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랍스터 - 우리는 과연 체제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영화]

글 입력 2024.07.2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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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호텔이 있다. 이곳에선 애인 만들기가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한다. 정확히는 동물이 되는 것이다. 유일한 자비는 호텔에 온 첫날 자신이 정한 동물로 바꿔준다는 점뿐이다.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선 호텔에 머무는 기간 내 애인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동성애자는 동성애자끼리, 이성애자는 이성애자끼리.


사실 <더 랍스터>의 세계관에선 호텔에서만 이 규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 내 사회 전반의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다. 애인이나 배우자가 없다면 규정 위반자가 된다.


<더 랍스터>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세계관을 요약하여 보여주는 듯하다. 한 여자가 운전하다 멈춰서더니 들판의 당나귀를 총으로 쏜다. 당연히 당나귀는 쓰러져 죽고, 여자는 유유히 돌아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여자가 마치 자신이 죽일 당나귀를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한다는 점인데, 화면에서 당나귀는 두 마리가 등장하지만, 여자는 망설임 없이 화면 왼쪽의 당나귀를 죽인다. 여자는 잠시 죽은 당나귀를 바라보다 돌아가고, 오른쪽에 있던 다른 당나귀는 죽은 당나귀에게 다가간다.


이 시퀀스는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이 앞 장면을 떠올리게 하여,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돕는다. 그렇다면 오프닝 시퀀스는 곧, 세계관을 설명해 주는 장치로서 작동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나귀를 죽인 여자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지점 또한 여자는 영화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닌, 세계관 내에서 실제 일어날 법한 하나의 사건을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로 인해 관객은 영화 전반의 세계관에 대해 곱씹게 되고 영화를 복기하며 톺아보게 된다. 말하자면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속으로 관객을 불러들이는 안내자이자 리마인더인 셈이다.


영화의 세계관은 심하게 과장된 것처럼 보인다. 기한 내 애인을 만들지 못하면 동물로 만드는 큰 설정부터 시작하여 중간이 없는, 모든 것에 양자택일만이 존재하는 사소한 설정 또한 그러하다. 기이할 정도로 부풀려진 세계관은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초현실적 요소는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여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관객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스크린 밖 실제의 사회와 영화를 비교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영화는 실제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웃기면서 슬프게 만드는,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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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이란 거울


 

데이비드는 아내에게 버림받아 호텔에 오게 되는데 영화의 시선은 아내가 데이비드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는 관심 가지지 않는다. 아내가 데이비드를 버리고 다른 애인을 만들었다는 윤리적 문제보다, 데이비드가 현재 애인이 없는 솔로 상태라는 것이 <더 랍스터>의 세계관에선 더 큰 문제점이며 솔로가 되어 호텔에 가야만 하는, 사회에서 지정한 준 규정 위반자 신세로 전락했다는 데 집중한다.

 

이는 사랑이란 감정이 가지는 그 자체의 중요성보다 사랑을 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생존 가능성의 증가 속성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호텔에 처음 온 날, 모든 사람들은 데스크에 자신의 신체 사이즈부터 성적 지향까지 낱낱이 밝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데이비드는 동성과 성적 접촉을 한 적이 있음을 근거로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고민하다 양성애자 항목은 없느냐 묻는다. 하지만 호텔 직원은 양성애자 항목은 없어졌으며, 무조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중 하나의 선택만을 요구한다. 데이비드는 곧이어 이성애자로 선택하겠다고 답한다.


이 부분에서부터 <더 랍스터>의 세계관은 극단의 이분법적 체계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호텔에서 양성애자 항목을 지운 사유는 ‘운영상의 문제’라고 하는데, 여기서 ‘운영상의 문제’란 인간을 편리하게 구분하기 위한 합리적 방법이다. 우리는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물류 창고의 물건처럼 분류한다는 점에서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어려운 소수를 묵살하고 개개인을 억압하는 사회 체계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곳의 고객들이 호텔 이용 기간을 연장하는 방법은 호텔 외부의 숲에서 숨어 생활하는 솔로들을 사냥해 오는 것이다. 솔로를 사냥해 온 수만큼 호텔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된다. 호텔은 규정 위반자이자 정상적이지 못한 인간을 수용하는 격리 시설로서 재교육 기관의 역할뿐 아니라, 개개인의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사회 체계를 더욱 견고히 한다.


