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주제곡은 무엇인가요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7.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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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 '음악소설집'의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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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소설집”은 음악 전문 출판사 프란츠에서 출판된 음악 소설 앤솔러지이다. 음악이라는 광활하고도 다채로운 세계에서 5명의 작가는 각자의 해석을 곁들여 순간의 장면을 창조해 낸다.

 

나는 평소 책과 어울리는 음악 찾기를 좋아하고 글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순간을 즐겨한다. 운이 좋아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이 적절한 음악을 찾을 때면 나도 모르게 환희가 느껴지곤 했다. 때문에 음악의 넓은 틀 속에서 작가들이 어떻게 글을 펼쳐나갈지 기대되었다.

 

부가적인 치레나 꾸밈없는 ‘음악소설집’이라는 간결한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이렇게 제목으로 직관적인 흐름을 알아챌 수 있는 책들이 끌리기 마련이다. 사방에 펼쳐진 옅은 숲과 같은 표지를 안아 들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Love Hurts: 언어의 유희라는 트리거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한 여성이 애인과 대화를 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팝송 ‘Love Hurts’를 듣던 연인은 가사를 두고 의견 차이를 보인다. 은미는 I’m young이라는 영어 문장을 안녕이라는 한국어로 받아들였고, 애인인 헌수는 그 부분을 다시 들려주며 틀린 부분을 집어낸다. 음악에서 시작된 사소한 에피소드 혹은 헤프닝은 결국 이별의 신호탄이 되고, 어리지만은 않았던 두 사람은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결국 헤어짐을 자처한다.

 

 

헌수가 ‘뒤로 가기’ 단추를 눌러 러브 허츠를 처음부터 다시 재생했다. 그러곤 내가 말한 문제의 그 대목을 찾으려 모든 부분을 주의 깊게 들었다. 하지만 곡 중간에 이르러 그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암 영이네. 안녕이 아니라.

-응?

-여기 이 부분. 암 영, 아이 노우 하는데.

헌수가 ‘뒤로 가기’ 단추를 눌러 그 부분을 다시 들려줬다.

-여기

 

나는 두 눈을 끔뻑이다 뭔가 깨달은 듯 이내 창피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다른 언어가 비슷한 소리를 가져 일으킨 언어의 유희이자, 일종의 말장난인 아임 영과 안녕은 그 후에도 은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몇 년 후, 엄마의 병간호와 퇴사로 지쳐버린 은미는 영어 화상 수업을 하던 중 로버트라는 이름의 캐나다인 중장년층 남성과 만나게 된다. 동시에 킴 딜과 로버트 폴러드가 부른 ‘Love Hurts’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헌수를 생각하게 된다.

 

헤어진 지 2년째, 헌수는 병간호 중인 은미에게 전화를 걸어 러브 허츠와 비롯된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아임 영을 안녕이라고 고쳐주는 대신, 팝송에 새겨진 한국어가 예쁘다고 해줄걸. 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떠나간 연인의 부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

 

그리고 은미는 그 이야기를 로버트에게 해주고 싶다. 화상 수업에서 이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로버트와의 대화에 끝이 존재하는 것을 아쉬워한다. 마지막 대화에서 ‘나’와 로버트는 작별 인사를 고한다. 로버트의 답신을 듣기 고대하는 순간, 화상 통화 시간이 종료되고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영영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두 연인의 헤어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엄마의 병간호를 하게 된 은미는 헌수에게 정중한 헤어짐의 요청을 하게 되고,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만남을 주고받지만, 그 끝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이라는 결과만이 존재한다. 그들의 이별은 헌수의 말인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로 짧고 함축적으로 설명된다.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부모님을 모두 병으로 잃고 대학 시절 포함 10년을 간호로 보냈던 헌수는 이별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헤어진 후 은미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고 사과의 뜻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 은미를 붙잡지는 않는다. 불가피하게 쏟아지는 사건들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사소한 발버둥에 그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로버트와의 대화에서도 적용된다.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만남은 온라인에 국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틋함을 자아낸다. 언어라는 거대한 장벽을 마주한 그들은 제한된 애정을 나누고, 화면 속에서 비치는 서로의 모습에 친밀감을 느낀다.

