가 아프다.


2024년 1월 10일 - 볼펜 심을 새로 갈아 끼웠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이렇게 금방 길이 들고 그러다가 해져버리고 만다. 사람도, 배움도, 사랑도. 처음엔 지금처럼 곧잘 정갈하다가 결국엔 다 옅어지고 말아서 한 글자씩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꾹꾹 눌러가며 적게 되겠지. 언제든 다시 외로워질 거란걸 명심할 것. 외로움은 늘 갑작스럽게 나를 먹어버리니까.

 

2024년 3월 25일 -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들을 한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마음과 해야 하는 마음이 모순된 관계라면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까지는 아직 모르겠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오락가락. 새벽 6시에는 해가 화창해서 눈을 떴고, 오전 10시에는 비가 왔다. 오후 2시에는 다시 해가 떴고, 3시에는 폭우가 내린다. 변덕스러운 게 꼭 내 마음 같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즐거운 마음이 슬프다.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다 보면 기필코 다시 슬퍼지고 말 테니까.

 

근데 그럼 뭐 어떠냐. 나는 언제든지 슬퍼지고야 마는 마음을 가졌는걸.

 

2024년 5월 27일 - 보고 싶다는 말 없이 보고 싶었다고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1년 동안 보고 싶고 닿을 수 없어 너무도 그립던 것들은 마음속 서랍을 하나하나 다 열어봐야만 그 이름들을 제대로 불러볼 수 있을 만큼 쌓여버렸는데, 막상 돌아가면 보고 싶었다는 말들이 이미 목구멍에 눌어붙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다. 외로움은 무엇이고 그리움은 무엇인가. 외로움은 실체가 없어도 성립하지만 그리움은 그럴 수 없는 것?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는 한 번도 직접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너무도 쉽게 그리워할 수 있다.

 

2024년 6월 3일 - Q. 가장 좋아하는 계절과 그 계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사람에게 할 말이 있다면.

 

A. 살면서 여름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도, 여름마다 좋아하는 것들이 생기는 걸 보면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해봐도 되겠지. 너는, 자라나는 손톱을 보고 이별한 연인에게 난 늘 이만큼 네 생각을 한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잘라도 잘라도 자라나는 내 가장 모호한 그리움이었어. 사람들은 내가 널 좋아하는 거라고 말했고, 나도 혼란스러웠지만 어제 어느 책을 보니 사람은 원래 모호한 관계에 있던 사람을 제일 그리워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냥 우리도 그랬던 걸로 치자. 원래 여름이라는 건 어물텅하게 섞여가는 계절 아니겠어. 잘 지내. 그렇지만 마주치지는 말자.

 

2024년 7월 18일 - 미래는 78살이 되어도 36살이 되어도 94살이 되어도 두려울 것이다. 하기 싫고 귀찮은 일들을 계속 생길 테고. 그러니 일단 그냥 해버리자. 지속이 안 되면 말고~ 맞으면 맞고 아니면 말고 삶은 가볍게 사랑만 무겁게.

 


[황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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