사회의 입장에선 호텔 고객들이 숲속의 솔로들을 사냥해 오는 것이 가장 깔끔하게 사회 문제자들을 처리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고객들의 경쟁의식을 돋우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사냥 행위를 통해 누군가는 애인을 만들어 하루라도 빨리 이 끔찍한 호텔에서 벗어나겠단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애인을 만들기 위해 사냥을 많이 하여 하루라도 더 호텔에 있겠단 생각을 할 것이다. 두 가지 생각 모두 고객으로 하여금 애인을 만드는 것이 관심사 일 순위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랑을 수단으로 사용하든, 목적으로 두든 사회는 개인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거대하게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사회 권력은 개인을 조용히 조종할 뿐이다.

 

호텔 직원들은 고객들을 앉혀놓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상황극까지 동원하며 설명한다. 상황극은 영화의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극단적이고 과장된 예시로만 구성되어 있다. 솔로 여성이 혼자 다닐 경우에 강간범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남자인 애인과 함께 있다면 안전하다는 상황극. 이를 통해 커플의 대단함을 설명한다.


고객들은 상황극 연기에 모두 박수치는데 이 부분은 마치 세뇌의 현장처럼 보인다. 또한, 호텔 직원들은 이성애 커플의 상황극만을 예시로 들고 동성애 커플의 상황극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를 통해 영화 속 사회는 “정상성”을 유지하려는 세계임을 암묵적으로 표현한다. 영화가 구축한 사회와 현실의 사회가 겹쳐 보이는 부분이다.


호텔에서 애인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요소는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공통점은 서로를 운명의 상대처럼 느끼게 하여 심적으로 연결해 주고, 사랑을 지속시키는 동력을 제공한다. 공통점이 사랑의 필수적 요소로서 여겨지는 것이다. 공통점은 영화를 이끄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다리 저는 남자는 자신과 같이 다리를 저는 여자를 기다린다. 데이비드는 다리 저는 남자에게 새로 들어온 여자 중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지만, 다리 저는 남자는 ‘며칠 후면 멀쩡히 걷겠지’라며 중얼거린다. 다리 저는 남자는 장애인이다.


장애인은 사회에서 약자이자 소수자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소위 ‘정상인’, ‘일반인’으로 칭해지는 사람들의 틈에서 원하는 만큼의 소득을 얻기 불리한 상황이기에 더욱더 상대를 깊이 분석하고, 의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호텔에서의 개인적 소득은 애인 만들기이다. 다리 저는 남자는 걱정하고 있다. 자신이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거절당하거나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는 상황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는 태도는 그를 시종일관 예민하고, 피곤하게 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은 절대 동물이 되지 않고 애인을 만들 것이라 화내는 남자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다리 저는 특성을 제쳐두고, 상대방의 특성에 맞추어 다가간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코를 때리거나 부딪쳐 코피를 낸다. 이는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이다. 자연적인 공통점이 아닌, 인위적으로 공통점을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호텔이 정한 금지 사항 중 하나지만, 다리 저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리 저는 남자는 다른 이들보다 심하게 인간으로서의 생존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그가 연기를 잘한 덕에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와 연인 사이가 되지만 다리 저는 남자는 끊임없이 애인과의 공통점을 증명하기 위해 코를 찧어야 할 것이다. 관객은 다리 저는 남자가 과연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것이 진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된다. 이러한 선택은 그의 개인적 선택이 아니다. 사회의 위협 아닌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생존 본능인 것이다.


데이비드는 다리 저는 남자를 따라, 같은 방식을 이용하여 애인을 만들려 한다. 상대의 고통에 눈 깜빡하지 않는 비정한 여자를 애인 상대로 정한 데이비드는 비정한 척 연기한다. 커플로 이뤄지긴 하지만, 데이비드는 얼마 못 가 여자에게 비정하지 못한 성격을 들켜버린다.


여자가 데이비드의 형을 죽였기 때문이다(데이비드의 형은 몇 년 전 호텔에서 개가 되었고, 데이비드는 개로 변한 형과 함께 다닌다). 여자는 데이비드를 고발하기 위해 그를 끌고 가지만, 그 과정에서 데이비드는 여자를 마취총으로 재운 뒤, 동물로 변하는 방에 밀어 넣는다. 이 사건으로 데이비드는 진정한 규정 위반자로 거듭난다. 거짓말로 사랑을 했고,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호텔에서 도망치게 되는데, 도망을 시작으로 그에게 생존의 의미는 더욱 각별해진다. 호텔 사람들에게 잡히면 무조건 동물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그는 일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숲속으로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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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좌우반전


 

숲은 호텔과 정반대의 규칙으로 돌아가고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선 사랑하지 못한다. 오로지 솔로로 지내야 하는 룰을 가지고 있다. 이 룰을 깬 자는 고문을 받고, 심할 경우엔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호텔 생활에 지친 데이비드에게 숲은 일순간 자유를 가져다주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억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하지 않아도 되고, 공통점을 찾을 필요도 없으며 하고 싶은 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억압당하지 않는 공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데이비드는 또 숲의 규정 위반자가 되어 버리고, 솔로 무리 중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 데이비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자와의 공통점을 찾는다. 둘의 공통점은 근시라는 점이었다.