 

앞서 본문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사실 화상 수업에서 만남과 헤어짐은 우발적이고 돌연하게 일어난다. 정이 들었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떠나가기도 하고, 그 빈자리를 메워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다. 유동적이고 실체가 없는 공간 속에서 은미는 결국 로버트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하고, 그의 입 모양에 평안을 기원하는 안녕을 되새긴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나는 어렸을 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문장을 꺼렸다. 포괄적으로는 운명이라는 큰 테두리가 작동하는 것이 싫었다.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무게감으로 다가왔고, 세상을 좌우하는 조종자가 내 인생을 건드릴 것만 같은 인상이 느껴지는 것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젠 운명이라는 모호한 단어에서 일말의 희망을 느낀다. 사실 개인의 삶에서 뜻대로 흘러가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어느 것에 지원하고 탈락하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병에 걸리거나 심지어는 죽음의 문턱에 맞닥뜨리기까지. 많은 일들이 정확한 인과 관계에 의지하기보다는, 이 책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다.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를 투영하여 책임을 물거나 스스로를 자책하기보다도 운명이라는 큰 범위에 삶을 맡기는 것이 오히려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빛: 오므라이스의 진실


 

김연수의 ‘수면 위로’는 은희라는 이름의 여성이 심리적인 환기를 위해 유튜브 영상을 찾으며 전개된다. 나무 바라보기를 권장하는 영상으로 효과를 본 은희는 채널에 들어가 업로드된 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세상을 떠난 애인 ‘기진’의 흔적을 발견한다.

 

영상 속 기진은 중국집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으려던 채널 주인 ‘유주’에게 말을 걸며 본인이 시간 여행자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기진이 말하는 시간 여행자의 느낌이란 ‘기시감과 신맛, 그리고 자살 충동’이다. 그는 같은 하루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찾기 위해서죠. 지금 이 순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금 여기에서 그걸 찾아야 해요. 그게 내가 기시감, 신맛,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에 대한 나의 가설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몇 번이나 이 하루를 다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희는 영상을 보고 나자, 그와의 추억이 떠오른다.

 

몇 년 전, 피아노 연주회에서 기진은 드뷔시의 ‘달빛’에 심취해 버리고, 그들은 결국 마지막 버스를 놓친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기진은 달빛에 어울리는 음식을 ‘오므라이스’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 닮은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기진에게 오므라이스와 달빛은 유구한 연관성이 있다. 과거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기진의 엄마는 남편의 부재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지나친 우울에 빠진다. 삶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죽음으로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한다. 반복되는 하루에 권태감을 느껴 기시감, 신맛, 자살 충동이라는 패턴을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암울한 결말 대신 살아갈 힘을 얻고 비로소 본인을 위한 인생을 펼쳐간다. 이는 기진의 ‘달빛’ 교습을 위해 찾아간 피아노 학원에서 자미두수로 용하다는 중국집을 소개해 준 결과였다. 오므라이스를 잘 하기로 소문난 그 중국집에서 엄마는 반복되는 하루에서 벗어나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소설에서 기진이 왜 죽었는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사실은 등장하지 않는다. 은희가 기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개인에게 느껴지는 삶의 진실과 무게라는 중심을 관통한다. 다루는 사람에 따라 보잘것없고 허술할 수도 있으며 그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 바로 삶이다. 어느 하나라고 확답할 수 없는 삶의 양면성은 이차원 종이 나라와 삼차원 종이 나라에 빗댄 문장으로 수렴된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행복하고 슬프지 않다.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이 모두를 말해야지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닐까?

 

 

책의 뒤편에 자리한 인터뷰에서 청각적인 것, 시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 등 중에서 소설 쓰는데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수면 위로를 읽는 동안 독자가 오므라이스 한 그릇을 완벽하게 떠올릴 수 있거나 부엌으로 가서 뭔가를 먹는다면 소설을 쓴 사람으로서 매우 기쁠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떤 감각이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놀랍게도 수면 위를 읽고 나자, 시큼달콤한 소스가 마구 뿌려져 폭신한 계란을 적신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어졌다. 작가의 인터뷰는 아직 펴보지도 않았던 때였다. 곧장 부엌으로 가 부족한 솜씨를 발휘하여 오므라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다양한 조리법을 찾아보다 중식당에서 식사 메뉴로 제공될 법한 기본적인 오므라이스 레시피를 응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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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한 시간이 걸려 보기에 그럴싸한 오므라이스가 만들어졌다. 숟가락으로 푹 떠서 한 입을 가득 채우자, 기존의 요리 실력 이상으로 풍부하게 오므라이스의 맛이 다가온다. 그것은 소설이 주는 신비로운 마법일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오므라이스는 김연수 작가가 일본 나고야에서 느꼈던 놀라움을 전달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은 글이라는 이동 수단을 거쳐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와닿는다. 시각, 후각, 그리고 미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은 일련의 전송 과정을 거치며 잠시나마 기진이 되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이끌어 준다.


 

 

자장가: 죽음을 위로하는 방법


 

윤성희의 ‘자장가’는 교통사고로 죽은 ‘나’가 남겨진 엄마를 바라보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은 ‘나’에게 서운함을 안겨준다. 반듯하게 누워 잠을 자는 엄마를 보며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잠을 설쳐 나를 그리워했으면 하는 바람이 떠오른다.

 

그러나 엄마와 친한 지인인 ‘꽈배기 이모’와의 대화를 엿들으며, 자신을 꿈속에서 보기 위해 일부러 잠을 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애 꿈을 꾸고 싶어서 나는 잠을 자. 어떤 날은 종일 자기도 해. 그런데도 한 번도 꿈속에 나오질 않아. 그게 무서워.”

 

엄마가 우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엄마와 나는 즐거울 때는 같이 웃었지만 슬플 때는 서로 모른 척했다. 위로를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가끔 상처를 받기도 했다. 엄마도 나에게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의 슬픔을 알아차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들키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 장면을 통해 슬픔에 잠겨있는 엄마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이후 자신과 같이 영혼만 남아있는 학생 ‘지구본’을 만나고,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 자장가를 부르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된다. 육체는 사라진 지 오래인 망자들은 그들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력한다. 딸이 죽은 날 신고 있었던 짝짝이 양말을 매일 같이 신는 엄마의 곁에는 매일 밤 자장가를 불러주며 손을 잡아주는 ‘나’가 존재한다.


죽음을 추모하는 방식이 꼭 보이는 슬픔일 필요는 없다. 정형화된 슬픔의 자세로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이별을 경험하고 개인의 방식으로 애도한다. 청소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추모의 방법으로 ‘나’는 엄마의 마음을 깨닫고 꿈속에서 못다 한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갑작스럽게 덮쳐온 죽음이라는 큰 파도를 견뎌내는 인물들은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행성: 우연과 인연 사이


 

은희경의 ‘웨더링’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7월의 마지막 주 비 내리는 주말 아침으로 서두를 놓는다. 클래식 공연 진행자인 기욱은 G시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하던 중 기차표를 잘못 예매한 것을 확인한다. 그는 할 수 없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좌석인 4인석 중 한 자리를 예매한다. 예상과 달리 4인석은 피치 못할 사연으로 탑승한 4명의 개인으로 구성된다.