억압된 공간에서 상대와의 공통점 찾기는 부담되었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난 후의 공통점 찾기는 매우 특별한 것이 된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생존을 위한 선택보다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듯 말이다.


솔로 무리가 한밤중 호텔을 급습하는 에피소드는 사랑하는 것만이 정상인 듯 규정한 숲 밖의 사회를 냉소한다. 솔로 무리는 커플들이 믿고 있는 사랑의 굳건함을 전복시키고, 그들의 관계를 어지럽힌다. 특이한 것은 솔로 무리가 호텔 사람 중 그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들은 자신들을 이단아, 불복자로 규정한 사회에게 우리는 틀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솔로 무리는 커플들에게 궁지에 몰린 개인은 애인을 언제든지 버리고 자신의 목숨부터 부지하고 싶어 한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직접 느끼게 하곤 떠난다. 하지만 솔로 무리의 행동 또한 호텔이 행하는 억압과 별 다를 바 없다. 원자적 개인과 개인 자유의 중요성을 표방하면서도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할 자유를 주지 않는다. 규정이라는 명목하에 집단이 개인을 억누르는 것이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는 이러한 숲의 억압에 못 이겨 도시로 떠나 “정상” 커플로 살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계획은 솔로 무리의 리더에게 발각되는데 그는 근시 여자를 속여 눈 수술을 받게 한 다음 눈을 멀게 만든다. 이 때문에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 사이의 공통점은 사라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기에 데이비드는 눈이 멀어버린 여자를 부축하며 도시로 떠난다. 공통점이 사라져 버린 사랑의 존속을 위해 데이비드는 자신의 눈을 찔러 여자와의 공통점을 새롭게 생성하고자 한다. 데이비드는 머뭇거리며 망설인다. 그가 눈을 찔렀는지, 찌르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들은 커플이 권력자인 도시로 떠났지만, 데이비드가 눈을 찌르지 않는 이상 사회가 규정한 커플의 법칙인 공통점이 없는 커플이기에 “정상” 커플이 될 순 없다. 근시 여자 또한 호텔에서 지냈을 과거를 상상해 본다면,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 모두 호텔, 숲, 도시에서 약자이다. 그들은 정상성의 범주 바깥의 인간이며 규정을 어긴 위반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근시 여자는 눈까지 멀어버린 상황이므로 약자 중에서도 최약체가 된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의 사랑이 지속된다 해도 여자는 정상성의 범주 안에서의 약자이다. 데이비드는 여자를 따라 사회의 최약체로 자리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데이비드가 여자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가장해 보아도 그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다. 또다시 그는 솔로가 되는 것이고 사회의 이단아가 되지만, 재교육 기관인 호텔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기에 돌아갈 곳은 없다. 데이비드는 재교육을 통한 정상 시민으로의 회생의 기회도 날려버린 셈이다. 숲으로도 더더욱 돌아갈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다. 그곳에서도 호텔과 마찬가지로 도망자 신세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어떠한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갈 용기가 없기에 마지막 씬에서 꽤 오랜 시간 머뭇거린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사회 체제에 의해 자유의지를 잃은 것이다. 근시 여자 또한 데이비드만을 믿고 도시로 나오게 되었기에 데이비드가 없다면 그 또한 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 모두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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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숲, 도시 그리고 우리들


 

다시 오프닝 시퀀스로 돌아가 보자. 여자와 당나귀 사이의 어떠한 전사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나귀 또한 애인을 만들지 못하여 동물로 변한 인간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죽은 당나귀가 인간이었던 시절, 정상적인 사회 규범에 따라 애인을 만들어 커플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는 쉽사리 여자에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으로 죽었다고 하더라도 여자는 살인 혹은 상해의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당나귀가 여전히 인간이었다면’의 가정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상적으로 커플이 된 인간’이란 한정적 가정이다.