 

노인과 기욱, 그리고 인선과 준희. 곧 좌석 한가운데에 위치한 탁자가 펴지고, 노인은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 악보를 꺼내 읽는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관현악곡 풀스코어의 등장에 노인을 제외한 나머지 3인은 악보의 제목으로 이목을 집중하고, 삶에서 ‘행성’이 스며들었던 기억을 꺼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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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은 후배의 부친상으로 문상을 가던 길이었다. 그녀는 전 애인과 장례식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일말의 미련을 갖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자리를 위해 G시로 이동하던 중이다. 그러다 노인의 악보에 새겨진 행성이라는 곡명을 보고 전 애인과 연인이 되었던 순간을 떠올린다. 점성술과 별자리의 움직임을 믿는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몇 가지 단서들을 통해 옛 연인을 만날 일종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기욱은 클래식을 전공했으나 현재 음악회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클래식에 매료된 것은 중학교 1학년, 음악 시간이었다. 반장이었던 그는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에 대해 질문하는 음악 교사의 날카로운 질문을 맞받아친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교사의 태도로 다른 학생들이 꺼렸던 것에 반해, 기욱은 그에게서 무력한 슬픔의 분위기를 엿본다. 그리고 그 감정의 풀이 대상이 왜 자신이었는지를 궁금해한다.


준희는 회사 팀장의 문자를 받고 지방으로 문상을 가게 되던 중 인선과 동행한다. 행성이라는 곡명을 보고는 핸드폰 어플로 검색해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비 오는 주말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음악을 감상하던 준희는 행성의 몽환적인 사운드에 빠져들고, 이내 눈물을 흘린다.


세 명의 인물이 생각에 젖어있는 동안, 노인은 한 시간 반이 넘는 이동 시간 동안 행성의 악보를 천천히 읽어나간다. 인선이 호기심으로 말을 걸자, 노인은 악보를 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나이가 들면 소리를 듣는 게 느려져서, 나한테 맞는 속도를 찾게 되는 거요. 시간을 이겨내는 사람은 없으니까.”

 

 

노인은 요양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형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다. 평소 노인의 형은 행성의 4악장을 가장 좋아했으나, 현재 건강의 악화로 소리조차 잘 듣지 못하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인선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보고 기욱은 예전 음악 교사를 떠올린다. 예측해 본 나이와 목소리, 음악취향을 고려했을 때 노인은 25년 전 음악 교사와 얼굴이 겹친다. 그러나 기욱은 용기 내 다가가지 않는다. 자신을 알아보길 원하지 않을뿐더러 그가 영향을 미쳤을 기욱의 위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차는 마침내 G시의 역에 정차하고, 기욱은 쏟아지는 폭우에 우산의 부재를 생각하며 머뭇거린다. 그때 노인은 기욱에게 친근한 말투로 우산을 건네준다. 노인은 방금 들려온 부고 소식으로 다시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 기욱은 자신이 잘못 잡았던 여분의 표를 주기 위해 노인과 같이 창구로 향한다.


‘웨더링’은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이라는 곡을 매개체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기차 4인석에 앉게 된 4명의 인물은 약 두 시간이라는 제한된 이동 시간 동안 환상적인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단체석에 자리 잡은 개인은 눈앞에 존재하는 서로를 관찰하고 의심하며 심지어는 대화를 시도해 알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어떤 진전도 없이 각자의 위치에 남게 되는데, 이것은 낯선 타인과 삶의 궤도가 잠시 겹쳤을 때 생길 수 있는 보편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이를 우연이라고 부른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우연과 인연은 대비된다. 인선과 준희는 장례식에 가기 전, 도서관 음악회를 가려던 계획을 취소한다. 기욱이 진행하는 그 음악회에서 인선은 옛 애인 대신 기욱과 재회할 수 있었으나 순간의 선택은 미래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만남을 좌우한다.

 

반대로, 기욱은 음악 교사가 본인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노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러나 기차가 G시에 도착하자 노인은 인선과 나누었던 딱딱한 대화와 달리 반말로 기욱을 부른다. 자신은 우산이 필요가 없으니 대신 쓰고 가라는 정보도 흘린다. 기욱은 홀린 듯이 소설 초반에서 언급했던 잘못 예매했던 표를 창구에서 주겠다며 관계를 진전시킨다. 우연으로 마주 앉아 음악으로 얽혀진 4명의 인물을 통해 우리는 우연과 인연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체감한다.

 

 

종착역에 도착한 승객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눈을 뜬 듯 제각기 들뜨고 설레는 표정으로 짐과 우산과 일행을 챙기느라 기차 안은 어수선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마치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명했던 관객들이 무대가 끝나고 사방이 환하게 밝혀지자 다시 타인으로 돌아가는 모습과도 같다. 단잠에서 깨는 듯이 기차라는 몽환적인 공간에서 비가 내리는 현실로 돌아오는 장면은 소설을 완벽하게 매듭짓는다.

 

 

 

카세트 속 목소리: 희망의 목소리로


 

편혜영의 ‘초록 스웨터’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엄마를 병으로 잃은 ‘경주’가 등장한다. 짐 정리를 하던 중, 엄마가 뜨다 만 초록 스웨터가 발견된다. 너무 큰 사이즈에 도무지 제 것이 아니라고 느낀 경주는 스웨터의 주인을 찾아주고 싶다.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몇 년 후, 갑자기 경주에게 오래전 도움을 주었던 엄마의 지인 ‘영주 이모’가 찾아온다. 이모는 함께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중학생 때 엄마와 이모가 동시에 친했던 ‘나주 이모’는 엄마에게 빌린 돈이 있다. 그리고 오백만 원을 미납한 채, 엄마의 장례식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나주 이모에게 피아노를 배워 안면이 있던 경주는 영주 이모와 강화도로 떠난다.

 

수소문 끝에 나주 이모를 만난 경주와 영주 이모는 같이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중학생일 시절 즐거웠던 한때를 기억하다가, 엄마의 목소리가 담겨있을지도 모르는 테이프를 찾아 경주에게 준다. 엄마가 남겨 둔 스웨터와 테이프, 그리고 엄마와의 기억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이들의 만남은 다음을 기약한다.


제목으로 등장하는 엄마의 ‘초록 스웨터’는 완성되지 못한 채 존재한다. 주인을 찾고 싶었던 경주는 마저 뜨개질을 이어가고,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뜨개질을 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비어 있던 공백을 채워가고, 땀의 크기는 저마다 달라져 간다.

 

이야기에서 초록 스웨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스웨터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엄마는 어떤 목적으로 스웨터를 떴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엄마의 유품인 미완성 스웨터가 시사하는 바는 주인 찾기가 아니라, 스웨터를 구성하는 여러 인물과 소통하며 나의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일종의 치유 과정이다.

 

 

불현듯 이모에게 내가 느낀 상실감을 말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내게 “시간이 흐르면”하고 시작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 사람보다 기어이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도 그 말에 의지했지만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갈 뿐이고 마음은 여전했다. 

뜨개바늘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자 이모가 하다 보면 나아진다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나아진다.’라는 위로의 말을 전한다. 슬픔으로 가득 찬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섣불리 해서도 안된다. 그렇기에 미래를 기약하며 겉으로 매만질 뿐인 말을 상투적으로 하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인용한 문장처럼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결국 애도를 경험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니라 그저 남겨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메워질 수 없어 보이는 깊은 상처에 한겹 한겹의 사람과 마음이 쌓이다 보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뜨개질로 스웨터가 점차 늘어나며 옷에 양감을 더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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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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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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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자
    • 글 잘 읽었습니다 내일은 저도 오므라이스를 해먹어보려고요
      오늘 달이 참 밝고 컸는데, 달빛과 오므라이스가 어울리는지 한번 경험해봐야겠네요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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