영화 속에서 죽은 당나귀는 인간이 아닌 당나귀, 즉 동물이기에 그가 죽어도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에 의해 죽었는지, 자연사했는지, 사고사했는지에 대해 세상은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이다. 동물이 된 인간은 사회에서 도태당했단 의미와도 같다. 인간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가치의 낙인이 찍힌 존재이므로 사회 체계는 정상 인간들과 같은 사회에 살 수 없도록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로 그들을 내쫓는다.


즉, 당나귀로 변한 인간은 사회의 약자인 것이다. 당나귀가 된 후의 삶은 더욱 그렇다. 약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약자는 최후의 순간까지 약자로 남아 최전방의 약자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이분법의 메타포를 제시한다. 사람-동물, 호텔(도시)-숲, 커플-솔로, 동성애-이성애, 여성-남성 등등. 모두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극단의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거시적으로 본다면 모두 그 사회와 집단에서 만들어낸 것들이며, 그곳을 지배하는 엄격한 규율은 개인을 옥죈다.


사랑하라 강요하는 호텔과 사랑하지 않길 강요하는 숲 중 어느 곳이 더 자유로운 곳일까. 두 공간 모두 자유가 없는 곳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특성으로 인해 영화 밖의 실제 사회와 영화가 구축한 사회를 비교하게 된다. <더 랍스터>의 세계에서 현재의 사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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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의 인물들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 매 순간은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좁혀진다. 데이비드의 선택은 크게 호텔에 남을 것인지 탈출할 것인지, 숲에 남을 것인지 도망칠 것인지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씬은 데이비드에게 양자택일의 순간이 아닌 여러 상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눈을 찌를지 말지 외에도 눈을 찌르고 근시 여자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 눈을 찌르지 않고도 눈을 찌른 척 연기하며 여자와 살아갈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눈을 찌르지 않고 근시 여자를 버린 채 도망갈 것인지 등의 여러 선택지 앞에 놓인다. 이 때문에 데이비드는 머뭇거린다. 사회가 구성한 양자택일의 상황에 길든 개인은 여러 선택지에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이 고민은 결국 근시 여자의 곁에 머물 것인지 아닌지로 환원된다.


사회의 억압을 수긍하지 않는다면 동물이 되어 인간으로서의 삶을 앗아갈 것이란 공포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다시금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처럼 사회는 개인이 양자택일만을 하도록 사회를 구성했다. 영화는 과장된 세계를 보여주지만, 과장을 걷어내고 본다면 현재의 한국 사회와 영화의 세계는 비슷하다.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순 있지만 그에 대한 실패의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사회는 개인에게 회생의 기회를 여러 번 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개인은 사회가 규정한 몇 가지의 선택지 안에서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힌다. 특히, 한국은 세대별 과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에 따른 과업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온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취업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그동안 지금까지 뭐 했나’와 같은 시선이 돌아온다. 주변인들의 시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데이비드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리스크를 두려워한다. 그렇게 대다수는 사회 체계로 조용히 들어가 수긍하는 삶을 살게 된다. 사회가 만들어낸 분위기는 쉽사리 무시될 수 없다.


재교육 기관인 호텔 또한 기간 내 애인을 만들지 못하면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를 통해 개인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호텔에 머무는 기간 내에만 애인을 만들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말은 의미 없다. 기간 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살기 위해 다리 저는 남자처럼 있지도 않은 공통점을 억지로 만들어  평생을 거짓으로 살아야 한다. 거짓으로 사는 삶이 들킨다면 사회는 개인을 용서치 않는다. 실패한 사람을 구제할 보호막을 살펴볼 수 없다는 점 또한 실제의 사회와 겹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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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의 제목은 데이비드가 자신이 되고 싶은 동물로 랍스터를 지정한 것에서 기인한다. 랍스터는 실제로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아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물이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 도태된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보통 무지한 상태나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의 도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도태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박탈당했지만 ,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 혹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본인의 의지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보인다. 근시 여자는 데이비드가 어떠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전자에 속할 것이다. 반면, 데이비드는 선택의 순간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기에 후자에 속한다. 근시 여자와 데이비드 모두 이미 랍스터가 된 것이다.


만약, 데이비드가 근시 여자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홀로 남아 솔로가 된 근시 여자는 다시 호텔로 향하게 될 것이다. 혹은 바로 동물이 될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반복되고, 개인은 사회 구조 앞에서 무력해진다. 사회의 압제에 대항 아닌 대항을 펼쳤지만 결국 개인은 다시 사회가 짠 거대한 판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억압했던 구조를 재생산하게 된다.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우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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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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